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80)
블랙 라벨-179화(180/299)
블랙 라벨 179화
180. 쟈넬의 천국 (2)
연회장 내부 객석이 초대장을 받고 행차한 귀빈들에 의해 거의 다 채워졌을 무렵.
런웨이 무대 뒤편, 백 스테이지(Back Stage)는 마냥 분주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쇼가 임박한 시점이니만큼, 다들 최종점검을 해보는 데 여념이 없던 탓이었다.
백 스테이지에 첫 발을 내디딘 재승이, “큼, 흠…….” 하고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하는 것으로 기척을 내보였다.
이내 재승을 발견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 곧장 다급한 걸음으로 재승의 곁에 다가서서는 나긋한 투로 말을 건네 왔다.
“리(Lee), 오셨군요. 보시다시피 준비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어가는 중입니다.”
한차례 “그런가요?” 하고 되물어 보인 재승이 장내를 한 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글쎄? 컬렉션 시작 직전의 백 스테이지가 으레 그렇듯, 딱히 순조로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요. 제 얼굴 좀 봐요. 패밀리 사이즈 호두파이 같지 않아요? 아무래도 쉐이딩 분장을 조금 더 짙게 입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제기랄, 굽이 너무 높잖아요? 런웨이 무대 위에서 자빠지라는 거예요? 워킹 직전에 슈즈를 바꿔 버리면 어떻게 해요-?”
모델들은 서슬 퍼런 날이 바짝 선 듯 느껴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저마다의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고, 스태프들은 그들의 오더에 따라 마냥 분주하게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뭐랄까? 중요한 쇼가 코앞에 닥친 만큼, 다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듯 보일 따름이었다고 해야 할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중이었으나, 재승은 그저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제아무리 화려한 커리어로 무장한 프로페셔널한 모델이라 한들, 쟈넬의 쇼를 업신여길 수는 없다. 성공적인 워킹을 선보인다면, 몸값이 족히 배는 뛰어오를 테니 말이다.
운명과 앞날을 바꿔줄 ‘몇 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인 셈인데, 어찌 예민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잔뜩 곤두선 반응은 그저 긴장감을 표출하는 방법의 일환일 것이다.
재승이 마냥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장내를 두리번거려대고 있던 찰나, 그룹 측 중년 남성이 “음…….”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뒤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실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한편으로, 지휘자가 없어 곤욕을 겪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리,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 한 가지만 올려도 괜찮을지요?”
“물론입니다.”
“혹시 칼은 언제쯤 오시는 겁니까?”
재승이 무어라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얼버무려 대고 있던 찰나, 그가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대고는 제 입을 재승의 귓가에 바짝 붙인 채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요.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엔 조금 그렇지만, 이미 패션계 일각에, 칼 라거벨트와 쟈넬 그룹 사이에 큰 불화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거든요.”
이 또한 쟈넬 그룹 영업 팀에서 자발적으로 퍼트린 루머였다.
패션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일상이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곳이지 않던가?
그렇기에 이런저런 가십거리에 대한 반응이, 타 업계에 비해 상당히 후한 편이다.
그 점을 영리하다 못해,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활용해 낸 것이다.
이내 재승이 제 아랫입술을 슬쩍 핥아낸 뒤, 자연스러운 투로 말을 이었다.
“아, 예. 저도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확실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적어도 오늘 컬렉션 장에 나타나시지 않으리란 것뿐이군요.”
“하핫! 칼의 날카로운 찌르기로군요! 친분이 있는 기자들에게 들어본 바에 의하면, 이번 컬렉션에 찾은 기자들 중 태반이 컬렉션보다는 칼과 쟈넬 그룹 측의 관계를 더 궁금해하고 있다고 하던데…… 만약 칼이 정말 컬렉션이 끝날 때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면, 추측성 기사가 난무할 겁니다. 베르타이머 회장님께서도 심정이 말이 아니시겠군요.”
