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76)
블랙 라벨-175화(176/299)
블랙 라벨 175화
176.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비비앙 론다와, 톰 브라우니. 재승이 그들 두 사람을 완벽한 아군으로 만든 뒤, 호텔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은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재승은 호텔 앞에 정차해 있던 벤틀리 차량의 뒷좌석에 몸을 실은 뒤 다음 스케줄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칼이 VIP병실에 입원하게 된 이후로 쟈넬의 이번 시즌과 관련된 모든 결정권이, 자연스럽게 재승에게로 위임된 상태였다.
그 말인 즉, 가뜩이나 숨 쉴 틈조차 없이 바빴던 일상 위로 칼의 업무들까지 끼얹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
또렷한 눈으로 스케줄 표를 훑어보던 재승이 이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려 보이고 말았다.
스케줄 표는 지나치게 빽빽하게 매워져 있는 상태였다. 실속 있는 바이어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한 티 타임을 시작으로, 이번 시즌 쟈넬의 성공에 거액을 베팅한 대물 투자자들과의 만찬, 쟈넬하우스 내부 실무에 이르기까지…….
뭐랄까? 24시간이 짧다는 표현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헛웃음을 흘렸던 이유는 사뭇 간단했다. 문득 이 바쁜 스케줄이, 실은 슬픔에 잠식되어 주저앉거나 하지 말라는 신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때, 뒷좌석 암레스트 위에 올려두었던 재승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쟈넬 그룹의 실소유자 격인 ‘베르타이머 회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탓이었다.
-리(Lee), 이야기는 잘 풀렸습니까?
재승이 전화를 받기 무섭게 간단한 인사말조차 없이 대뜸 건네온 물음이었다.
한데 뭐랄까?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듯 느껴질 따름이었다.
엷게 떨리는 것 같은,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옅은 슬픔이 묻어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예. 비비앙 론다와, 톰 브라우니. 두 사람 모두 명확한 합류 의사를 밝혀주었습니다.”
-오, 아군을 만드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한차례 화색을 해 보인 베르타이머 회장이 “우선 칼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군요” 하고 말해 보인 뒤, 뒷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칼의 죽음은 극비에 부쳐질 예정이라지만, 조촐한 장례나마 치러줘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기쁜 소식이군요.”
-칼의 생가가 위치한 독일 함부르크에서 치르게 될 예정입니다. 가족을 비롯한 친인척 몇 명만 합류하여 최대한 작은 규모로, 은밀하게 진행될 테고요.
본래 칼의 별명은 ‘파리 쿠튀르의 이방인’이었다. 칼이 파리 쿠튀르를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 타 디자이너들과 달리, 독일 출신의 디자이너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칼이 조촐한 장례조차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만큼은 절대적으로 막아주고 싶다 생각했었으니 말이다.
잠시간 침묵이 오가기를 잠시.
-우선 잡혀 있던 스케줄은 모두 취소해뒀 습니다. 호텔로 돌아가셔서 오늘 하루라도 푹 쉬어두시는 게 좋겠군요.
“제 스케줄들을요……?”
-오늘 오전, 그룹 내부 회의를 통해 새롭게 내린 결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결정의 여파 탓에, 제가 직접 중요 인물들을 만나 봐야 하는 상황이고요.
“어떤 결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쟈넬의 이사회는 오랜 회의 끝에, 이번 ‘파리 패션위크’를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결정이었죠.
이내 베르타이머 회장이 ‘어째서 이번 파리 패션위크 출품을 포기하게 됐는가?’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는, 리(Lee). 즉, 자신을 위함이었다.
월 플라워와 쟈넬의 시즌을 동시에 출시하게 된다면, 업무상 혼선이 빚어질 수 없고 오롯이 집중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게 전부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그다음 두 번째 이유는 ‘명분’이었다.
-여태껏 파리 패션위크라는 루트를 통해 신상품을 공개한 횟수만 하더라도 족히 수십 번은 될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라지만, 칼은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쇼장에 모습을 드러냈었죠.
