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9)
블랙 라벨-18화(19/299)
블랙 라벨 18화
19. 샘플입니다. 한 번 살펴보시겠어요?
보글보글-.
닭 뼈, 대파, 인삼 등. 갖은 재료들로 맛을 낸, 희뿌연 국물이 끓어오른다.
연신 끓어오르고 있는 국물 속으로,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 있다. 동대문의 명물(名物) 중 하나랄 수 있는, ‘닭 한 마리 칼국수’였다.
“야, 재승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어? 아, 아냐.”
아까 받았던 송 사장의 명함 탓인지, 자꾸만 이런저런 잡념이 물밀듯 밀려오는 듯했다.
‘…밥부터 먹자.’
이내 재승이 억지로 송 사장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고는, 국자를 집어 들어서는 냄비 속을 대충 휘휘 내저어대기 시작했다.
겨울철이면, 송 사장과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렀던 곳이다.
시원한 국물로 속을 달래가며, 소주를 한 잔씩 주고받다 보면 금세 몇 병을 비워내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 역시, 참 많은 추억들이 잠겨 있는 곳이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재승이, 이내 영국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얼른 먹자, 영국아. 여기 엄청 맛있어.”
“그럴 것같이 생겼다. 잘 먹을게.”
“그래. 오늘도 수고했다. 많이 먹어.”
* * *
집으로 돌아온 뒤. 재승이 다시금 ‘태양사’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
‘송인혁, 송인혁, 송인혁….’
그 반가운 이름을 몇 번 중얼대고는, 명함을 제 필통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송 사장을 찾아가고, 관계를 다지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단, 그때가 되면 정말 철저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스레 접근할 생각이었다.
견고하게 관계를 다져서, 그의 주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원하는 것은 없었다.
그가 힘들어할 때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
그게 전부였다. 전생에서의 자신이 시력과, 희망을 동시에 잃어가고 있던 때. 그가 자신에게 그래주었던 것처럼.
지이익-!
필통의 지퍼를 닫아 보인 재승이, 이내 책상 위에 놓인 캘린더를 한 번 바라보았다.
자정을 한 번 더 넘긴 터라, 이제 미팅 일자까지 남은 기한은 고작 5일뿐.
샘플 두 종류를 완성시키기에는, 꽤나 빠듯한 시간임이 분명했다.
이내 재승이 두어 번 고개를 내저어 보이고는, 작게 중얼댔다.
“하아… 한번 해보자.”
꽤나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이 전개될 예정이었다.
* * *
며칠이 더 흘러, ‘에프 트렌드 뷰(F Trend View)’ 매거진의 편집 팀과, 재승의 미팅일이 되었다.
“민 대리, 여기서 보기로 한 거 맞지?”
방금 막 차에서 내려선 권형목 팀장이, 의아하다는 듯 건넨 물음이었다.
“아, 네. 맞아요.”
미팅 장소는 일산 정발산역 인근에 자리한, ‘하우스텐(Huisten)’이란 이름의 카페였다.
이내 권형목 팀장이 곧장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 것인지, 카페 안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민 대리가 주문을 하는 사이, 권형목 팀장이 재승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흠? 저 사람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그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이내 권형목 팀장이,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서서는 나직이 물음을 건넸다.
“혹시 ‘월 플라워’의…?”
업계 종사자를, 단번에 찾아내는 것. 패션잡지사 편집부에서 오래 일하며 생긴 일종의 ‘능력’이나 마찬가지랄 수 있었다.
이내 재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권형목에게 악수를 청해 보였다.
“아, 네. 맞습니다. 이재승입니다.”
“아, 예. 일전에 메일 드렸던 FTV 편집부의 권형목 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우선 앉으시죠.”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 찰나의 순간, 권형목 팀장의 시선이 재승의 옷차림을 몇 번이고 훑었다.
‘흐음? 어두운 계열의 코팅 데님 원단으로 만든 재킷과, 바지인가…?’
이내 권형목 팀장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사담을 꺼내 들며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저희 담당자한테 고등학생이시란 이야기 듣고 정말 깜짝 놀랐었습니다.”
“아, 네.”
“패디(*패션디자인)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내지는, 업계 종사자일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재승이 짤막하게 답해 보이자, 권형목 팀장이 재차 나긋한 투로 답했다.
“리폼 실력도 그렇고, 칼럼의 내용이나 수준도 그렇고, 아무래도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힘든 수준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십니다.”
미팅 시작에 앞서 딱딱한 분위기를 풀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지만, 진심 역시 잔뜩 묻어나는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일단 일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나직이 물어 보인 권형목 팀장이, 곧장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민 대리한테 간단히 전해 들으신 대로, 재승 씨의 월 플라워 외에도 몇 곳을 섭외할 예정이에요. 의류 리폼을 주력으로 삼고 계신 무명 디자이너 몇 분을 섭외하려고 준비 단계에 있거든요.”
권형목 팀장의 설명이 구구절절하게 이어졌다. 만약 취재에 응해주기만 한다면, 자신의 이야기와 더불어 블로그의 주소를 수록시켜 줄 예정이니 나름의 홍보효과도 거둘 수 있으리란 말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권형목 팀장의 설명이, 계속 이어지려던 찰나.
“저, 팀장님.”
재승이 한차례 말을 끊어보이자, 권형목 팀장이 허리를 곧게 펴 보이며 나긋한 투로 답했다.
“아, 예. 말씀하시죠.”
말을 마친 그의 입가 위로,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짙은 여유가 묻어나는, 재승이 곧장 수락하겠단 뜻을 밝힐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는 듯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하나 다음 순간 재승의 입에서 튀어나온 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답이었다.
“다름 아니라, 조금 곤란할 것 같아서요.”
“…예?”
화들짝 놀라 되물어 보인 권형목 팀장뿐 아니라, 이제 막 자리에 합석하려던 민 대리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거절’이라는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있지 못했던 거다.
그만큼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니까. 이내 재승의 설명이 뒤따랐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입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계획하고 계신 특집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실은 오늘, 블로그에 이제 리폼 의류 판매를 중단하겠다는 공지를 게시하고 오는 참이거든요.”
재승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민 대리가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려는 것인 듯했다.
이내 권형목 팀장이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되물었다.
“혹시 블로그를 폐쇄하시려는 건가요?”
고등학생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중요한 건, 학업일 테니까.
더군다나 이제 고3에 오르는 시점이라면, 더욱 그럴 만했고 말이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이제 자체 제작 의류 판매에 돌입하려고요.”
“예?”
이내 재승이 자신이 입고 있던 데님 재질의 재킷을 벗어 건네주며, 재차 말을 덧붙였다.
“어제 막 완성시킨 첫 번째 상품의 ‘샘플본’입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바지도 마찬가진데, 이건 당장 벗어드리기가 조금 그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