이내 재승이 한차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덤덤한 투로 뒷말을 이었다.
“어쨌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제가 마무리 조율 업무를 처리해야 할 것 같군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로군요. 마에스트로가 없어 곤욕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재승이 곧장 마무리 조율을 진행했다. 모델들의 워킹을 피드백(Peedback) 해주거나, 복장을 수정·점검해 주는 식의 간단한 업무였다.
조율 작업을 어느 정도 끝마친 뒤에는, 곧장 여전히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중인 여성 모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지척에 다다르기 무섭게, 곧장 그녀의 어깨 위에 자연스레 손을 얹으며 물었다.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
이내 의자에 앉아 있던 여성 모델, ‘애슐린’이 분장거울을 통해 제 등 뒤편에 선 재승을 힐끔 바라보며 답했다.
“아주 훌륭해.”
“다행이네.”
애슐린 역시 쟈넬 F/W 컬렉션의 모델 군단에 합류를 마친 상태였다.
물론, 여태껏 쭉 그래왔던 것처럼 재승은 애슐린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극악의 경쟁률을 과시하는 쟈넬 컬렉션 모델 오디션의 서류 전형에 합격한 뒤,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추가 오디션에서 모두 합격점을 얻어내는 것으로 당당히 런웨이 무대에 설 자격을 취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물론 크리스찬 디옴 등의 빛나는 커리어로 인해, ‘모델 애슐린’의 주가 역시 잔뜩 오른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리, 이번 컬렉션이 끝나고 나면 며칠간 내리 폭식을 하고야 말 거야. 정말 구역질이 날 때까지 음식을 쑤셔 넣을 거라고. 탄수화물과 지방이 너무 그리워.”
엷게 떨리는 투로 말해 보인 애슐린이 한차례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족히 몇 배는 더 해쓱해진 상태였다.
광대뼈는 더욱 불룩하게 튀어 나와 있었고, 그 밑으로 패인 음영은 전보다 훨씬 더 짙어진 듯 보일 따름이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살가죽이 어찌나 얇아진 것인지, 훤히 드러난 어깨와 등은 근질이 선명하게 엿보일 지경이었다.
이내 재승이 저도 모르게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프리미엄 브랜드, ‘크리스찬 디옴(Chrischan Diom)’의 오뜨 꾸뛰르를 준비하던 당시. 재승은 애슐린과 함께 지내며, 모델들의 치열한 삶을 제대로 엿보았던 바 있지 않은가?
대중들이 열광하는 섹시한 몸매는, 가히 살인적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노력과 절제가 수반되어야 만들어질 수 있다.
지금 애슐린이 자신의 몸으로 뽐내고 있는 유려한 곡선들 역시 마찬가지. 근질이 선명히 보이는 그녀의 매끈한 피부는 단순히 운동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식단과, 스케줄로 건강을 헤쳐가며 얻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인 셈이 아니던가?
이내 재승이 애슐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나직이 덧붙였다.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모든 걸 다 이룬 다음 은퇴할 거야. 작은 섬을 구입한 뒤에, 당신과 여유롭게 지내고 싶어. 매일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듣고, 맛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먹을 거야.”
“미니멀리즘한 인생을 원하는 거야? 작은 섬을 구입하는 부분에서 본질이 어그러지는 것 같은데?”
애슐린이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채 건넨 물음에, 재승이 고개를 내저어 보이고는 답했다.
“그런 게 아냐. 나는 그냥 당신과 함께 여유롭게 지내는 걸 원하는 것뿐이야.”
말을 마친 재승이 애슐린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심장 박동이 느슨해진다. 마음속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마치 입춘에 들어섰을 무렵, 따뜻한 햇볕 아래 놓인 잔설(殘雪)처럼…….
* * *
한편, 연회장 내부는 여전히 곳곳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고 있는 중이었다.
장내에 집결해 있는 유명 인사들의 이목을 잡아끌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던 탓이었다.
