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60)
블랙 라벨-159화(160/299)
블랙 라벨 159화
160. 운명이 바뀌는 파티
“시간이 별로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칼 라거벨트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벗어서는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그렇게 선글라스 뒤편에 가려져 있던 그의 두 눈이 드러나던 순간, 재승이 한차례 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설마……?”
“그래.”
그의 푸르스름한 동공은 뭐랄까? 희뿌연 먹구름이 껴 있는 것처럼, 탁하게만 보일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를 대목이었으나, 재승의 표정은 마냥 심각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점차 시력이 감퇴하고 계신 겁니까?”
“Bingo-”
사뭇 흔쾌한 투로 답해 보인 칼 라거벨트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채 마냥 덤덤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시력이 감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때에는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었다지만, 지금은 아니야. 뭐랄까?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이거든. 신의 뜻을 거스를 정도로 천재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이런 재앙이 일어난 건 아닐까 싶네. 꼭 ‘베토벤’처럼 말이야.”
남의 이야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심경을 토로하고는 한차례 박장대소를 해보이기까지 했다.
재승이 애잔함이 잔뜩 서린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 칼 라거벨트가 “아니. 아니” 하고 말해 보이고는 제 고개를 몇 번 내저었다.
“자네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자, 아직은 절대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비밀을 누설한 게 아니야.”
이내 재승이 한차례 상념에 젖어들었다.
자신이 점차 시력을 잃어가고 있던 때의 기억들이, 기억의 수면 저 아래편에 잠들어 있던 그 음울하고 어두운 기억들이 다시금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던 탓이었다.
한차례 “후…….” 하고 묵은 숨을 토해 보인 재승이, 제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보이며 답했다.
“그럼 대체 어떤 반응을 원하신 겁니까? 저는 의사가 아니에요. 이런 시선으로 바라봐 드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고요.”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답하려 노력한 끝에 내놓은 답변이었다.
잠시간 재승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칼이 “리” 하고 말문을 연 뒤, 우수에 젖은 눈으로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말했던 그대로야. 내 시력 따위는 어찌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드네. 신은 내게 극단적인 형벌을 내렸고, 나는 절망에 빠졌었지만 극복했지.”
“정말 괜찮은 겁니까?”
“내가 남긴 작품들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칭송받고 있으며, ‘칼 라거벨트’라는 이름은 또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어.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이제 칼 라거벨트의 디자이너로서의 삶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온 것뿐이라고 생각하네.”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칼 라거벨트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은퇴 이전에 꼭 해결해야만 하는, 한 가지 과업이 있네.”
“과업이요?”
“다름 아니라 코코 쟈넬의 의지를 계승하여 쟈넬을 이끌어줄 후계자를 찾는 일일세. 코코 쟈넬의 후계자이자, 나의 후계자가 되어줄 인재를 찾는 일 말이야.”
그의 말이 끝맺어지던 찰나, 재승이 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의구심이 살짝 서린 투로 되물었다.
“잠시만요, 칼. 설마 저를 쟈넬의 차기 디렉터로 낙점해 두신 건 아니겠죠?”
“맞아. 보면 볼수록 자네가 적임자인 것 같더군. 브랜드를 통치하는 ‘왕’은 경영권을 쥐고 있는 늙은이들이 아니야. 브랜드의 모든 실무를 총괄하는 디렉터들이지.”
말을 마친 칼 라거벨트가 제 양 손바닥을 가볍게 문질러가며, 재차 뒷말을 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쟈넬 왕국의 새로운 왕을 상상해 보고 있네. ‘*메인스트림(Mainstream: 주류)’ 신에서 활약 중인 디자이너들 중, 쟈넬과 잘 어울리는 이들을 왕좌에 앉히기도 해보고 도로 끌어내려 보기도 하고 있지.”
“그런데요?”
“자네만한 적임자가 없어. 누군가는 오뜨 꾸뛰르와는 좀처럼 걸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고, 또 누군가는 나이가 너무 많아. 또 누군가는 이미 자신의 브랜드를 경영하는 데 여념이 없고, 반대로 또 누군가는 왕좌를 거머쥐기에는 성과가 미비하지.”
이런저런 말을 잔뜩 늘어놓던 칼 라거벨트가, 제 얼굴을 살짝 들이밀어 보이며 재차 덧붙였다.
“모름지기 왕이라면 격식을 유지하고 예의를 지킬 줄도 알아야겠지만, 때로는 필요에 따라 폭군처럼 강압적인 통치를 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타국의 왕이 지닌 명성이나 권력에 위축되지 않고,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용기도 필수적인 덕목들 중 한 가지일 테고 말이야.”
“칼, 하지만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을 하려거든, 도로 넣어두게. 자네 역시 메인스트림의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들 중 한 명이고, 메인스트림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 중 ‘천재’라 불릴 자격이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니 말이야.”
이내 재승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아닙니다. 칼에게 코코 쟈넬의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는 과업이 있듯, 제게도 저만의 브랜드 ‘월 플라워’를 세계 최정상 브랜드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과업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던 것뿐입니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였기 때문일까?
칼 라거벨트가 큼지막한 제 양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고는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리, 확신하지. 쟈넬은 네가 상상하는 모든 영광들이 잠재되어 있는 매력적인 곳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월 플라워를 쟈넬보다 더 매력적인 브랜드로 만드는 게, 제가 추구하는 영광스러운 일들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일일 겁니다.”
그가 리를 쟈넬의 차기 디렉터로 점찍어두었던 이유는 자못 간단했다.
