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90)
블랙 라벨-189화(190/299)
블랙 라벨 189화
190. 집중과 선택의 시간 (3)
“수고하셨습니다-!”
토크 쇼 녹화는 마냥 화기애애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잘 마무리되었다.
녹화 내내 연신 떠들어댔던 탓일까? 한차례 “후우-” 하고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물 몇 모금을 들이켜며 곁에 앉은 영국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것은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제 관자놀이를 ‘꾹, 꾹’ 눌러대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하기야, 귀국하기 무섭게 촬영에 임해야 했으니 피곤에 잔뜩 절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당연하리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야, 영국아. 너 지금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겠어? 컨디션 안 좋으면 무리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아냐, 아냐. 괜찮아. 얼마 전에 한창 스케줄 밀려 있을 때는, 일주일 동안 거의 한숨도 못 자다시피 지냈었다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말을 마친 영국이 붉게 충혈된 제 두 눈을 벅벅 문질러가며,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재승아, 그나저나 너야말로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아까 통화 내용 언뜻 들어 보니까 뭔가 중요한 일이 생긴 것 같던데…….”
“아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냐. 컨디션 괜찮으면, 어디 조용한 곳 가서 간단하게 맥주라도 한잔하자. 자초지종은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
이내 영국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려 보이고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래. 그나저나 어디로 갈까?”
“흠, 그러게…….”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상념에 젖어들었다. 이젠 예전처럼 약속장소를 마음 가는 데로 쉽게 정해 버릴 수 없는 상황이랄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집 앞 편의점에 간단한 군것질 거리를 사러 나설 때조차 마스크는 기본이고 모자까지 푹 눌러 써야 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복에 겨운 고민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침묵만이 오가기를 잠시. 재승이 돌연 제 손가락을 튕겨, 명쾌한 소리를 내 보인 뒤 사뭇 들뜬 듯 보이는 어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청담동 쪽에 한두 번 가본 루프탑 형식의 바가 한 군데 있거든? 분위기도 좋고, 인적도 드물어서 꽤 괜찮을 것 같네. 비록 룸 형식까진 아니라고 해도, 나름 폐쇄된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재승아, 차라리 거기 어때? 예전에 네가 마련해 줘서 썼던 아파트 상가 지하 작업실 있잖아.”
영국의 말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재승의 입가 위로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야, 씨…… 완전 기발한 아이디어인데? 짜식,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냐?”
“괜찮아? 너만 괜찮으면, 거기서 맥주라도 가볍게 한잔하는 걸로 하자.”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해 보인 재승이, “슬슬 움직이자” 하고 말해 보였다.
조바심 탓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했다. 한시라도 빨리 가서,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파트 상가 지하에 위치한 음악 작업실.
재승이 본격적인 해외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출국하기 직전, 영국에게 선물해 주었던 장소이다.
또 영국이 악착같이 꿈을 키워 나가던 장소이다. 몇 평 남짓한 작업실은 텃밭이었고, 영국은 그곳에 심어진 씨앗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결실’이랄 수 있지 않겠는가? 과연 감상에 젖은 채 회포를 나눌 장소로 그곳, 지하작업실보다 적합한 곳이 있을까?
* * *
“어? 영국 씨는?”
방송국 지하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타기 무섭게,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운전석을 지키고 있던 송 이사가 건넨 첫 물음이었다.
“따로 이동하기로 했어요. 아파트 상가에 내려주시면, 귀가는 알아서 할게요.”
“그래? 마침 잘됐네. 그럼 가는 길에 일 이야기나 마저…….”
송 이사가 무어라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재승이 고개를 한 번 저어 보이고는 말을 끊었다.
“오늘 하루 푹 쉬라고 스케줄도 다 빼주신 거라면서요? 일 이야기도 내일로 미뤄두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건 그런데,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까…….”
“사안이 뭐 어때서요? 사실 잘 생각해 보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잖아요?”
