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7)
블랙 라벨-16화(17/299)
블랙 라벨 16화
17. 현재가 달라지면, 미래도 달라진다
정말 나다운 인터뷰 내용이었다. 아니,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할 내용들이 잔뜩 쓰여 있었다.
‘월 플라워’라는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삼게 된 이유부터 시작하여, 리폼 의류를 판매하며 겪은 이야기, 중간중간 도움을 준 같은 반 친구 ‘영국’의 이야기까지.
“흠.”
인터뷰 내용을 몇 번이고 정독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다음 잡지책을 덮고, 방 안의 고요함을 만끽하고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리 위로 물음표가 잔뜩 떠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백지에 불과하던 잡지책이, 어째서 이런 변화를 맞이한 것일까? 많고 많은 잡지들 중, 왜 하필 ‘에프 트렌드 뷰(F Trend View)’로 변한 것일까? 나와 연관성이 생겼기 때문일까?
이 잡지책은 ‘소모성’일까? 아니면 추후에 또다시, 다른 잡지책으로 변할 여지가 있는 것일까?
만약, 정말 만약. 앞으로도 계속 다른 잡지로 변한다면? 계속해서 멀지 않은 미래를, 조금씩이나마 엿볼 수 있는 거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양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만약 예상이 맞다면.
이 잡지책은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한 지식과, 나비효과로 인해 발생할 현실과의 괴리를 최소화시켜 줄 수 있는 엄청난 물건이 되어 줄 게 분명했다.
* * *
다음 날, 학교 점심시간. 평소였더라면 토플 책을 펼쳐놓고 공부에 할애했을 시간이라지만, 오늘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점심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영국을 데리고 학교 운동장으로 나왔다.
“야, 이재승. 너 범생이로 전향한 거 아니었냐? 갑자기 운동장은 왜?”
“범생이도 가끔은 광합성 좀 하고 그래야지 않겠냐?”
늦가을과 초겨울의 접점. 선선한 바람과 오후 2시의 따스한 햇볕이 꽤나 조화로웠다.
고등학교 운동장이 으레 그렇듯, 곳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패스! 패스!”
“야! 뭐 해?! 막아-!”
재승과 영국은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친구들을 피해, 운동장 외곽을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었다.
“아, 맞다! 나 이번 겨울방학 때부터 음악학원 다니기로 했어. 내가 말 했나? 안 했지?”
“응, 처음 들어. 갑자기 웬 음악학원?”
듣기에 굉장히 반가운 말이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차분한 투로 되물었다.
“실용음악 학원. 저번에 네가 ‘칸예 이스트(Kanye East)’ 영상 보여줬었잖아.”
“아, 그랬지.”
“허황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냥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더라고.”
멋쩍다는 듯 제 뒤통수를 긁적여 보인 영국이, 이내 실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차 말을 덧붙였다.
“엄마한테 조심스레 말 꺼내봤더니, 바로 알았다고 해주시더라.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잘됐네. 그럼 학원에서는 뭘 배우는 거야?”
“아마 ‘미디(Midi)’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것들 배우겠지? 일단은 계이름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할걸? 사실 나 계이름도 읽을 줄 모르거든.”
영국의 솔직담백하기 그지없는 답에, 재승이 한차례 웃음을 흘려보였다.
“야, 그 정도는 내가 알려줄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기대되네. 떨리기도 하고.”
“그래?”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재승이 가볍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영국아. 나중에 이러면 되게 멋있을 것 같지 않아?”
“응?”
“나중에 네가 유명 *‘셀럽(*Celeb)’이 돼서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거야.”
영국이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아무런 말도 않고 있자 재승이 재차 말을 이었다.
“아직 발매되지도 않은 옷을, 네 무대에서 먼저 선보이는 거지. 네 앨범 커버 작업 같은 것도 같이 하고, 뭐 훨씬 나중에는 ‘월 플라워 X 손영국’ 이런 이름으로 콜라보레이션 작업도 진행하고.”
재승이 말을 이어나가면, 이어나갈수록 영국의 표정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와, 개쩐다. 진짜 멋있겠다….”
“할 수 있어.”
“응?”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흔들리지만 않으면 돼. 그럼 결국엔 다 할 수 있어.”
단언하듯 확신에 가득 찬 투로 말해보인 재승이,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생에서 수많은 꿈이 좌절하는 모습들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봐왔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현실의 벽 때문에?
