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72)
블랙 라벨-171화(172/299)
블랙 라벨 171화
172. 은밀하게, 위대하게
비행기에 탑승하기 무섭게 보드카 몇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몇 시간 내내 잡념과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느니, 차라리 술기운에 잠식당한 채 곯아떨어지는 게 몇 배는 날 것 같다고 판단했다.
한 잔, 두 잔, 세 잔…….
빈속에 독한 술을 쏟아 부어서 그런 것인지 금세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술기운 탓일까? 감정이 더욱 극단적인 성질로 변모해 가고 있음이 면밀히 느껴졌다.
결국엔 저도 모르게 복받침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행여나 소리가 새어 나갈까 싶어 입을 꽉 막은 채, 또 이를 악문 채 최대한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기를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좌석 안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잠시 깊은 잠에 빠졌던 재승이 퉁퉁 부어오른 눈을 애써 크게 떴을 때, 비행기는 샤를 드골 공항으로의 착륙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 * *
재승이 프랑스에 도착한 뒤 첫 번째로 만나게 된 사람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을 칼 라거벨트가 아니었다.
피켓을 든 채 대기하고 있던 쟈넬 그룹 측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공항 앞에 대기 중이던 리무진 차량에 탑승했던 것이다.
“리(Lee), 반갑습니다.”
푹신한 시트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말끔한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한없이 정중한 투로 건네 온 인사였다.
비록 통성명은 없었다지만, 재승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TV·인터넷 뉴스, 칼럼, 잡지를 비롯한 온갖 미디어를 통해 몇 번이고 봤던 낯이 익은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쟈넬 그룹의 실소유자랄 수 있는 베르타이머 회장.
이내 그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었던 제 명함을 건네주었다.
순금재질의 명함 위로, 상아를 빻아 만들어낸 가루를 솔솔 뿌려내는 기법으로 마무리한 특별한 명함이었다.
“급하게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괜찮습니다. 칼의 소식을 들었더라면, 딱히 그룹 측 호출이 없었더라도 조기에 복귀했을 겁니다.”
“우선 칼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칼은 치사량 이상의 수면제를 복용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조기에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곧장 위세척까지 실시했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큰 고비는 넘겼지만 여전히 혼수상태입니다. 더군다나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시력 역시 말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실명상태나 다름없다고…….”
이내 재승이 “아…….” 하고 침음을 흘려보였다. 시력이 감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쟈넬 그룹 측에게조차, 아니, 칼과 친분이 두텁기로 소문이 자자한 베르타이머 회장에게조차 숨기고 있었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반면 베르타이머 회장은 단순히 칼의 시력이 실명 상태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 탓에 충격을 받은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사실 칼이 어떤 친구였는지를 돌이켜 본다면 무리도 아닙니다. 칼은 술만 마셨다 하면 죽음도 자신을 최고의 위치에서 끌어내리지 못할 거라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어요.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디렉터는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말도…….”
“네. 저 역시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몇 번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네요.”
“갑작스레 닥친 시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이번 자살기도 역시 감퇴하고 있는 시력과 연관성이 있을지 모를 노릇이고요. 진실은 당사자만이 알고 있겠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어쨌든” 하고 다시금 말문을 연 베르타이머 회장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몇 번 정도 정신이 돌아왔습니다만, 리의 이름을 몇 번 부르다가 병든 닭처럼 픽 고꾸라지기 일쑤더군요. 우선 파리 시내 병원의 VIP병실에 입원시켜 둔 상태입니다. 또 칼의 자살기도와 관련된 정보가 절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봉쇄시켜 뒀습니다. 병원 측 차트에도 칼 라거벨트라는 이름 대신 가명을 기입했고, 병실 앞은 듬직한 가드들이 지키고 있죠.”
한차례 “그렇군요” 하고 답해 보인 재승이 잠시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베르타이머 회장과 칼 라거벨트. 두 사람은 족히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간을 함께했으며, 쟈넬이란 이름의 네임밸류를 키워내는 데 일생을 바쳐 왔다.
하지만 역시 돈에서 파생된 관계이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가 철저한 기업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의식한 채 노력하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그조차도 이번 사건이 가져다 줄 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마냥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뭐랄까? 매스컴이 포장해 온 두 사람의 우정이 한없이 거무튀튀하게만 보일 따름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때 베르타이머 회장이 재차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설령 칼이 사경을 헤매다가, 다시는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여야 할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적어도 다음 시즌 준비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칼의 뒤를 이을 차기 디렉터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칼의 죽음이 알려져선 안 됩니다.”
말을 마친 베르타이머 회장이 날이 바짝 선 예리한 목소리로, “절대로요” 하고 덧붙여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리무진 차량이 파리 시내를 향해 나아가는 내내 재승은 침묵을 지켰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세포 자체가 자본주의와는 도통 어울릴 수 없는 것일까?
지금 펼쳐져 있는 상황이 모두 거북하다 못해 역겹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재승이 차창 너머만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찰나.
“리. 혹시 술을 드셨습니까? 알코올 냄새가 풀풀 풍기는군요.”
“예. 맨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거든요.”
“짧은 기간에 우정이 꽤나 깊어졌나봅니다.”
“슈퍼맨의 맨몸을 본 어린아이가 된 기분입니다. 그것도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는 맨몸을요.”
베르타이머 회장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보이자, 재승이 재차 덧붙여 말했다.