잔뜩 격양된 투로, “아니, 이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대체 뭐가 중요한 일이야?” 하고 되물어 보인 송 이사가, 제 가슴팍을 두드려 가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럼 자기 생각이나 한 번 들어보자. 대체 어쩔 생각인 건데? 계획이라도 있을 거 아냐?”
“아직은 없어요. 천천히 생각해 봐야죠.”
“그래. 그러니까 어떻게 할지 대책을 강구하는 게, 무조건 백번 먼저라니까?”
“그럼, 이사님은요? 뾰족한 수라도 있으세요?”
“내 생각에는 우선 백화점 브랜드들이 원하는 조건부터 쭉 받아보고, 못 이기는 척 그나마 유리한 방향으로 조율하는 게…….”
“고개를 숙이자? 그건 절대 반대예요.”
“자기, 꼭 그렇게 비참한 표현까지 쓸 필요 있겠어? 그냥 서로 둥글게, 둥글게 타협점을 찾는 거지.”
“어쨌든 이렇게 고자세로 나온다면, 저희가 공들여 만든 옷 단 한 벌도 넣어줄 생각 추호도 없어요.”
재승이 한 치의 고민조차 없이 강경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답하자, 송 이사가 긴 한숨을 내쉬어 보이는 것으로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덤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장, 나도 비슷한 심정이야. 담합한 메이저 백화점 브랜드 놈들이 괘씸해서 죽을 것 같다니까? 마음 같아서는, 본사 순회하면서 똥물이라도 끼얹어주고 싶다니까?”
“흠, 이사님께서 정 그렇게 하시고 싶으신 거라면 제가 뒷일 일부를 함께 책임져 드리도록 할 테니…….”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국내 메이저 백화점 브랜드를 포기하겠다는 건, 국내 시장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잖아?”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조건이 안 맞는데 어떻게 해요? 포기할 건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이득을 취할 궁리를 해야죠. 그리고 국내 시장을 아예 포기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잘 운영되고 있는 월 플라워 오프라인 매장만 해도 몇 개인데…….”
한차례 “것, 참…….” 하고 중얼거려 댄 송 이사가, 제 머리칼을 잔뜩 헝클어 뜨려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자기도 이럴 때 가끔씩 보면 지나치게 감정적인 면이 있다니까? 그렇다고 국내 시장 전체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이번 일은 나한테 한 번만 맡겨주면 안 될까? 어떻게든 최선의 조건을 이끌어 볼 테니까…….”
이내 재승이 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러 보이고는, 한껏 무미건조한 투로 되물었다.
“아니, 이사님. 우리가 굳이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잖아요? 애초에 백화점이 국내 유통망의 전부가 아니라니까요? 옷만 괜찮으면, 살 사람들은 저희 오프라인 매장까지 발품 팔아서라도 사러 올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전 세계 각지에 백화점 브랜드가 수백, 수천 개가 있는데 저희가 그런 건방진 놈들한테까지 납품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좋아. 그렇다고 쳐 보자. 그럼 해외 백화점 브랜드 유통 루트는 어떻게 뚫을 건데? 일일이 뛰어다니기라도 할 거야? 아니면, 따로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차 안으로 정적이 내려앉기를 잠시. 한차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제 어깨를 한 번 들썩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있으니까 이렇게 천하태평이죠. 아무튼 걱정 마시고 오늘 하루는 푹 쉬세요. 백화점 브랜드 측 접촉 전화 오거나 하면, 더 이상 나눌 이야기 없는 것 같다고 못 박으시고요.”
“하, 그래.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야 하겠는데 걱정이 앞서네…….”
“없는 걱정까지 사서 걱정하시다 보면 제명까지 못 사신다니까요? 그렇게 공석이라도 생겨 봐요. 이사님 빈자리를 누가 대체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건강히 사셔야죠.”
이내 송 이사가 한차례 한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하고 말해 보인 뒤 키득키득 웃음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아직 근심이 아예 가신 것은 아닌지,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은 듯 보일 따름이었다.
반면, 재승은?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덤덤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재승 역시 마음이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국내 백화점 브랜드의 담합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다.