리는 오직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고민을 할 줄 아는 디렉터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일전에 있었던 기자회견 당시의 발언에서도, 또 크리스찬 디옴의 오뜨 꾸뛰르를 준비하던 과정에서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더러 받았었으니 말이다.
이내 칼 라거벨트가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몇 번 고개를 끄덕여댔다.
리에게 대를 물려줄 수 없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라지만, 시간을 두고 눈에 불을 켠 채 천천히 찾아본다면 적임자를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비록 아주 어려운 작업이 되겠지만 말이다.
“일단 알겠네. 행여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다면…….”
“죄송스럽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어쨌든, 파티를 빛내줘서 고맙군.”
체념한 듯 답해 보인 칼 라거벨트가 먼저 응접실을 나서려던 찰나. 갑자기 뒤돌아서서는, 재승을 바라보며 엷게 떨리는 투로 재차 물음을 건넸다.
“구차하기 그지없는 부탁이라지만, 혹시 딱 한 시즌만 도와줄 수는 없겠나?”
“예?”
“이번 시즌이 내 마지막 시즌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드디어 디자이너 칼 라거벨트의 마지막 시즌이 도래한 거야. 기왕이면 명성에 걸맞은 유작을 남기고 싶은데,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역부족일 것 같군.”
“…….”
“그 어떤 조건이든 맞춰 주도록 하지. 딱 한 시즌만, 서브 디렉터 직을 맡아주었으면 좋겠군.”
장내가 돌연 정적에 휩싸였다. 칼은 침묵을 못 견디겠다는 듯 제 엄지손톱을 ‘딱. 딱’ 물어뜯어 대는 중이었고, 재승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한창 동대문에서 일하고 있던 무렵. 칼 라거벨트의 갑작스러운 은퇴가 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만 당시에도 이런 비화가 숨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칼 라거벨트는 언제 은퇴하더라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성과를 내보인 노장(老將)이었으니 말이다.
문득 정말 많은 게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의 외곽에서 칼의 은퇴를 아쉬워하던 전생과는 달리, 이젠 그 중심에 선 채로 내막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만감이 교차하는군요.”
“나야말로.”
뭐랄까? 마치 공복에 기름진 음식을 잔뜩 집어먹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마냥 더부룩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잊고 있던 비루한 감정들이 연쇄적으로 떠오른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으로 앞을 볼 수 있는 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휩싸이던 그날들이 겹쳐진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재승이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답했다.
“칼, 이번 시즌은 너무 중요해요. 월 플라워의 프리미엄 브랜드화가 달려 있는 중대한 시즌입니다. 거절은 아니고…… 너무 많은 도움을 드릴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제 주 업무는 어디까지나 월 플라워입니다. 마냥 쟈넬하우스에 발이 묶여 있을 수는 없는 터라, 자리를 비우게 되는 날도 많을 거예요. 하지만 평범한 서브 디렉터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내는 유능한 서브 디렉터 정도의 역할은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재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칼 라거벨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그 정도면 넘치는 도움이라고 생각하네.”
어디서 봤더라? 노인은 불타는 도서관과 같다는 구절을 읽었던 적이 있다.
칼이라는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 그에게 있어 쟈넬의 이번 시즌은,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서적들을 축약한 한 권의 책을 쓰는 작업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책의, 공동 저자가 된 셈이고 말이다.
* * *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인 시각, 재승은 연회장 안쪽에서 송 이사와 통화를 하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뭐? 그럼 칼 라거벨트의 서브 디렉터 직을 맡게 됐다는 거야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월 플라워의 이번 시즌에는 아무런 차질도 없을 테니, 걱정 않으셔도 될 거예요.”
-아무런 차질도 없을 거라니? 이번 시즌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이번 시즌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프리미엄 브랜드화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거 아냐?
“이사님. 딱 한 번만 더 믿어주세요. 분명히 선을 그어두기도 했고…….”
한창 말을 이어나가던 재승이 저 멀리, 연회장을 가로질러 걸음을 옮기고 있는 영국을 발견하고는 “잠깐만 있다가 다시 전화드릴게요.” 하고 말해 보인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인파를 뚫고 영국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멀리서 언뜻 보기에도, 영국의 표정이 그닥 좋지 못했던 탓이었다.
‘혹시 위즈덤 칼리파한테 독설이라도 들은 건가……?’
지금이야 메인스트림 마켓을 종횡무진 누비는 ‘랩스타(Rapstar)’라지만, 그의 출신을 고려해 본다면 욕설이 잔뜩 가미된 수위 높은 독설을 날렸다 하더라도 일절 의구심이 들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신히 영국의 바로 뒤편에 다다른 재승이, 널찍하기 그지없는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입을 뗐다.
“영국아.”
“재, 재승아…… 안 그래도 한참 찾았어.”
“야, 너 왜 그래?”
가까이서 대면하고 보니, 멀리서 봤을 때보다 안색이 훨씬 좋지 못하다는 사실이 면밀히 느껴지는 듯했다.
재승이 마냥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국을 들여다보고 있던 찰나.
“이제 다 끝났다.”
한차례 “뭐가 끝이야?” 하고 물어 보인 재승이, 미간을 팍 찡그린 채 재차 말을 이었다.
“손영국, 너 설마 쓴소리 몇 마디 들었다고…….”
그때, 고개를 한 번 내저어 보인 영국이 돌연 재승을 꽉 끌어안으며 외쳤다.
“고생 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