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64)
블랙 라벨-163화(164/299)
블랙 라벨 163화
164. 데뷔 준비
한국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지난 한 달은, 뭐랄까? 지면 매체 인터뷰는 물론이고, 인터넷 혹은 TV뉴스 인터뷰, 광고 및 화보 촬영에 이르기까지…….
눈코 뜰 새조차 없는 정신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설명한다면 꽤나 적합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정말 가끔씩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생길 때면,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해 대고 있는 국내 유명 인사들과 어울리곤 했다.
국내에서 만큼은 꽤나 이름이 알려진 모델이나, 연예인, 가수, 영화배우 등이 그 범주에 속했고 말이다.
애석하게도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만남은 아니었다. 어울리기 이전에 직감했던 그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독하리만큼 거대한 따분함을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모처럼의 휴일에 사무실에 출근한 뒤 프링글스 감자 칩을 집어먹으며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있자, 송 이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음을 건네 왔다.
“오늘은 왜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는 거야? 요즘 짬 날 때마다 연예인들이랑 어울려 노느라 정신없는 거 아니었어?”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형편없더라고요. 차라리 이사님이랑 맥주 몇 캔 마시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걸요?”
한차례 “뭐? 나랑? 의외인데?” 하고 중얼거리듯 물음을 건넨 송 이사가, 호기심이 가득 서린 눈을 한 채 재차 물었다.
“왜? 어땠는데? 나한테도 설명 좀 해줘 봐.”
손가락을 살살 비벼 손끝에 남아 있던 과자 가루를 모두 털어내 버린 뒤, 덤덤한 어투로 그들과 어울리던 무렵의 일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우선 선상 레스토랑에서 비밀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주차장 엘리베이터와 스카이라운지 바의 룸이 연결되어 있는 유명 호텔에서 여흥을 즐기는 게 보편적이었는데…….
글쎄?
그다지 유쾌한 시간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뿐더러, 그렇다고 하여 딱히 실용적인 느낌이 들지도 않았기에 금세 관두었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고등학생 몇 명이 용돈을 모아 즐기는 불꽃놀이 같은 느낌이었다고 표현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는 적나라한 평가도 덧붙였고 말이다.
“아무래도 제가 조금 더 자극적이고, 영감이 충만한 휴식시간에 길들여져 있는 탓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그냥 조금 어정쩡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말 제대로 놀 수 있는 즐거운 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생산적인 느낌이 드는 만남도 아니고…….”
사실 달리 생각해 본다면 지루함을 느끼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였던 재승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겨 보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자신들의 일상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하는 느낌이에요.”
“예를 들면?”
“저를 한강 위를 둥둥 떠다니는 선상 레스토랑에 데려간 한 배우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이재승 디자이너, 여기 어때요? 이런 곳은 처음이죠?”
괜히 한 번 키득거려 보인 송 이사가,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보이며 되물었다.
“그렇게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이런 곳에 데려와줘서 눈물 날 정도로 기쁘다고 해준 거 맞지? 그나저나 대체 얼마나 굉장한 곳이었길래 그래?”
“그냥 나름 운치 있는 곳이었어요. 연예인들이 종종 오는 곳인 것 같더라고요. 그날만 하더라도 족히 열댓 명 정도는 본 것 같네요.”
“그 배우 말이야, 만약 자기가 LA의 아이비 레스토랑이나 파리의 루드아앵 레스토랑 같은 곳에 데려다 주기라도 하면 완전히 졸도하겠는데? 왜? 톰 크루즈나, 윌 스미스랑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밥 먹어본 적도 있다고 자랑이라도 하지 그랬어?”
이내 재승이 손사래를 쳐가며 “뭐 하러 그래요?” 하고 답해 보였다.
