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70)
블랙 라벨-169화(170/299)
블랙 라벨 169화
170. Zero Gravity
‘리(Lee), 많은 것을 배우는 것 보다는 한 번 배운 것을 잊지 않으려는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해.’
언젠가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칼 라거벨트와 위스키를 나눠 마시던 중, 그가 돌연 꺼내 들었던 말이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여 가며 공감하는 척했었다.
뭐,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는 꽤나 그럴싸해 보이는 말이기도 했고.
어쨌든 그 당시 들었던 조언(?)의 참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더 흘렀을 무렵의 일이었다.
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쟈넬이 ‘*새 시즌(*2015 파리 패션위크)’를 통해 선보이게 될 제품들의 라인업 역시 점점 더 견고한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하나, 촘촘하게 짜인 일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왜냐고?
이유는 총 세 가지였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쟈넬이 단순히 의류만을 취급하는 브랜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의류 신상품이 출시되는 시기에 맞춰 향수, 시계, 주얼리 등 온갖 유사 제품군의 신상품 역시 함께 출시해야 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태생적으로 바쁘게 회전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띤 채 설립된 브랜드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칼 라거벨트가 쟈넬의 평범한 디렉터가 아니라, 모든 영역을 총괄하는 ‘총괄 디렉터’였기 때문이었다.
칼 라거벨트의 디자인적 스펙트럼에는 도무지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단연 의류뿐 아니라 디자인이라는 작업이 필요한 모든 영역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쟈넬의 로고를 달고 출시되는 모든 제품의 디자인에 참여했다.
그는 매일 오전·오후마다 각 한 번씩 제품 디자이너들과 열띤 회의를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제품의 디자인을 화려하고 매혹적인 형태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 번째 이유는 사실상 내게 주어진 ‘주 업무’가 칼 라거벨트의 모든 일정을 보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브 디렉터들이 으레 그렇듯 모든 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으며,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쏟아내야 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는 타 제품군과 관련된 회의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월급일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한 행위인 동시에, 또 월 플라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행동이기도 했다.
향수, 시계, 주얼리 등…….
퇴근 후 잠자리에 들기 전마다 들여다보기 시작한 미지의 영역들은 너무도 넓고 방대했다.
의류와 비슷한 점이 있어 이해가 쉬운 부분이 있는가 하면, 의류와는 너무도 극심하게 대조되어 역으로 이해가 어려운 부분들도 존재했다.
어쨌든 쟈넬은 ‘도움이 되는 공간’임이 분명했다.
배울 것 하나 없는 곳이 어디 있겠냐만은,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었으며 배운 것을 완벽히 체득할 수 있게끔 다그쳐 주는 곳이기도 했다.
적어도 웬만한 명문 디자인 스쿨들보다는 쟈넬의 실무가 훨씬 더 실용적이고 도움이 된다고 확신할 수 있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주어진 일상에 몰입하다 보니 자연스레 불안감이 사라졌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러니까, 처음 공부를 하고자 결심하고 구비해 두었던 관련 서적들을 모두 독파했을 무렵.
또 회의 시간에 더 이상 버벅거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자신감이 가득 차올라 월 플라워 역시 빠른 시일 내에 의류 외적인 영역(*향수, 시계, 주얼리 등)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도전적인 희망을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
잠시 쟈넬하우스를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향하게 되었다.
* * *
“왜 그래? 악몽이라도 꾼 거야?”
송 이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한 번 훔쳐낸 뒤, “아뇨, 그냥…….” 하고 대강 답해 보였다.
재승은 지금 렌트한 리무진 차량을 타고 캘리포니아 중심부에 우뚝 솟은 호텔을 향해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차량은 꽤나 빠른 속도로 주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별다른 소음 없이 마냥 고요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야, 사장. 건강 좀 잘 챙겨. 매번 쪽잠 자는 신세에 잘 때마다 악몽까지 꿔야 하면 너무 고달픈 인생 아니냐?”
“저야 젊기라도 하죠. 이사님이야말로 건강 유의하세요. 이제 진짜 어떤 질병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연세잖아요?”
리무진 차량이 호텔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재승은 송 이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칼 라거벨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쟈넬하우스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에 대해,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 또 월 플라워의 미래 방향성에 대해…….
송 이사는 특히 ‘월 플라워의 로고가 부착된 향수, 주얼리, 시계의 출시를 준비해 보면 어떨까?’ 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때에 유독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야 무조건 찬성이지! 일단 있어 보이잖아? 깊은 역사를 지닌 브랜드라면 무조건 발을 담그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고.”
그렇게 한창 대화를 주고받고 있노라니 어느덧 호텔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재승은 체크인 수속을 밟기에 앞서 로비 층 한편에 위치한 ‘연회실’로 향했다.
연회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인사를 건네오기 시작했다.
이들 모두가 내일 있을 룩북 촬영에서 저마다 한 가지씩 크고 작은 역할을 도맡게 된 스태프들이었다.
객실에 짐을 풀기도 전에 연회실을 찾은 이유는 자못 간단했다.
내일 있을 룩북 촬영의 촬영지는 ‘무중력 체험’을 위해 개조된 보잉747 여객기의 내부다.
모델이든, 스태프든 촬영에 참여하게 된 이들이 필수적으로 숙지해야 할 사항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이제 곧 시작될 설명회는 무중력 체험 패키지를 판매하는 여행사 측 관계자로부터(개조된 보잉747 여객기를 렌트해 준 여행사측 관계자로부터), 일련의 주의사항을 듣기 위한 시간이랄 수 있었다.
