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87)
블랙 라벨-186화(187/299)
블랙 라벨 186화
187. For You (4)
분주하기 그지없는 손길로 봉투를 뜯어내던 재승이 서글픈 미소를 머금은 채 “고약한 양반 같으니…….” 하고 중얼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색이 옅어져가고 있던 슬픔이, ‘칼 라거벨트’란 이름을 듣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본래의 채도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이내 서재 문에 기대어 선 채, 묵묵히 재승을 지켜보고 있던 애슐린이 제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 보이고는 조심스레 물음을 건네 왔다.
“리, 혹시 칼의 유언장이야?”
유언장이라는 단어가 마냥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탓일까? 재승은 곧장 답을 건네지 못하고 잠시간 망설여야만 했다.
한차례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엷게 떨리는 투로 나직이 답했다.
“응. 그런 것 같아.”
“잠깐 비켜줄까?”
“그래줄래?”
“천천히 나와.”
“응, 고마워.”
한차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애슐린이, 재승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춰 보이고는 조용한 걸음으로 서재를 나서주었다.
서재 문이 아예 닫혀 버린 뒤. 재승이 다시금 떨리는 손길로 봉투 안에 담긴 내용물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음?”
봉투 내부를 확인해 본 결과, 어느 문구점에서든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흰색 편지지 몇 장만 달랑 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라지만, 뭐랄까? 봉투도, 편지지도, 유언을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평범한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손에 쥔 편지봉투와 편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기를 잠시.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문득 정말이지 칼 라거벨트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밀어닥친 죽음 앞에서도 마냥 초연한 모습만을 보이고자 노력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토록 사소하기 그지없는 부분 하나, 하나에 있어서도 많은 고심을 했을 게 분명했다.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재승이 이내 손에 쥔 편지지를 조심스레 펼쳐들었다.
사락-
To. 친애하는 리에게.
부끄럽지만 ‘어떤 말로 편지를 시작하면 좋을까?’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고민했었네. 사실 달랑 인사말만 적어봤다가, 구겨서 버린 편지지만 하더라도 족히 몇 장은 되거든.
예를 들면 “오랜만이군”부터, “그동안 잘 지냈나?”, “어때?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나?” 등등…….
고민이 길어져도 결론이 나오지를 않으니 정말 미쳐 버릴 노릇이더군.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아, 그래. 사랑에 푹 빠진 사춘기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지.
뭐, 그래서 결심했네.
비록 꽤나 쿨해 보이고 멋진 인사말을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은 편지 쓰기를 시작해 보기로 말이야. 이러다간 책상 앞에서 임종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러니까, 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고맙네.
지금 네가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뜻인 즉, 자네가 나와 했던 모든 약속들을 그대로 이행했다는 뜻일 거야. 실은 변호사에게 단단히 일러두었거든.
내 마지막 디자인들의 저작권을 가로채는 짓을 하거나, 되도 않는 처신 내지는 형편없는 컬렉션으로 내 이름을 욕되게 만들거나, 내 모든 게 담긴 브랜드 ‘쟈넬’이 평론가들 만찬의 메인 메뉴로 오르거나 한다면 이 편지 대신 온갖 저주와 욕설로 도배해 놓은 편지를 전해주라고 말이야.
이내 재승이 피식 웃음을 흘려보였다. 칼 라거벨트가 작성한 자필 편지를 읽고 있자니,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던 탓이었다.
웃음이 가셨을 무렵. 재승은 편지의 첫 장을 뒤로 넘긴 채, 다음 장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사락-
* * *
돌아보니 꽤 많은 시간이 지났더군. 내가 패션계의 부품 중 하나가 되어 살아 온 시간 말이야.
언제부터였더라? 그래. 대충 마켓에서 자유롭게 술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패션계의 부품으로 살아 숨쉬기 시작했었네.
다시 생각해 보면 꽤 엿 같은 일이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어린 칼 라거벨트를 만날 수만 있다면, “대체 뭐가 그렇게 급했던 거지?” 하고 묻고 싶을 지경이거든.
어쩌면 네게 마음이 쓰였던 이유도 비슷한 맥락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정글의 법칙을 모두 익히기를 강요당해야만 했어.
그런데 너는 어린 칼 라거벨트보다도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곳 패션계에 발을 들였고 말이야.
세상이 아무리 너를 칭송해 준다 한들, 또 네가 제아무리 대단한 디자이너라 한들…….
나는 사실 네가 마켓에서 네 아이디카드를 내밀고 술을 살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지, 불과 몇 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일 뿐이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거든.
