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78)
블랙 라벨-177화(178/299)
블랙 라벨 177화
178. 국화 한 송이
며칠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그렇게 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쟈넬의 F/W시즌 제품이 대중들에게 공개될 컬렉션의 날짜 역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예정된 컬렉션 날짜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쟈넬하우스 내부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고 있을 뿐이었다.
직원 전원이 전보다 훨씬 더 민감해졌다고 해야 할까?
직원들 간 다툼의 빈도가 잦아졌으며, 업무적 마찰 외의 사적인 대립도 빈번해졌다.
전 세계의 그 어느 브랜드든 쇼 당일이 근접한 시일이 되었을 무렵 종종 맞이하곤 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랄 수 있었다.
끼이이익-
이른 아침. 재승의 리무진 차량이 멈춰선 곳은 이번 쟈넬 2015 F/W시즌 컬렉션 장소로 선정된 리츠(Ritz) 호텔 앞이었다.
차량 뒷좌석에서 내려선 재승이, 한차례 제 옷맵시를 가다듬고는 천천히 호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재승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또각, 또각’ 하는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검정색 정장은 주름 한 줄 잡히지 않은 상태였고, 흰색 와이셔츠는 희다 못해 밝다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칼이 세상을 떠난 뒤.
재승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을 입었으며, 반들반들한 광이 서린 가죽 구두를 신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추모 중 가장 꾸준하고, 은밀한 추모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재승이 호텔 로비 층에 들어섰을 무렵, 다소 남루한 차림의 20대 청년이 재승에게 말을 건네 왔다.
“사장님, 오셨어요?”
다름 아닌, ‘남광민’이었다. 남광민은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몰골을 하고 있었다.
끼니를 매번 거르다시피 하며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인지, 볼살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반대로 광대뼈는 전보다 조금 더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뿐이던가?
아무렇게나 길게 자란 머리칼은 부스스하다 못해 지저분한 느낌이었고, 차려입고 있는 옷은 먼지와 땀 곰팡이가 슬어 영락없는 작업복처럼만 보일 뿐이었다.
이내 재승이 그런 남광민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고는, 나직이 물음을 건넸다.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아직…….”
“설마 밤새 계신 거예요?”
“네. 이제 준비 막바지 기간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한차례 말을 마친 남광민이, 멋쩍은 듯 제 뒤통수를 괜히 긁적여 가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다른 팀원들이랑 교대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잤어요.”
“괜히 무리한 요구를 잔뜩 한 건가 싶어 죄송스럽네요.”
이내 남광민이 손사래를 쳐 가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더 뿌듯한데요?”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나가는 거예요?”
“네.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정말 막바지 단계예요.”
사실 남광민을 비롯한 쟈넬 VMD팀의 업무는 이미 진즉 끝났어야 한다.
업무 완료가 지체되고 있는 이유? 실은 오롯이 자신 덕분이랄 수 있었다.
베르타이머 회장에게 승낙을 받는 뒤, 곧장 남광민을 불러내서는 이번 시즌 컬렉션의 ‘비밀스러운 주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은밀한 추모.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이 되리란 예상을 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우선 첫 번째로 쇼장 곳곳에 칼과 관련된 전시품과, 그의 업적을 우상화할 수 있는 여러 상징적인 물건들을 전시해 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다음 두 번째로 컬렉션이 진행되는 내내, 영국이 직접 제작해 준 칼 라거벨트의 추모곡을 재생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다음 마지막 요구사항은 ‘드레스 코드’(Dress Code)였다. 절대적 비밀이랄 수 있는 칼 라거벨트의 죽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전원 검정색 정장에 검정색 부토니에를 착용한 채로 쇼장에 방문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일궈온 작업들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으나 남광민은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도, 이렇다 할 불평·불만 한마디조차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저 “훨씬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되겠는데요?” 하고 답하며,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의지를 표출한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재승이 상념에 젖어든 채, 남광민의 뒤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겨대고 있던 찰나.
어느새 연회장 문 앞에 다다른 남광민이 문을 힘껏 열어젖히며 나직이 말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큼지막한 문이 ‘끼이익-’ 하고 기괴한 마찰음을 내보이며 활짝 열리던 찰나.
재승이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연회장 내부 전경 탓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재승이 멍한 얼굴로 장내 곳곳을 둘러보고 있던 찰나, 남광민이 꽤 성공적으로 숙제를 마친 초등학생처럼 기대감 서린 투로 평을 재촉했다.