송 이사가 앞서 말했던 레스토랑 두 곳은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들이나, 가슴 근육의 크기를 키우는 데에만 한 해에 4만 달러 이상을 지출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는 거부들이 종종 찾아오는 곳이었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곳에서 매일같이 식사를 하곤 했었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평생 일해도 만져보지 못할 거액의 돈을 한 해분의 세금으로 납부하곤 하는 이들과 비즈니스를 논의했고, 주변 테이블에는 전 세계 어디서든 얼굴을 알아봐주는 유명인들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찌 선상 레스토랑에 진심으로 감탄해 줄 수 있겠는가?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바(Bar)라든지, 초대받아 놀러갔던 반포 부근의 아파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룻밤 새 몇백만 원을 술값으로 지출한다는 사실을, 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신축 아파트에 기거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글쎄?
아르도 회장과 함께 일하던 내내 파리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백 이십 평대 펜트하우스에서 지내지 않았던가?
냉장고에는 한화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헤네시사(LVMH 그룹의 자회사)’의 리차드급 코냑이 잔뜩 채워져 있었고, 심심할 때면 아무렇지 않게 앉은자리에서 한 병씩 비워내곤 했었다.
만약 과시를 즐기는 성격이었다면 모를까, 그런 쪽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관계로 어울리는 데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내 송 이사가 음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그럼 영업적인 마인드를 품어보는 게 어때? 언제 어떻게 도움이 되어줄지 또 어떻게 알아?”
“그 사람들 도움이 간절한 상황이라면 아마 제 인생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상황일걸요?”
“어쨌든 쉬는 날에는 되도록 사무실 나오지 마. 뭐가 좋다고 쉬는 날까지 나와서 앉아 있어? 젊음을 즐기고 그래. 내가 자기 나이일 때는, 온갖 주색잡기에 능통했었다고. 적어도 또래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 암, 그렇고말고.”
“주색잡기가 제 취향이 아닌 걸 어쩌겠어요? 차라리 책을 읽거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게 훨씬 더 마음 편하고 좋아요.”
명백한 진심이었다. 그렇게 형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가족들이 떠오르기 일쑤였고, 고리타분한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노라면 송 이사와 삼겹살에 소주 몇 잔을 곁들이던 시간이 떠오르곤 했으니 말이다.
종종 와인 몇 잔 탓에 눈이 살짝 몽롱해진 유명 여배우들이 추파를 던져 올 때면, 그녀들의 얼굴 위로 애슐린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동시에 죄책감이 솟구치는 소름 끼치는 경험까지도 해볼 수 있었다.
이내 이죽거리는 투로 “선비 납셨네, 선비 납셨어” 하고 말해 보인 송 이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휴일에 이런 얘기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기왕 나왔으니 일 얘기 좀 해도 되지?”
“얼마든지요.”
“일단 사전에 지시해 준 대로 이상윤이가 디자인한 ‘월 플라워 머슬 핏’과, ‘슈퍼 스키니 핏’의 특허권 등록을 마쳤어.”
“이상윤 씨와, 월 플라워. 공동명의로 진행된 것 맞죠?”
제 가슴팍을 몇 번 두드려 가며, “그렇게나 신신당부한 부분인데, 당연히 그렇게 처리했지” 하고 답해 보인 송 이사가 재차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더군다나 리더 스미스사에 위탁 진행하는 방식으로 처리했으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쪽이 돈독이 잔뜩 올라 있어서 그렇지, 일 처리 하나만큼은 깔끔하고 확실하게 잘 해주잖아?”
“가뜩이나 눈이 부실 정도로 밝던 미래가, 몇 배는 더 밝아진 것 같은데요? 이제 당분간 머슬 핏과 슈퍼 스키니 핏이란 이름의 혁신적인 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 브랜드는 우리 월 플라워뿐이니까요. 적어도 이상윤 씨가 월 플라워를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물론 특허를 공동명의로 등록해 둔 덕에, 이상윤이 월 플라워를 떠나 자신만의 브랜드를 설립한다더라도 월 플라워는 계속해서 머슬 핏과 슈퍼 스키니 핏 제품을 제작·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이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이상윤을 전속 디자이너로 영입하는 과정에서, 한화 3억 원에 달하는 급액을 지급해 줬던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라이센스 구매비용’이었다.