“네. 아무래도 얼굴 한 번 내비추지 않기에는 너무 규모가 큰 행사이니까요. 수개월간의 노력을 관객들의 표정으로 말미암아 미약하게나마 평가받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고요.”
-맞습니다. 이사회는 그 이유로 파리 패션위크 출품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품 공개는 쟈넬 그룹 소유의 크루즈 선상에서 하게 될 예정입니다.
말을 마친 베르타이머 회장이 “패션위크를 거치지 않고 신상품을 선보이는 것이야, 종종 있었던 일이니까요” 하고 덧붙여 말했다.
재승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작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쟈넬의 쇼 역시 퍼포먼스에 신경을 기울이기로 유명하지 않던가?
패션위크 쇼장을 개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인 것인지, 쟈넬은 이따금씩 패션위크 석상이 아닌 개인공간에서 신상품 라인업을 공개하곤 했었다.
물론, 그렇게 패션위크 행사장 바깥에서 공개된 쇼들은 퍼포먼스를 이유로 화제에 오르곤 했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퍼포먼스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겠군요.”
한차례 “바로 그겁니다. 여태껏 패션위크 바깥에서 선보였던 모든 쇼들이 그랬던 것처럼, 화려하고 또 화려해야겠죠.” 하고 답해 보인 베르타이머 회장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리의 지난 쇼들이, 퍼포먼스를 이유로 화제에 오르곤 했었기에 내릴 수 있었던 결정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태껏 리와 함께했던 VMD에 관하여 몇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리가 진행했던 모든 쇼들의 *DP(Display)와 퍼포먼스를, 딱 한 명의 VMD가 도맡아 처리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어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태껏 자신의 쇼를 꾸며주었던 것은, 남광민의 몫이지 않았던가?
잘하면 남광민에게 세계 최정상 브랜드 중 하나인 쟈넬의 쇼를 기획·구성해 볼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선물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마른침을 삼켜내 보인 재승이 능청스럽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네. 맞습니다. 아주 유능한 분이시죠. 좁디좁은 한국 패션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분이 도움을 주셨던 제 첫 번째 쇼 덕분이었으니까요.”
이윽고.
베르타이머 회장이 한없이 정중한 투로, 재승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말을 꺼내 들어 주었다.
-혹시 그분을 섭외할 수 있을까요?
* * *
[칼 라거벨트가 지휘하고, 리(Lee)가 보조하는 프리미엄 브랜드 쟈넬. 또 한 번의 특급 쇼를 꿈꾸는 것일까? 파리 패션위크 참가 취소 사실 공개.] [쟈넬 그룹 베르타이머 회장 曰 “파리 패션위크 참가 취소는 리의 쇼를 전담했던 VMD의 합류로 인한 결정. 패션위크가 치러지는 쇼장은, 우리의 쇼를 담아낼 수 없어…….”] [쟈넬의 비하인드 스토리? 칼 라거벨트의 은퇴 사실상 확정, 이번 시즌이 마지막일지도…….]모든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쟈넬 그룹과 베르타이머 회장은, 미리 짜둔 각본대로 온갖 지면 매체를 통해 이번 시즌에 관한 긍정적인 내용을 흘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가적으로 칼의 은퇴와 관련된 내용을 은밀하게 유포하기도 했다.
“후-”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제 집무실 탁상 위에 올려진 타임지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 있었던 베르타이머 회장의 개인 인터뷰 내용을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사락-
Q. 베르타이머 회장께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다. 칼 라거벨트의 은퇴와 관련된 소문이 항간에 떠돌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사실 여부를 검증해 줬으면 좋겠다.
A. 루머라고 말해주고 싶다. 칼이 은퇴를 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룹 측은 필사적으로 칼의 은퇴 시기를 연기하고자 노력 중이다. 칼은 아직 수년 이상 디자인을 총괄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며, 사실상 어느 정도 협의가 끝난 상황이다. 아직은 칼 라거벨트가 없는 쟈넬을 구축할 자신이 없다.
Q. 쟈넬은 여태껏 리(Lee)의 쇼를 기획·구상해 왔던 전담 VMD를 영입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그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 주자면?