“사장님, 어때요?”
이내 재승이 낮은 목소리로 “훌륭한데요……?” 하고 답해 보인 뒤, 다시금 연회장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남광민의 손길을 거친 덕인지 많은 변화를 겪은 듯 보였다.
일단 널찍한 연회장의 끝쪽에는 반원형의 계단이 들어서려는 듯, 목수들이 한창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데님 재질의 멜빵바지를 차려입은 중년 목수 열댓 명이, 저마다 입에 쇠못을 몇 개씩 문 채로 열심히 망치질을 해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은 앙상하게 뼈대만 세워진 모습이었으나, 완성 단계에 접어든다면 꽤 그럴싸한 그림이 나와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승이 시선이 반원형 계단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남광민이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반원형 계단이 이번 컬렉션 런웨이(Runway)무대의 시작점이에요. 계단 뒤쪽 공간이 백 스테이지와 곧장 이어지니까,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델들이 난간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음 양쪽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형식으로 워킹을 진행하는 형식이죠.”
“피날레 무대에도 요긴하게 쓰이겠는데요? 계단을 따라 길게 늘어서면, 족히 수십 명은 설 수 있을 것 같은데…….”
“역시 눈썰미가 있으시다니까요? 사장님 짐작이 맞아요. 피날레 무대는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구성해 뒀어요. 쟈넬의 최고 장점은 넉넉한 자본이잖아요? 무대 장치에도 돈을 아끼지 않은 채 설계해 둔 상태에요. 빵! 빵! 터질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올 겁니다. 유명 예술가들 조형물도 잔뜩 주문해 둔 상태고요. 천장에서 1.5m정도 떨어진 높이에 잔뜩 DP해 놓을 예정이에요.”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인 재승이 천장부의 전구를 바라본 뒤 재차 물음을 건넸다.
“전구도 바꾼 것 같은데요? 조금 더 누르스름한 빛이었던 것 같은데, 전부 백열등으로 바뀌었네요?”
전구가 바뀐 덕인지, 천장부에 일정한 간격에 맞춰 거치되어 있는 샹들리에가 전보다 훨씬 더 환하게 빛나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내 “맞아요!” 하고 답해 보인 남광민이, 신이 나서는 기획의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컬렉션 *DP(*Display)의 핵심 키워드가, ‘쟈넬 헤븐’이거든요.”
“쟈넬 헤븐이요?”
“네. 프리미엄 브랜드 쟈넬이 상상하는 ‘천국’을 표현하는 게 최종적인 목표예요. 우선 전반적인 인테리어 자체를 화이트 톤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 상태죠. 오늘 자정 전으로, 벽지도 흰색으로 변경할 예정이에요. 쇼 당일에는 바닥에 깔린 레드카펫도, 전부 흰색으로 교체할 계획이고요.”
재승이 한차례 “오…….”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이는 것으로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추자, 남광민이 제 손가락 3개를 펼쳐 보이고는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저희 팀이 이번 쇼를 구성하는 데 사용하고자 하는 색상은 오직 세 가지뿐이에요.”
“흠, 어떻게 구성하실 생각이신데요?”
“우선 첫 번째는 ‘흰색’이에요. 이번 쇼의 바탕색이 되어줄 색상이죠. 형광등 불빛의 색상, 벽지, 바닥 카펫, 기타 몇몇 소품 등…… 대부분을 흰색으로 처리해 버릴 생각이거든요.”
“그다음은요?”
“두 번째는 회색이에요. 음, 그런데 보편적인 회색이 아니라 ‘*실버 화이트(*Silver White)’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사실상 다른 두 가지 색을 부각시켜 주는 역할이죠.”
“마지막은 무슨 색인데요?”
“금색이에요. 인테리어에 활용할 목적은 아니고, 쇼장을 DP할 소품 중 몇 개를 금색으로 제작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끝을 흐려 보인 남광민이, 호텔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침 도착했네요.”
활짝 열린 연회장 문을 지나 들어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동상’ 몇 개였다.
우선 첫 번째 동상은 한눈에 보더라도, 아니. 누가 보더라도 프리미엄 브랜드 쟈넬의 창립자인 코코 쟈넬을 본떠서 만든 듯 보이는 동상이었다.
흑백사진으로만 기록되어 있는 그녀의 체형과 체구, 심지어 키마저도 완벽히 옮겨낸 듯 보일 따름이었다.