재승은 월 플라워 티셔츠 라인의 아이덴티티(Identity)가 되어줄지도 모를 기법을 고작 3억에 사들였으니 나름 헐값이라고 생각했고, 이상윤은 자신이 제출한 디자인이 3억 원의 가치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할 따름이었다.
어쩌다 보니, 양측 모두가 만족하는 이상적인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이내 잠시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송 이사가, 제 턱을 슬며시 어루만져 가며 조심스레 물음을 꺼내 들었다.
“사장. 머슬 핏과, 슈퍼 스키니 핏이 정말 3억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는 엄청나게 남는 거래를 했다고 생각해요. 내년도 파리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 기성복 부문)’는 우리 월 플라워를 위한 무대가 되어줄 거예요.”
“만약 다른 사람이 내린 결정이었더라면 팔 걷어붙이고 말렸을 거야. 내가 보기엔 그냥 타이트한 옷일 뿐이데, 그 라이센스를 3억 원이나 주고 구입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나마 자기가 내린 결정이니까 ‘혹시……?’ 하고 기대라도 해보는 거지.”
“일단 이제 티셔츠 라인만큼은 브랜드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틀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요. 팬츠, 진, 슈즈, 그 외의 기타 등등…… 나머지 모든 라인의 정체성까지 완성시킨다면, 월 플라워는 파리 패션계 유행의 선두 그룹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거머쥐게 될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브랜드의 정체성이다.
훗날 누군가가 특정한 옷을 보고, “이건 월 플라워의 옷 같은 느낌인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정체성을 갖추는 게 승부의 관건인 것이다.
마냥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려 대던 송 이사가, 무언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 맞아.” 하고 중얼거려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럼 프랑스로는 언제쯤 돌아가는 거야? 이제 디자인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으니까 슬슬 넘어가도 무방하지 않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티셔츠 라인이야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혔으니 간단한 수정·보완 작업으로도 완성 단계에 이를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라인은 아직 아니니까요. 애초에 넘어가야 할 시기가 오면 칼 라거벨트가 직접 호출해 줄 거예요.”
“그래? 일단 한 달 정도는 더 붙어 있을 수 있는 거 맞지?”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자, 송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제 인터뷰 비롯한 부가적인 일정은 더 이상 안 잡을 테니까, 그 안에 진도 좀 최대한 빼 보자고. 웬만한 중대한 결정들도 다 내려놓고.”
“중대한 결정이요? 예를 들면요?”
“어제 마케팅 부서 쪽에서 꽤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냈어. 아니지.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광민이 낸 아이디어야. 룩북 촬영 장소와 관련된 아이디어인데, 내친김에 겸사겸사 트레일러 영상까지 만들어 보자던데?”
그간 재승이 진행했던 쇼의 디스플레이는 모두 남광민의 머릿속에서 나온 안건들이었다. 물론 결과는 모두 성공적이었고.
신뢰감이 기반이 되어준 탓일까? 남광민이 꺼낸 아이디어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했다.
“촬영 장소가 어디인데요?”
“무중력 공간.”
재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떠보이자, 송 이사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내가 따로 알아본 결과 마냥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야. 간략히 알아보니까 해외 쪽에는 무중력 체험 패키지를 판매하는 업체가 몇 개 있더라고.”
“가격대는요?”
“인당 한화 800만 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 최대 서른 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고 하니까, 스태프 인원을 최소화하면…….”
이내 재승이 이채가 서린 눈을 한 채 답했다.
“당장 추진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추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듯했다. 그저 촬영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화제에 오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기발하기 그지없는 촬영 장소이지 않은가?
뭐라고 해야 할까? 안 그래도 확신하고 있던 이번 시즌의 성공 확률이 점점 더 상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월 플라워가, 파리 패션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데뷔를 맞이한 브랜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