“쯧, 번잡하게시리 호텔에서 컬렉션을 진행하는군…….”
한차례 볼멘소리를 해 보인 노신사가, 대동한 경호원들과 함께 VVIP급 귀빈들을 위해 마련된 앞쪽 좌석을 꿰차고 앉았다.
노신사의 정체는 쟈넬 그룹의 경쟁사랄 수 있는, LVMH 그룹의 주인 격인 아르도 회장.
아르도 회장은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카메라 렌즈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러운 태도로 일행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데 집중할 따름이었다.
“아르도 회장이 쟈넬의 컬렉션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리(Lee)와의 친분 때문에 온 건가?”
“아마도 그렇겠지. 리가 아르도 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더니, 쟈넬 그룹 행사에까지 모습을 비추게 만들 정도일 줄은…….”
기자들, 평론가, 칼럼리스트들을 비롯한 인물들이 놀람을 금치 못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명료했다.
경쟁 브랜드의 컬렉션을 엿보는 것 역시 업무의 일환일지는 모르나, 여태껏 아르도 회장이 쟈넬 그룹의 행사석상에 직접 행차한 적은 없었던 탓이었다.
한편, 아르도 회장으로부터 그닥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던 흑인 남성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 채 말문을 열었다.
“제기랄, 돈 많은 노땅 한 명이 우리가 받았어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다 가져가 버렸잖아?
내놓는 모든 곡이, 아니. 심지어 디지털 싱글 앨범마저 빌보드 차트 위에 올려 버리고야 마는 유명 아티스트 ‘위즈덤 칼리파’였다.
아르도 회장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온갖 주목을 다 받고 있던 그였다.
아르도 회장이 쏟아지던 관심들을 단번에 앗아갔다는 사실이, 꽤나 불만스러웠던 듯 보일 따름이었다.
그런 그의 옆 자리에는 월 플라워에서 출시한 옷을 잘 매칭해서 차려입은 영국이 앉아 있었다.
“칼리파, 듣는 귀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목소리 좀 낮추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 건데? 그나저나 우리 곡은 언제쯤 나오는 거야?”
“재승이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쇼 중반쯤부터 재생될 거라고 했어요.”
“여태껏 이런 방식으로 신곡을 공개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잘난 디자이너 친구가 정말 고마워해야 할 거라고. 그나저나, 재승? 리를 부르는 애칭 같은 건가?”
“아뇨. 본명이에요. 리는 재승의 ‘성’일 뿐이거든요. ‘재승 리’가 본래 이름이고요.”
한차례 “그렇군.” 하고 나직이 답해 보인 위즈덤 칼리파가, 연신 “재승, 재승…….”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영국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연회장 안으로는, TV·인터넷에서나 볼 수 있던 각계 유명 인사들이 한가득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동경했던 풋볼스타와, NBA의 슈퍼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돌리면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기억하는 모델과 배우들이,
또 저 멀리에는 해마다 쟈넬 쇼에 초대받기로 유명한 국내 아티스트 ‘권지훈’이 앉아 있었고 말이다.
쟈넬이란 이름 탓에 먼 걸음을 한 이들도 있겠으나, 그중 몇몇은 자신의 친구. 디자이너 ‘리’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해 없는 시간을 내서 이곳 연회장을 찾은 이들일 것이다.
“후…….”
한차례 숨을 몰아 쉬어 보인 영국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 역시 이곳에 앉아 있다. 정식적인 초대를 받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비록 인지도적인 면에서도, 영향력 면에서도 한참은 떨어져 있다지만…….
함께 행복하고 싶은 친구의 발치 정도까지는 오는 데 성공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 피어오른 미소였다.
그때.
탁.
연회장 내부 불빛이 암전되었다.
또 그와 동시에 장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던 술렁임이 몸집을 줄였다.
조명의 암전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쇼의 시작이 코앞에 도래해 있다는 일련의 신호나 마찬가지였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