두 번째 동상은 쟈넬 역사상 가장 깊게 이름을 남긴 디렉터, 칼 라거벨트를 본떠서 만든 듯 보이는 동상이었다.
칼이 즐겨 신곤 하던 높은 부츠와, 긴 코트, 심지어는 칼 라거벨트를 대표하는 물건 중 하나인 선글라스를 씌워 둔 동상이었다.
그다음, 마지막 세 번째 동상은 족히 2M는 되어 보일 법한, 손 모양의 동상이었다.
한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포항 호미곶의 손 모양 동상 위로 도금을 해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재승이 입을 쩍 벌린 채 연회장 안으로 운반되고 있는 동상들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남광민이 엷게 떨리는 투로 이런저런 설명들을 덧붙여주었다.
“코코 쟈넬의 동상도, 또 칼 라거벨트의 동상도 비율을 완벽히 맞춰 제작했어요. 손 모양 동상은 쟈넬하우스 내부, ‘쟈넬의 전당’에 전시된 칼 라거벨트의 손 동상을 본떠서 크기를 키운 형태로 제작한 거고요.”
말을 마친 남광민이 팔짱을 낀 채, 저 멀리를 바라보며 재차 물음을 건넸다.
“이 정도면 은밀하면서도 꽤 훌륭한 추모가 되지 않을까요……?”
“네. 그럴 것 같네요.”
이내 남광민이 고개를 휙 돌려서는, 재승의 두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덧붙였다.
“DP가 완료되고 나면, 아예 다른 느낌일 겁니다. 오늘 보신 연회장의 전경은 아예 잊으셔도 좋아요.”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짙은 확신이 서린 목소리. 또 옅은 광기(狂氣)가 서려 있는 목소리. 저런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봤더라?
아! 친분이 있는 아티스트들에게서 몇 번씩 들어본 적이 있었다. 대중들이 천재라 칭송해 주는 몇몇 아티스트들로부터 말이다.
* * *
시간은 더욱 매섭게 흘러, 어느덧 쟈넬 컬렉션 쇼 당일이 되었다. 재승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쟈넬하우스 내부 집무실에서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떨려서? 아니다. 떨림은 아니었다.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규정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 탓이었다.
“컬렉션 끝나는 대로 귀국할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당연히 월 플라워에 전념할 거고요.”
-광민이는? 광민이도 같이 오는 거 맞지?
“당연하죠. 컬렉션 마치고 귀국할 무렵이면, 아마 스타 VMD가 되어 있겠는데요?”
-지금도 난리야. 국내에서는 VMD가 패션계에 존재하는 직업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비인기랄 수 있는 직종이잖아? 온갖 매체가 동양인 최초 쟈넬 VMD라고 포장해 주는데, 분위기가 난리도 아니라니까? 지금만 하더라도 강연 제의가 빗발친다, 빗발쳐.
송 이사의 너스레를 들은 재승이, 벽면에 거치 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고는 나직이 말했다.
“이사님, 일단 끊고 있다가 컬렉션 끝난 뒤에 다시 전화 올릴게요. 슬슬 이동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응? 아냐. 됐어. 결과야 1분도 안 지나서 기사로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뭐. 오늘은 푹 쉬고, 나머지 일정들도 다 잘 처리하고 내일 아침에나 전화 한 통 줘.
“알겠습니다. 다시 전화 올릴게요.”
짤막한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친 재승이, 한차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집무실 협탁 위에 놓인 수화기를 들어 올린 뒤 차량을 대기시켜 달라고 요청한 다음, 전신 거울을 바라보며 옷맵시를 다시 한번 다듬었다.
정해진 드레스 코드에 맞춰 흰색 와이셔츠에, 검정 타이를 매고, 검정 정장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검정색 조화를 부토니에 자리에 꽂아두었고, 가슴 포켓에는 흰색 국화꽃을 꽂아 둔 상태였다.
이내 재승이 국화꽃을 꺼내 들어서는, 집무실 협탁 위에 살포시 내려두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협탁 위에 놓인 액자 바로 앞에 내려두었다. 손 한 뼘 크기만 한 액자 속에는, 칼 라거벨트의 흑백 사진이 거치 되어 있었다.
그래, 고르고 골라 선정한 영정사진이었다.
“칼, 다녀올게요.”
말을 마친 재승이 한차례 묵념을 해 보이고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