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79)
블랙 라벨-178화(179/299)
블랙 라벨 178화
179. 쟈넬의 천국
이번 쟈넬 F/W 시즌 쇼는, 가히 소문난 잔치라 표현하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는 행사였다.
애초에 디렉터 라인업이 공개되던 시점부터 온·오프라인 상에서 큰 화제를 낳지 않았던가?
전설이라는 칭호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 노장 칼 라거벨트와, 파슨스가 배출한 천재적인 신예 디자이너 리(Lee)가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끼이익-
한 대에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급 세단 차량들을 시작으로, 이른바 슈퍼 카라 불리우곤 하는 날카로운 디자인의 차량들이 리츠(Ritz) 호텔 앞에 줄줄이 멈춰 서는 중이었다.
부드럽고 우아한 멈춰 선 차량의 운전석 내지는 뒷좌석에서 내려서고 있는 이들 모두가, 쟈넬 그룹 측에서 거액을 들여 제작한 ‘초대장’을 받은 이들이랄 수 있었다.
오늘 쇼를 관람할 자격을 얻은 귀빈들의 직업군은 말 그대로 가지각색이랄 수 있었다.
세계 패션의 흐름과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파트너 격인 유명 모델들. 일반적인 직장인들의 수십 년 치 연봉을 주급으로 받아가며, 열심히 뛰고 있는 스포츠 스타들.
할리우드를 움직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대 자본가 및 투자자들, 또 그들의 장기 말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윈 & 윈(Win & Win)을 거두고 있는 스타들.
디지털 싱글마저 손쉽게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수록시켜 버리곤 하는 유명 가수들과,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에 이르기까지…….
단연 대외적으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이들뿐 아니라, 백 스테이지(Back Stage)에 모습을 감춘 채 자신의 가치를 불려 나가고 있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평범해 보이는 중년의 백인들이야말로 핵심적인 손님이랄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보통 브랜드 매출에 날개를 달아줄 스페셜리스트 바이어거나, 말도 안 될 정도의 부를 축척해 둔 투자자들이거든요.”
재승이 2층 난간에 기대어 선 채 호텔 로비에 하나둘씩 발을 들이고 있는 귀빈들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때, 베르타이머 회장이 나직이 귀띔해 준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찰칵. 찰칵” 하고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있는 셔터 음을 뚫고, 나직이 물음을 건넸다.
“그나저나 의외로군요. 컬렉션이 시작되려면 아직 족히 몇 시간은 남은 시점인데…….”
“이들 모두가 쟈넬에게 초대받을 수 있을 정도의 자격을 갖춘 이들입니다. 패션계의 섭리를 꿰고 있는 영리한 이들인 셈이죠.”
“패션계의 섭리라…… 혹시 어떤 섭리를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맹수들의 연회에 늦장을 피우다가 지각을 해버린다면, 앙상하게 남은 뼈를 넋 놓고 구경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잔혹하고도 당연한 섭리 말입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첨언해 준 설명을 전해 들은 뒤에야, 그 말의 뜻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던 탓이었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컬렉션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큰돈이 걸려 있는 ‘도박판’이나 다름없다.
물론, 모든 도박이 으레 그렇듯 승리의 조건은 간단하기 그지없는 편에 속하고 말이다.
누가 더 빠릿빠릿하게 손익계산을 내린 뒤,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가?
만약 룩북을 통해, 혹은 모델워킹을 통해 이번 시즌 제품 속에 담긴 ‘머니코드(Money Code)’를 읽어내는데 성공했다면?
그때부터는 담력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 누가 더 과감한 계약 조건을 들이 밀 수 있느냐에 따라, 취할 수 있는 배당금이 순식간에 휙휙 바뀌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
“단연 바이어나, 거대 자본을 보유한 투자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명 셀럽들이 제아무리 현명하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한들, 쟈넬 컬렉션에서 타 귀빈들과 친목을 도모하는 것만큼 실용적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내 재승이 공감한다는 듯 제 고개를 몇 번 주억댔다.
애초에 지금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 모두가, 당장 펜을 들고 자서전을 써 내린다 해도 기본 부수 이상은 손쉽게 팔아치울 수 있을 만한 화려한 커리어를 갖춘 이들이지 않은가?