재승이 연회실의 연단 바로 앞쪽 자리를 꿰차고 앉은 지 채 5분이나 되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한 정장 차림의 서양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서서는, 연단 위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연단 중앙에 비치된 스탠딩 마이크 앞에 제 입을 바짝 가져다 대보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브랜드 월 플라워, 반갑습니다. ‘GZ(Gravity Zero)’의 빌리 조엘이라고 합니다. 우선 저희 GZ 측은 여러분의 혁신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바입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자 장내 곳곳에서 한차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박수 소리가 서서히 멎어들기 시작할 무렵, 그가 다시금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는 무중력 체험을 위해 개조된 보잉747 비행기를 45도가 넘는 급경사로 34,000피트 상공까지 상승 시킬 겁니다.”
GZ측 관계자 빌리 조엘은 마치 장난감 비행기를 가지고 노는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피슈우우-!’ 하고 기괴한 효과음을 내가며, 손으로 내일 보잉747 비행기가 이동할 궤적을 묘사해 주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비행기는 최고점에 달했을 무렵 잠깐 평행을 유지하다가 빠르게 하강을 시작합니다. 그 순간 기내는 완벽한 무중력의 공간이 되는 셈이죠. 여기까지가 ‘무중력 공간’을 구성하게 되는 기본 원리 정도입니다.”
이내 스태프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그런 원리로 무중력 공간을 생성하는 원리라면 지속 시간이 그닥 긴 편은 아닐 것 같은데…… 대략 얼마 동안이나 지속되는 거죠?”
“좋은 질문이군요.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얼추 이삼십 초 남짓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짤막하게 설명을 마친 빌리 조엘이 제 사견을 덧붙였다.
“여러분께서는 촬영을 목표로 렌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글쎄요? 무중력 공간에서의 화보 촬영, 분명 혁신적인 일이지만 어려운 작업이 될 겁니다. 일단 스태프분들께서 현장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촬영 자체가 불가능할 겁니다. 어쩌면 하루 내에는 목표로 둔 수준의 작업물을 건져내지 못하실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이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이들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내일 있을 촬영이 순조롭지 못할 것이란 예언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한 반응이랄 수 있었다.
“정말 큰일이네…….”
한차례 낮은 목소리로 말해 보인 송 이사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이다. 내일 하루 보잉747 여객기를 렌트하기 위해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렸다.
만약 내일 하루 내에 촬영을 마치지 못한다면 다시 또 그에 준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게 분명했다.
머리를 맞대봐야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그저 촬영이 순조롭게 풀리기를 기대하는 것뿐이었다.
* * *
다음 날 이른 시각, 이번 촬영에 참여하게 된 스태프들이 일제히 보잉747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기내의 분위기는 마냥 고요할 따름이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마른 기침 소리나, 저들끼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다들 긴장한 것 같지?”
송 이사의 물음에 재승이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그러게요. 분위기가 어느 정도 경직되어 있는 정도라면 환영이지만, 이 정도로 딱딱한 분위기라면 조금 걱정되네요.”
“다들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야. 일반적인 스튜디오랑은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보잉747 비행기는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륙했다.
창 너머로 보이던 건물들이 점점 작아지다 못해, 보이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을 무렵.
기내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직원의 안내에, ‘포토 존’으로 이동해 달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이었다.
촬영이 진행될 공간은 본래 자리하고 있어야 할 ‘좌석’들을 모두 뜯어낸 뒤, 4면을 모두 푹신푹신한 재질의 쿠션으로 마감 처리해둔 곳이었다.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장내를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던 찰나, 여행사 측 직원이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무중력 상태가 끝나는 시점에 순간적으로 중력이 2배로 작용할 거예요. 체중이 비슷한 사람이 목을 세게 조르는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고, 곳곳으로 튕겨 나가실 수도 있을 거예요. 물론 보시다시피 모든 면이 쿠션으로 되어 있어 부딪혀도 큰 탈은 없겠지만, 값비싼 장비와는 되도록 충돌하지 않도록 유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이 순간마저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추후 공개될 ‘쿠키영상’ 및 ‘트레일러 영상’ 촬영 팀이었다.
그들은 역동적인 그림을 위해, 모델들에게 나란히 서 있어줄 것을 주문했다.
중력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이 무너지며 허공에 떠오르는 찰나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스태프들의 간단한 촬영 준비가 끝나고 모델들이 포토 존 중앙에 일렬로 선 채 포즈를 취하자, 기내 곳곳에 비치된 스피커에서 다시금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환경 적응을 위한 ‘1차 하강’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의 안내방송이었다.
이내 재승을 비롯한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제자리에 서 있던 찰나. 보잉747 비행기가 굉음을 내보이며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와아…….”
재승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 탓에, 그리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비상식적인 감각 탓에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땅으로 잡아끌던 익숙하기 그지없는 느낌이 아예 사라졌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폐부는 마냥 간질거렸다.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채 서 있던 스태프들도, 자세를 잡은 채 일렬로 서 있던 모델들도. 모두들 하나같이 잔뜩 놀란 표정을 한 채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한 높이로 떠올랐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을 한 채, 발장구를 치는 것처럼 다리를 마구잡이로 움직여 대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일생 동안 느껴왔던 중력이란 이름의 제한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다들 그렇게 환희로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던 찰나, 새로운 감각에 의한 떨림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찰나.
가장 먼저 정신을 다잡은 포토그래퍼 한 명이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고 울린 명쾌한 셔터음, 번쩍하고 퍼진 플래시 불빛.
두 가지 현상을 토대로, 그제야 다들 정신을 다잡았다. 이색적인 룩북 촬영이 시작된 순간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순간 재승은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내딛던 순간 느꼈을, 선구자의 우월함과 비슷한 것이었다.
또 문 워크를 세상에 처음 선보이기 직전, 마이클 잭슨이 대기실에서 느꼈을 묘한 떨림과 비슷한 것이었다.
확신했다.
이건 ‘역사에 남을 퍼포먼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