A. 우선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화제가 되었던 ‘2013 알렉산더 킹’ 쇼 당시, ‘알렉산더 스트릿’이라는 주제의 플래시 몹을 구상했던 장본인이다. 스스로가 알려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어 인지도는 타 VMD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나, 능력은 이미 검증을 끝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이미 유명 프리미엄 브랜드의 쇼를 담당했고, 큰 성공을 구성했다. 예를 들자면 경쟁사인 ‘디옴’ 등…….
Q. 마지막 질문이다. 쟈넬의 이번 F/W시즌 공개 시기를 앞당긴 이유가, 사실상 리 때문이라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짤막하게 해명해 준다면?
A. 반은 사실이고, 반은 루머일 뿐이다. 그룹 차원에서 리의 일정을 배려해 준 것은 맞다. 리 역시 올해 처음으로 파리 패션위크에 출사표를 던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배려는, 우리가 파리 패션위크를 포기하고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쇼장을 무대로 삼기로 마음먹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뿐이다.
인터뷰 내용 전문을 훑어본 재승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하나같이 난감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을 텐데, 미꾸라지마냥 참 잘도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베르타이머 회장의 인터뷰들 중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단역 남광민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 또한 전부 사실이라지만, 뭔가 애매모호한 진실들을 엮어 만든 내용일 뿐이었다.
적어도 남광민이 알렉산더 킹이나, 크리스찬 디옴 등의 브랜드와 직접적으로 계약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재승이 다 읽은 타임지를 탁상 위에 가볍게 툭 던져놓던 찰나, 돌연 수화기가 울리기가 시작했다.
재승이 수화기를 집어 듦과 동시에, “네, 말씀하세요” 하고 답해 보이던 찰나.
-리, 차량 대기 완료했습니다. 슬슬 이동하시면, VMD님 입국 시간과 엇비슷하게 도착할 것 같습니다.
“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 * *
한편, 남광민은 영문조차 모른 채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른 상태였다.
시기가 절묘했다. 남광민이 비행기에 오를 무렵이 되어서야, 베르타이머 회장과 쟈넬 그룹 측 인터뷰들이 하나둘씩 공개되기 시작했었으니 말이다.
그저 어렴풋이 쟈넬의 전속 VMD가 쇼를 기획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게끔 해주려는 배려쯤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한 남광민이, 캐리어를 끈 채 바깥으로 나오기 무섭게 저 멀리 서 있던 재승이 한없이 반가운 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광민 씨, 여기예요!”
“아, 예. 사장님.”
이내 백인 운전수가 남광민의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었다. 잠깐 당황한 기색을 보인 남광민이었으나, 짐짓 덤덤한 척 재차 말문을 열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당연하죠. 일단 타시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남광민은 한화로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급 세단 차량에 오르기 무섭게, “와…….” 하고 탄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베이지색 톤으로 마감되어 있는 내부 인테리어, 널찍하기 그지없는 실내, 안락하기 그지없는 느낌의 시트에 이르기까지.
여태껏 타온 차량들과는 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남광민이 그렇게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차량 내부를 훑어보는 데 여념이 없던 찰나.
재승이 남광민을 지그시 바라보며 슬쩍 본론을 꺼내 들었다.
“광민 씨, 일단 기거할 호텔로 가기에 앞서 쟈넬의 쇼가 진행될 쇼장으로 이동할 거예요.”
“아, 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예상하고 계셨다고요? 정말로요?”
“네. 쟈넬의 전속 VMD가, 쟈넬의 쇼를 꾸미는 과정을 견학시켜 주시려고 부른 것 아닌가요?”
남광민이 건네온 물음에, 재승이 한차례 코웃음을 쳐 보이고는 답했다.
“아닌데요?”
“그럼……?”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광민 씨가 이번 시즌 쟈넬의 쇼를 총괄하게 된 VMD예요. 뭐, 어떻게 본다면 견학이라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르겠네요. 내일부터 일하게 될 실무공간을 견학하는 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