단순히 브랜드의 신제품 라인업이 공개되는 행사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손해와 이익이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잔뜩 맞물려 있다 못해, 얼기설기 엉켜 있는 수준이니 말이다.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재승이, 제 앞 머리칼을 위로 한 번 쓸어넘겨 보이고는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칼에게는 이 또한 일상적인 광경이었겠죠? 매 시즌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찾아와 줬을 테니…….”
“글쎄요? 근 이십 년간은 지극히 당연한 광경이었겠습니다만, 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글쎄요? 1974년 컬렉션 당시, 칼은 쇼를 마친 뒤 몇 시간 동안 내리 울어댔어요.”
“칼이 울었다고요……?”
“네. 제가 리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이 칼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쉬지 않고 욕을 뱉어대겠지만…….”
말을 이어나가던 베르타이머 회장이 한차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뒷말을 덧붙였다.
“리. 굳이 감정을 감추려 애쓸 필요가 없어요. 두려움은 지극히 당연한 감정입니다.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칼의 치부를 들춘 겁니다. 이젠 근대 패션계의 전설이 되어 버린 칼조차도, 언젠가는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의심하던 초심자였으니까요.”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큰 위안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만,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앞서는 것 같군요.”
한차례 “오호?” 하고 나직이 중얼대 보인 베르타이머 회장이, 제 턱을 살살 문질러 가며 재차 되물었다.
“어떤 기대감인지 들어 보고 싶군요.”
“이번 시즌은 쟈넬의 ‘난제’로 남게 될 겁니다.”
“난제? 난해하군요.”
베르타이머 회장이 재승에게 대답을 재촉하듯,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재승이 저 멀리 보이는 호텔 정문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무렵, 쇼가 끝나고 나면 쟈넬은 너무도 막중한 짐을 짊어지게 될 겁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에요. 오늘의 쇼는 당장 내일부터, ‘과거’라 불리게 될 겁니다.”
“예. 그렇죠.”
“그리고 그 과거를 넘어서지 못해 고군분투하게 될 겁니다. 십수 년간 브랜드의 감성을 다져온 핵심 인물의 자리가 공석이 됐어요. 족히 몇 년간은 그 어떤 전도유망하고 유능한 디렉터라 한들, 이번 시즌보다 나은 시즌을 기획해 낼 수 없을 겁니다. 저를 비롯한, ‘라거벨트 차일드’들이 대거 달라붙어 시즌을 기획한다고 하더라도요.”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재승의 말을 경청하던 베르타이머 회장이, 덤덤한 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오늘의 쇼만 잘 끝난다면, 칼이 만족할 만한 추모만 되어준다면…….”
“예?”
“비록 칼과 저의 관계가 돈에서 파생된 관계라고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니게 되어 버렸습니다. 시간과 정을 무섭다 말하는 이유겠지요.”
말을 마친 베르타이머 회장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재차 뒷말을 이었다.
“오랜 친구가 곁을 떠났습니다. 덕분에 정신이 번뜩 들더군요. 어쩌면 제게도 남은 날이 그닥 많지 않은 것 같다는…….”
“…….”
“이번 시즌 제품 판매를 끝으로 저 역시 인수인계에 돌입할 겁니다. 돈이라면 이미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미처 다 쓰지 못할 만큼 벌어뒀어요. 이제 더 이상의 욕심은 없습니다. 그룹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내려놓고, 사유지로 매입해 둔 섬으로 떠날 겁니다. 미뤘던 영화를 볼 겁니다. 1960년도쯤부터 한 편, 한 편씩 천천히 거슬러 올라와야 할 것 같군요. 부지런히 보지 않으면, 죽기 전에 꼭 보고자 했던 영화들 중 절반도 보지 못할 테니까요. 클래식한 느낌의 LP를 듣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며 지낼 겁니다.”
재승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자, 베르타이머 회장이 “종종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답해 보인 뒤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재승이 다시금 상념에 젖어들었다.
