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68)
블랙 라벨-167화(168/299)
블랙 라벨 167화
168. 한 번쯤은……?
“나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절로 숙연해지곤 하더군.”
칼 라거벨트의 말에 재승이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재승은 현재 칼 라거벨트와 함께 쟈넬하우스의 로비와 이어지는 복도를 거니는 중이었다.
직원 전용 통로. 그것도 일정 직급 이상의 직원들만 발을 들일 수 있는, 금지(禁地)이자 성역(聖域)과도 같은 곳이랄 수 있었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하우스’(House)들이 으레 그렇듯, 쟈넬하우스 역시 인테리어에 상당히 공을 들인 곳이었다.
한데, 뭐랄까? 이 비밀스럽기 그지없는 공간에 유독 신경을 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고 하면 좋을까?
레드카펫이 깔려 있는 기다란 복도의 벽면에는 프리미엄 브랜드 쟈넬의 변천사를 설명해 주는 그림과 사진들이 각인되어 있었으며, 곳곳에 역사가 깃든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상태였다.
초대 설립자인 코코 쟈넬이 사용했던 재봉틀, 1대 오뜨 꾸뛰르 제품 제작에 사용되었던 원단 등…….
박물관을 견학하는 기분이었다. 칼 라거벨트는 재승이 무언가에 시선이 사로잡혀 걸음을 멈출 때마다 큐레이터처럼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아 주었다.
“트위드 소재(*순모로 된 스코틀랜드산 직물)로 만든 최초의 쟈넬 슈트지. 세련된 디자인을 하고 있지만 놀랍게도 1954년도에 출시되었던 제품이야.”
“그 단추는 놀랍게도 60년 전에 제작된 물건이야. 참고로 단추의 구멍을 없애고 브랜드의 로고를 새겨 넣은 것 역시 코코 쟈넬이 최초였지.”
그때 재승이 한차례 “와…….” 하고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단숨에 시선을 확 잡아끈 화려한 전시품 덕이었다.
재승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끔 만든 것은, 누군가의 손을 본떠 만든 ‘골든 핸드(Golden Hand)’ 조각상이었다.
이내 칼 라거벨트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역시 안목이 좋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전시품이지. 코코 쟈넬이 세상을 떠난 뒤 쇠락을 면치 못하고 있던 쟈넬을 제2의 부흥기로 접어들게끔 만든 유능한 디렉터의 손을 본떠서 만든 황금 조각상일세. 쟈넬에 오기 전까지는 기성복 디자이너였다는 커리어 탓에 괄시를 받아야 했지만, 불과 한 시즌 만에 ‘쟈넬을 젊고 캐주얼한,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변화시켰다는 평을 이끌어냈던 아주 유능한 디렉터의 손이지.”
이내 재승이 한차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각상의 하부 지지대 부근에 각인되어 있는, ‘칼 라거벨트’라는 이름 탓이었다.
자랑스럽게 여겨 마땅한 일이라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그의 능청스러운 면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기애적 성향이 상당히 뚜렷하시네요?”
“그야,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짤막하게 답해 보인 칼 라거벨트가 저 멀리 자리한 출문을 향해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사뭇 음울하다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쟈넬의 역사가 되었고, 쟈넬 역시 나의 역사가 되어 버렸지. 쟈넬에서 칼 라거벨트를 빼면 자그마치 40년이 지워져 버려. 내 삶 역시 마찬가지야. 내 삶에서 쟈넬을 빼고 나면…….”
무어라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그가 돌연 뒷말을 삼켜냈다.
선글라스 탓에 그의 표정을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으나, 억지로 자갈 한 움큼을 꿀꺽 삼켜낸 사람처럼 거북한 표정을 짓고 있단 사실쯤은 알 수 있었다.
필연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공간을 떠나야만 하는 그의 심정은 어떨까?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으나, 면밀히 알 수는 없었다.
그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하려 상상해 보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관두었다.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물에 젖은 휴지가 폐부를 꽉 틀어막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었다.
이내 재승이 의식하여 걷는 속도를 낮추었다. 칼 라거벨트가 몇 걸음 앞서 걸었고, 재승은 느릿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터벅, 터벅. 고요하기 그지없는 복도 안으로 음울한 발소리가 이따금씩 울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먼 미래에. 그것도 정말 먼 미래에, 은퇴를 앞두게 된 순간이 오면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이 유독 씁쓸해 보였다. 디자이너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거머쥔 이의 뒷모습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 * *
이른바 ‘*홀 오브 더 히스토리(*Hall of The History)’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거쳐, 로비에 첫 발을 내딛던 순간. 재승은 일정 간격에 맞춰 다닥다닥 붙어 선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직원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쟈넬하우스의 일원들과 정식적으로 대면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랄 수 있었다. 협업에 앞서, 간단히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자리인 것이다.
그들은 다들 하나같이 호기심 가득 어린 눈을 한 채 앞에 서 있는 젊은 동양인을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리’(Lee).
뉴욕 패션계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젊은 천재 디자이너.
불과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떠오르는 유망주에 불과했던 그였으나, 이젠 이야기가 사뭇 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가 자신의 재능을 과시한 영역은 단연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 기성복)’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브랜드 월 플라워는 본래 스트릿 브랜드의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크리스찬 디옴의 오뜨 꾸뛰르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며 자신의 디자인적 스펙트럼이 어찌나 방대한지를 과시했던 바 있으니 말이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재승이 칼 라거벨트와 낮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찰나. 쟈넬의 현 최고경영자 ‘알렉시’가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미 다들 알고계시겠지만, 서브 디렉터로서 쟈넬의 새 시즌을 함께 구축해 나갈 리(Lee)입니다.”