그래도 나름 명문대로 쳐주는 패션스쿨들의 졸업장만 들고서, 환상에 잔뜩 젖은 채 몸을 던지게 될 또래 머저리들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물론 자네의 앞날을 걱정하진 않아. 곁에서 살펴 본 결과 자넨 이곳에서 살아남기에 충분할 정도의 재능과, 감각을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야.
만약 금방 거품이 사라지고, 몰락하게 된다면 내 묘비에 침을 뱉고 구둣발로 비벼도 괜찮네. 하지만, 자네가 실제로 이딴 짓을 했다간 천벌을 면치 못하리란 사실을 명심하게.
사락-
멋있는 사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밤잠을 줄여야만 했던 애송이 시절부터, 나는 내 앞에 놓인 일을 사력을 다해 처리해 왔어. 많은 이들이 내게 성공의 비결을 물어왔네. 특히 뻔하디뻔한 매거진 리포터 놈들 말이야. 자네도 이미 반쯤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너무 흔해서 뱉기도 민망할 지경이야.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네.
누군가는 평생을 일해도 시트의 촉감을 경험해 보지 못할 정도로 값비싼 슈퍼 카, 시즌에 눈이 맞은 모델을 태우고 함께 지중해를 누빌 수 있을만한 요트, 비시즌에 완벽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초호화 별장 등…….
내가 그 무엇을 누리더라도, 대중들이 “그래, 칼은 확실히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 왔네.
그렇게 살다 보니 많은 것들이 하나둘씩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어. 상상만 했던 일들이 모두 ‘현실’이란 이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어느새 일 년짜리 단기계약서에 서명을 적어 넣었던 이름 없는 디렉터는 쟈넬의 시그니처 디렉터로 거듭났지.
네가 보고 있는 내 삶이 그 결과야.
인생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 나는 이따금씩 신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젖어들었지. 아마 싸구려 머스탱 GT부터 바로 페차 시켰을 거야. 그다음엔 차고 증축공사를 진행했고, 차고를 넓힌 뒤에는 자리를 지킬 차량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였지. 여름휴가 시즌마다 요트를 구입했고, 기억에 남는 휴양지에 별장을 짓기 시작했을 거야. 칼 라거벨트 사전에 불가능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던, 혈기왕성한 시기의 일이야.
마음만 동한다면 세계적인 모델들과 어렵지 않게 잠자리를 가질 수도 있었고, 세계적인 신문사나 매거진의 메인커버가 되는 것도 간단한 일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모두가 부러워하는 내 삶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좀처럼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더군. 정말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어. 찰나의 순간 삶의 만족도가 바닥으로 고꾸라졌거든.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볼 법한 흔한 의문 때문이었지.
나는 정말 행복한 걸까?
아냐. 사실 행복하지 않았어. 매년마다 두 번, 세 번씩 강요되는 ‘커리어를 건 외줄타기’는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지. 마음이 약해질 때면 여태껏 쌓아올린 것들을 조금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억지로 도식을 그려왔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랬으면 안 됐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 그랬으면 안 됐어. 일에 몰두하며 잊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회피의 방식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늦은 밤마다 작업실 창문을 두드려대던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대담히 마주했어야 했어. 힘들더라도 그 두려움을 자세히 관찰하며 제대로 된 해결책을 모색했어야만 했어.
죽음이 눈앞을 아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무렵, 나는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깊은 절망과 도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네.
죽음이란 정말 놀랍도록 공평하더군.
여태껏 쌓아 올린 부와 명성이 한순간에 한낱 잡동사니와 다를 바가 없어지더군. 패션사에 영원히 기록될 세계적인 디자이너? 엿이나 먹으라고 해. 그룹 측 손실이 염려되어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는 신세잖아.
안 그래?
나 역시 평범한 노인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뿐이야. 다 늙어 버린 탓에, 곧 병실 문을 두드릴 죽음의 신을 초연한 척 기다리고 있는 평범한 노인들과 아예 다를 바가 없는 거라고.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후회가 일기 시작하더군. 조금 더 나를 위해 살았더라면 하는 후회 말이야.
리. 이건 디자이너로서가 아니라, 자네의 친구로서 전하는 조언일세.
부디 자네는 일이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말게. 대중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보다, 화려한 커리어에 흠집을 남기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바로 자네의 행복이지.
절대 내가 범했던 실수를 답습하지 않았으면 하네. 자네의 일생에서 ‘디자인’을 감한다더라도, 부디 많은 것이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말이야.