칼 라거벨트의 빈자리는, 너무도 많은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를 선사하고 있다.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해보인 재승이, 자신의 개인 대기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돌연 담배 한 개비가 간절해졌던 탓이었다.
* * *
쟈넬과 같은 대규모 프리미엄 브랜드의 쇼는, 족히 수백 명, 아니, 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공동으로 제작하는 것이 보편적이랄 수 있다.
하다못해 쇼장을 디스플레이하는 데에만 백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와…….”
연회장 안에 발을 들인 귀빈들이 하나같이 넋을 놓은 채, 감탄사를 연발해 대기 급급했다.
연회장 정중앙에 비치되어 있는 코코 쟈넬의 동상과, 칼 라거벨트의 동상, 또 전설적인 예술가의 손을 본떠 만든 동상을 제작한 설치미술가 ‘아렌’ 역시 마찬가지.
“제기랄, 진짜 끝내주잖아……?”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아렌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작품의 완성도에 잔뜩 집중했던 터라 작업 기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고된 작업이었으나,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편인 듯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견고한 작업물이 탄생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 연회장에 세워져 있는 동상은 뭐랄까? 공방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때보다, 족히 수십 배는 더 가치 있는 작품인 듯 보일 따름이었다.
아렌이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제 작업물을 유심히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던 찰나, 그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어시스턴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이런저런 평을 덧붙였다.
“클라이언트가 ‘쟈넬’이니만큼, 기대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예술품은 어울리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공방에 세워져 있던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여요…….”
이내 주름진 손으로 제 두 눈을 벅벅 문질러 보인 아렌이, 가장 어린 어시스턴트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자네, 지금 당장 뛰어가서 이번 쇼를 기획한 VMD를 만나고 싶다고 전해주겠나?”
이번 쇼를 기획한 VMD를 만나고 싶었다. 와인이라도 한 잔, 식사라도 한 끼 하며 예술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면 손을 꽉 부여잡은 채로, ‘자신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해주어 고맙다’고 감사인사라도 건네고 싶었다.
한차례 우렁찬 투로 “예, 알겠습니다-!” 하고 답해 보인 어린 어시스턴트가, 급한 걸음으로 곁을 떠나간 뒤. 아렌이 정신을 다잡기 위해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연회장 내부를 다시금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단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이었다. 벽면, 바닥, 심지어 카펫, 전구를 비롯한 온갖 조형물들에 이르기까지. 꽤나 심혈을 기울였음이 느껴지는 ‘백의 지대’였다.
뭐랄까?
흰색에서 느낄 수 있는 깔끔함을 넘어서, 성스럽고 거룩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고 하면 좋을까?
또 연회장 맨 끝 쪽에는 아치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계단은 물론이고, 난간마저 화이트 톤으로 채색되어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아렌은 저 계단이 이번 쇼의 런웨이 무대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다음엔 천장부를 살펴보았다. 샹들리에가 밝은 빛을 머금은 채 더욱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번 쇼를 기획한 VMD가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꿰뚫고 있는 사람이리라고 생각했다.
아렌이 반쯤 풀린 듯, 마냥 몽롱하기만한 눈으로 천장을 살펴보고 있던 그때.
“아……!”
돌연 탄식을 내뱉었다. 의식적으로 눈살을 살짝 찌푸리기 무섭게 쏟아지던 빛이 차단되며, 샹들리에 너머에 자리한 천장이 비로소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강렬한 불빛 뒤편의 천장 위로,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는 상태였다.
이내 아렌이 엷게 떨리는 투로 재차 중얼댔다.
“Heaven…….”
곁에 서 있던 어시스턴트 한 명이 “예?” 하고 되묻던 찰나, 그가 다시금 나직이 답했다.
“이번 쇼의 테마는, 쟈넬이 상상하는 천국의 모습이 확실해…….”
쇼장의 디스플레이만 보더라도, 시즌의 성패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고 믿는 그였다.
쟈넬의 쇼는 해마다 최고의 디스플레이와 퍼포먼스를 과시해 왔고, 올해는 그중에서도 역대급의 퀄리티를 자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쟈넬이 상상하는 천국의 모습은 어떤 느낌일까? 자연스레 쇼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더 상승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