“칼은 어린 시절부터 제 영웅이었어요. 제가 디자이너라는 꿈을 갖게 되었던, 어리고 어렸던 시절부터요. 무리해서 쟈넬의 새 시즌에 합류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슈퍼맨을 동경했던 아이가 어른이 되었는데, 슈퍼맨이 찾아와서 함께 지구를 구해보자는 제안을 해온다면? 아마 누구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베르타이머 회장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재승이 다소 싸늘한 투로 쐐기를 박아 넣었다.
“그러니까 부디 돈이나 이권에 관련된 역겨운 소리는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제 앞에서만큼이라도요. 이번 일을 계기로 지나치게 막심한 환멸을 느끼고 있는 중이거든요.”
차량 안으로 마냥 무겁기만 한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베르타이머 회장이 마냥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엷게 떨리는 투로 답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한 명쯤은,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하고 걱정했거든요.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좀처럼 인간적일 수 없는 위치, 장소,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
“아마 칼은 제가 병실에서 제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주는 것보다, 쟈넬이 흔들리지 않도록 영리하게. 또 발 빠르게 움직여 주기를 더 바랄 겁니다. 제가 여태껏 겪어온 칼이라면 분명히 그럴 거예요.”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글쎄요? 제가 아는 칼은 오히려 자신의 영향으로 쟈넬이 무너지기를 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또한 일리 있는 추측이로군요. 제 변명이 완벽히 핑계처럼만 들리셨겠습니다.”
“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 * *
“제기랄…….”
VIP병실 안에 첫 발을 내디딘 재승이,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칼 라거벨트의 모습을 보기 무섭게 꺼내든 말이었다.
부족한 산소를 채워주기 위해 부착해 둔 호흡기에, 펑퍼짐한 병원복, 빼빼 마르고 주름진 몸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명성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디자이너라기엔 지나치게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재력과 명성, 패셔너블한 감각이 가려주고 있던 모든 치부가 훤히 드러나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역시 죽음의 신 앞에선 누구나 공평하다.
재승이 침대 옆에 놓인 의자 한 개를 꿰차고 앉자, 베르타이머 회장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의식을 되찾곤 합니다.”
“그렇군요.”
“상황이 너무 막막하군요.”
한차례 “쯧” 하고 혀를 차보인 베르타이머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칼은 모든 업무를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했어요. 저는 최종적인 보고만 받아왔죠. 꼬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는군요.”
쟈넬 그룹이 칼 라거벨트라는 디렉터를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그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답을 늘어놓았다.
“밀어붙인다면 시즌은 별다른 차질 없이 진행시킬 수 있을 겁니다. 제품 라인 업 준비는 거의 다 끝내둔 상황이었거든요. 칼의 디자인 역시 거의 완성된 상황이고요.”
“정말 다행이군요.”
“글쎄요? 제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말씀드린 칼의 디자인들이야말로, 사실상 시즌의 코어(Core)라고 볼 수 있는 디자인들이죠. 문제는 완성된 게 아니라, 거의 완성되었다는 겁니다.”
“칼이 초안 이상을 잡아둔 상태라면, 리께서 마무리를 해주는 형식으로 진행해도…….”
“칼이 원한다면 모를까, 확신할 수 없는 단계에서는 절대 그렇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칼은 이번 시즌이 자신의 마지막 시즌이 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덕분에 수정·보완 작업에 그토록 열을 올리고 있던 것이고요! 만약 그 디자인들을 그대로 출시한다면 칼을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고요!”
재승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베르타이머 회장이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병실 안으로 정적이 휘몰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타이머 회장이 병실을 떴다.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비서가 들어온 뒤, 귓가에 무어라 속삭임과 동시에 저녁 중에 다시 들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떠난 것이다.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칼의 앙상한 가슴팍이 미약하게 들썩였다. 재승은 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흐느꼈다.
문득 일전에 알렉산더 킹이 술자리에서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패션계는 신기루와 같다. 멀리서 보았던 아름다운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정글일 뿐이다. 모든 우정은 존속되지 않는다.
염세적인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다.
괘종시계가 저녁 아홉 시가 되었음을 알렸다. 댕. 댕. 댕. 댕…….
그때였다. 쇳소리와 흡사한 느낌의 병든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리.”
칼 라거벨트의 목소리였다. 이내 재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칼 라거벨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바짝 말라붙어 있던 칼의 입술이 미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 슬퍼하고 있는 거야? 내가 꼴사나운 모습으로 누워 있어서 그러는 거야……?”
“당신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어 버렸어요.”
“나는 괜찮아.”
“제가 괜찮지 않아요.”
이내 칼 라거벨트가 가쁜 숨을 몰아 쉬어가며, 느릿느릿하게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시력을 잃었어.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사실 전부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고, 실천에 옮겼어. 내 생명의 불씨는 꺼져가고 있어. 디자이너 칼 라거벨트의 끝이 다가온 거야…….”
“칼, 당신은 스스로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도 모르죠?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을 겁니다. 설령 죽더라도 그 누구도 모를 거예요. 그룹 측의 손해를 방지하기 위해, 시즌이 끝난 뒤에야 공표할 테니까요.”
“내가 알던 위대한 디자이너들은 다들 그렇게 죽어갔어. 그건 당연한 수순이고 행복한 죽음인 거야. 내가 존경했던 이들은 다들 그렇게 은밀하고, 위대하게 죽어갔다고…….”
한차례 씨익 웃음을 지어 보인 칼 라거벨트가, 힘겹게 손을 뻗어서는 재승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울지 마. 나를 위해서.”
뼈만 남은 슈퍼맨이 죽음을 앞둔 채, 도리어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가슴속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개를 푹 숙여, 흐르는 눈물을 감추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