* * *
이내 재승이 다 읽은 편지지를 뒤로 넘기고, 마지막 장을 꺼내 들었다.
사락-
어쨌든, 리. 자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네. 자네 덕분에 절망과 좌절의 뱃가죽을 가르고 나와, 나름대로 초연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거든.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해 뒀으니, 내 변호사에게 연락을 한 뒤 승계절차를 밟도록 해. 내가 나고 자랐던 시골마을의 ‘생가’와, 내가 보유하고 있는 쟈넬의 주식 전부, 또 요트 한 대를 자네 몫으로 남기기로 결정했네.
물론 물질적 가치만 고려한다면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닐 거야. 값이 꽤 나가기야 하겠지만, 자네가 조금만 더 입지를 굳힌다면 그 보상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일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들이야말로 내 일생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야. 나고 자랐던 시골마을의 생가는 디자이너라는 꿈을 품은 채 보냈던 유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고, 쟈넬은 언젠가 자네에게 말했던 것처럼 유년기 이후의 모든 시절이 녹아들어 있는 장소니까 말이야.
생뚱맞게 요트는 뭐냐고? 크큭. 올 여름 휴가 때는 애슐린과 함께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끽했으면 하는 마음에 끼워 넣었네. 청혼하기에 알맞은 장소야. 언젠가 연인이 생긴다면 그곳에서 청혼하겠노라고 마음먹었었지.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자네는 불과 수년 안에 더욱 무거운 ‘왕관’을 쓰게 될 거야. 무게는 꽤 나가지만, 모두가 탐내며, 자네 역시 만족스러워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겠지. 자네는 나와 달리 현명하게 삶을 대했으면 좋겠군.
아! 그리고 내 뒤를 이어줄 적임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만큼은, 자네가 쟈넬 왕국을 맡아줬으면 좋겠군.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알지만, 무덤을 파헤치고 살아 돌아가는 수고로움은 겪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웬 얼간이가 쟈넬의 지휘권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당장에라도 무덤 밖으로 뛰쳐나가게 될 것만 같거든.
어쨌든, 고맙네.
정말로.
-죽음의 강 너머에서도 자네를 응원할, 칼 라거벨트가.
-추신, 타고난 악필인지라 알아보기가 힘들었겠지만, 아무쪼록 이해바라네.
사락-
편지를 끝까지 다 읽은 재승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여 대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 때문이냐고?
반은 그렇고, 반은 아니라고 하면 답이 될 것이다.
이내 재승이 제 휴대폰을 꺼내 들어서는 함께 전달된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이나 울렸을까?
수화기 너머에서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재승이 다짜고짜 물음을 건넸다.
“칼이 자필로 쓴 편지죠?”
-아, 예.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칼의 변호사가 한차례 한숨을 내쉬어 보인 뒤,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족히 수십, 수백 번은 고쳐 쓰셨을 겁니다. 리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칼이 죽음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셨을 무렵, 두 눈은 이미 실명 상태셨으니까요.
“정말이지 알아볼 수가 없더군요. 망할 영감탱이. 차라리 대필을 맡기지…….”
말끝을 흐려 보인 재승이 돌연 바닥에 주저앉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타고난 악필이라고? 웃기고 있네. 내가 당신의 유려하게 날려 쓴 필기체를 보며 감탄했던 게 몇 번인데.
제기랄, 제기랄.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는 듯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와중에 자신에게 보낼 편지를 수십 번, 수백 번 고쳐 쓰고 있었을 칼 라거벨트의 모습을 상상하니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했다.
쇼가 끝날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보지. 아니, 차라리 그럴싸한 계획이 완성 될 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버텨보지.
여태껏 패션계의 정상 인근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말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텨보지.
그랬더라면 몇 마디 달콤한 말이라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당신을 기필코 전설로 남겨주겠다고, 그리고 쟈넬의 이번 쇼는 기록적인 매출과 놀라울 정도의 찬사를 받고 있다고.
그러니까, 나만 믿고 푹 쉬라고. 나만 믿고, 나만 믿고…….
언제부터였더라? 아마 애지중지 기르던 반려견이 곁을 떠났던 어린 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그 무렵부터 나는 사람은 상실의 아픔 속에서 강해지고, 단단해진다고 생각해 왔다.
다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을 때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그렇게 배운 것은 잊지 않게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토록 많은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배움이라면 차라리 없었으면 한다.
비록 조금 미숙한 사람이 될지언정, 더 이상 소중한 무언가를 잃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