말을 마친 알렉시가 재승에게 살짝 눈짓을 해주기 무섭게, 재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는 꾸벅 묵례를 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장내 곳곳에서 귀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거세고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일말의 불안도 의심도 없이 격렬히 환호해 주고 있었다. 이름의 가치가 달라졌다는 증거였다.
‘리’라는 이름은 이미 패션계 내부에서 일종의 성공 보증수표로 통하고 있었다.
이내 칼 라거벨트가 재승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른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쟈넬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하네. 환영회는 이쯤 해두자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 시간이니까.”
* * *
하루, 하루, 또 하루. 시간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무심하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쟈넬에서의 생활은 꽤나 반복적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단조로운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칼 라거벨트는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많지만 딱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일을 지시했고, 재승은 맡은 일은 제대로 소화해 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디자인 팀 소속 디자이너들이 제출한 디자인을 칼 라거벨트와 함께 수정·보완하거나, 함께 메인 디자인을 구상하는 게 재승의 주된 업무였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어려웠고,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기도 했다.
이따금씩은 한창 준비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을 월 플라워의 새 시즌을 새까맣게 잊곤 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칼은 이와 같은 업무들을, ‘제2의 안목’이 되는 일이라고 불렀다. 알게 모르게 기분 좋은 표현이었다.
“요즘 부쩍 피곤해 보이는데 업무량을 좀 줄여줄까?”
도식을 살펴보고 있던 칼 라거벨트가 불쑥 건네 온 질문에,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내저어 보이고는 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적당량의 피곤함은 오히려 몸에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주의거든요.”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말하게.”
말을 마친 칼 라거벨트가 곧장 굵은 시가 담배 한 가치를 꺼내서는 입에 물었다.
그렇게 담배를 피워가며 도식을 살펴보던 칼 라거벨트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이마에 걸친 뒤 제 눈을 벅벅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재승이 그런 칼 라거벨트를 힐끗힐끗 바라보자, 칼 라거벨트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근래 들어 상태가 눈에 띄게 안 좋아지고 있어. 이번 시즌까지는 버텨내야 할 텐데 말이야.”
“어려운 일이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인 거 아시죠?”
“글쎄? 의사들이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둘러대는 핑계들 중 가장 그럴싸한 핑계임은 확실한 것 같군.”
재승이 한차례 “그 말씀도 일리 있네요” 하고 답하자, 칼 라거벨트가 협탁 한 구석으로 밀어두었던 서류철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어가며 입을 뗐다.
“그래도 다행이야. 시력이 더 감퇴하기 전에 이번 시즌 메인 라인의 디자인을 끝낼 수 있었으니까 말일세.”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칼은 곧장 파일철을 집어 들지 못했다. 손을 몇 번이나 더듬거리다가 간신히 집어 들었던 것이다.
이내 재승이 미간을 팍 좁혀 보이며 그를 불렀다.
“칼.”
“응.”
“왼쪽 눈의 시력이 급속도로 저하되고 계신 거군요.”
“눈은 한 개만 있어도 괜찮아.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지.”
칼 라거벨트가 애써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중요한 건 내 시력이 아니야. 쟈넬의 이번 시즌이지. 우선 도식부터 살펴보게.”
마치 더 이상의 연민을 원하지 않는다는 듯 강경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애써 덤덤한 표정을 한 채 파일철을 펼쳤다.
그렇게 첫 장을 펼쳐 보이던 순간. 재승이 저도 모르게 “와…….” 하고 감탄을 흘려보이고야 말았다.
놀라울 정도로 견고한 도식의 연속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새롭고 혁신적인 디자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칼 라거벨트가 패션계라는 이름의 정글에서 수십 년을 군림하며, 아니. 버텨가며 쌓아 온 모든 연륜이 담겨 있는 파일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엷게 떨리는 손으로 종잇장을 넘겨가며 마지막 도식을 확인하던 순간.
칼 라거벨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건네 왔다.
“어때? 이 정도면 화려한 은퇴가 될 수 있을까?”
“제가 그걸 장담할 수 있었더라면…….”
“알아. 그저 자네 의견을 묻는 것뿐이야.”
말을 마친 칼 라거벨트가 “나이를 먹으면 점점 감을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확신이 흐려지거든. 그리고 자네는 내 제2의 안목이 되어주기로 하지 않았나?” 하고 덧붙여 말했다.
이내 재승이 팔짱을 낀 채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정적만이 흐르기를 잠시. 재승이 사뭇 진중한 투로 말문을 열었다.
“칼, 정말 궁금하세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미래에서 봤던 쟈넬의 2014 시즌과는 아예 다른 도식들이 가득했으나,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 속의 쟈넬은 2014년 시즌을 최고의 시즌으로 장식한다.
그리고 성공의 주역인 칼 라거벨트는 박수갈채 속에서 은퇴를 맞이하게 되고 말이다.
물론 도식이 바뀌었으니, 결과 역시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과라고 하여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함께 과거로 돌아왔으나 여태껏 멀리 하고 있던 물건이 한 가지 있었다.
미래 잡지.
연필과 안경은 주구장창 사용했으나 미래 잡지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었다.
반칙인 것 같아서? 아니다.
애초에 연필도, 안경도 꽤 심각한 수위의 반칙이랄 수 있었으니까.
잡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행여나 타인의 디자인을 가로채거나, 타 브랜드에 영향을 주는 행위, 즉 타인의 미래를 멋대로 바꿔 버릴지 모를 부정행위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탓이었다.
“궁금하네.”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 왔던 칼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아니라, 월 플라워가 아니라, 쟈넬과, 브랜드의 시그니처 디자이너인 칼 라거벨트를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미래를 엿봐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