아니다.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태반은 ‘주변의 말’ 때문에 제 꿈을 꺾는다. 현실성을 강요하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을 불어넣는 주변의 말 때문에.
스스로도 잘 모르는 자신에 대해 평가하고, 점수를 매겨대는 주변 사람들의 말 때문에.
이윽고.
재승이 정말 해주고 싶던 말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 소신 있게 꿋꿋하게 해보자고.”
“짜식. 고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운동장 몇 바퀴를 연달아 돈 뒤였다.
이내 재승이 영국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야, 영국아. 그건 그렇고, 오늘 시간 되냐?”
“오늘? 왜?”
“왜긴, 좋은 곳이나 데려가줄까 해서 물어봤지.”
“좋은 곳?”
미간을 팍 찡그리며 되물어 보인 영국이, 이내 재승의 가슴팍을 가볍게 툭 쳐 보이며 답했다.
“야! 속이 너무 훤히 보이는 거 아냐? 넌 동대문이 좋은 곳이냐?”
“동대문이 뭐 어때서? 나한테는 좋은 곳이라고. 그래서 갈 거야, 말거야?”
“오늘은 밥 살 거냐?”
“응. 닭 한 마리 칼국수 살게. 콜?”
이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재승을 바라보던 영국이, 꽤나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오케이, 콜! 같이 가자.”
명백한 자본주의의 미소였다.
* * *
동대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버스 안.
나른한 기류가 몸을 휘감는다. 히터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따뜻한 바람. 엔진 탓에 느껴지는 주기적인 진동.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영국이 고개를 꾸벅거려가며 졸고 있었다.
‘짜식, 잘도 자네.’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든, 토플 책을 보든 하고 싶었다.
하나, 마음이 영 뒤숭숭한 탓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고민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했다. 일단, 재승은 자신의 ‘미래 잡지’를 일련의 계시 정도로 여기고자 마음먹은 상태였다.
‘일단 에프 트렌드 뷰 매거진 편집 팀과 접점이 생겼다는 것만 감안해 보더라도, 마냥 일어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일은 아니겠지….’
아직 절대적인 정보로 여기고,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간 겪은 경험들을 토대로 예측컨대, 자신에게 해가 될 물건은 아님이 분명했다.
앞서 그 힘을 체감해 보았던, ‘시계’와 ‘연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흐음.”
한차례 침음을 흘려 보임과 동시에, 시선을 차창 밖으로 옮겼다.
일단 재승은 현실이, 미래 잡지에 수록된 대로 흘러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었고, 잡지에 등재되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깟 마이너 잡지 인터뷰’라고 평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적어도 재승에게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잡지에 실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지난 생에서는 일평생 이미테이션만 만드느라, 대중들의 앞에 서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꽤나 큰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인정받아 마땅한 기술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선망’이고, ‘동경’이었다.
‘그래, 일단 천천히 계획을 세워보자.’
이내 재승이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머릿속에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현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끔 만들려면. 즉, 미래 잡지에 수록된 대로 흘러가게끔 만들려면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 할 듯싶었다.
일단은 현재 에프 트렌드 뷰 편집 팀이 기획 중에 있는, ‘리포머 특집’이 불발되게끔 해야 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멋대로 선정한 유망주 10인!’이란 이름의 특집으로 대체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리포머 특집을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자연스레 그렇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하나, 만약 아니라면?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이니만큼, 철두철미하게 대비해야 한다.
자신이 리포머 특집의 취지와는 부합하지 않는 것 같다며 거절의 말을 전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준비해서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동안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재승이, 이내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나름 괜찮다 여겨지는 생각이, 불연 뇌리를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그래, 샘플! 샘플을 보여주자!’
이제 에프 트렌드 뷰 편집 팀과의 사전 미팅일까지 남은 기한은 딱 6일.
어제 잠들기 전, 대략적인 디자인 스케치와 자체 제작 의류들의 컨셉을 명확히 하는 데 성공한 재승이었다.
그래서 원단 및 부자재를 구입하러 향하는 중이기도 했고 말이다.
오늘 원단 및 부자재 구입을 마치고, 곧장 작업에 돌입한다면 미팅 일자까지 샘플 본 한 벌 정도는 어떻게든 완성시킬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설령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해내야 한다.
‘흠, 또 다른 방법은 뭐 없을까?’
일단 방책 한 가지를 떠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내 재승이 팔짱을 낀 채, 훨씬 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와중에도, 재승과 영국. 두 사람이 탄 버스는 여전히 동대문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