간만에 느껴보는 ‘분노’ 탓이었다. 입점계약 및 유통 자체는 고민할 거리도 아니라고 확신했다.
해외 메이저 백화점 브랜드 몇 군데는 전화 몇 통 만으로, 손쉽게 해결해 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뿐 아니라 자력으로 해결할 자신도 있었다. 자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냐고?
자못 간단하다.
파리 패션위크 현장에서 타 브랜드들과의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압도적인 쇼를 선사해 주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쇼가 끝나기 무섭게 전 세계 각지의 바이어들이, 피를 본 피라냐 떼처럼 달려들어서는 입점 계약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따내기 위해 온갖 우호적인 조건들을 내걸어 댈 테니 말이다.
재승이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입점계약이나, 유통망 형상 따위가 아닌 다른 탓이었다.
‘어떻게 한 방 먹여줘야, 잘 먹여줬다고 소문이 나려나…….’
재승이 원하는 것은, 효과적인 복수.
누가 갑(甲)의 위치에 있는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채, 자신들을 쥐락펴락하려 들었던 백화점 브랜드들을 어떻게 물 먹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만이 가득했다.
* * *
탁-
작업실 안에 먼저 발을 들인 영국이 스위치를 켜기 무섭게, 천장 등이 장내에 내려앉아 있던 어둠을 걷어내 주었다.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가며 설비한 곳이 아니던가?
비록 몇 평 되지 않는 자그마한 공간이었으나, 음악 작업에 필요한 시설은 전부 갖춰져 있는 곳이랄 수 있었다.
이내 뒤따라 들어온 재승이 “이야, 진짜 오랜만이네” 하고 말해 보인 뒤, 탁상 위를 손가락으로 한 번 쭉 쓸어보았다.
곳곳에 먼지가 내려앉아 있을 것이란 예상 탓에 보인 행동이었으나, 그런 재승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나저나 꽤 오래 비워두지 않았어? 생각한 것보다 엄청 깨끗한 것 같은데?”
“당연하지, 인마. 우리 어머니께서 매일은 아니어도 이따금씩 나오셔서 쓸고, 닦고 해주시거든.”
“엥? 왜?”
“그러게.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 우리 어머니한테도 의미 깊은 곳인가 봐.”
말을 마친 영국이 손에 쥔 비닐봉투 안에서, 캔 맥주 몇 캔을 연달아 꺼내며 한껏 진중한 투로 재승을 불렀다.
“재승아.”
“응?”
“정말 고맙다.”
이내 재승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사래를 쳐 가며 “뭐야? 갑자기 징그럽게” 하고 답했다.
그런 재승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영국이, 재차 덤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정말 고마워하셔. 그때 네가 만들어준 지갑 기억나?”
“아아, 응.”
월 플라워의 첫 번째 핸드백 제품 제작을 마친 뒤, 남은 자투리 원단을 이용하여 만들었던 램스킨 지갑을 일컫는 듯했다.
이내 영국이 맥주 캔 한 개를 따며 재차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니, 아직도 그 지갑 쓰신다. 영영 그 지갑만 쓰실 거라고 하시더라.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손수 만들어 준 지갑이라고.”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그러고 보니까 명절 때라도 한 번씩 찾아뵙고 했어야 하는데…….”
“됐어, 인마. 너 바쁜 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탁-!
허공에서 캔 맥주 두 개가 부딪히며, 가벼운 소리를 내보였다. 이내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맥주를 천천히 들이켜 대기 시작했다.
벌이에 비해 사뭇 소소한 술자리였다. 술이라고 해봐야 편의점에서 구입한 캔 맥주 몇 개가 전부였고, 안주라고 해봐야 과자 몇 봉지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니 주고받을 이야기가 너무도 많이 쌓여 있는 듯했다.
이젠 조금 더 가물가물해진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근황들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빈 캔이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두 사람의 얼굴 빛 역시 서서히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영국이 한차례 “끄억-” 하고 트림을 해 보인 뒤 조심스레 말문을 꺼내 들었다.
“재승아, 그나저나 아까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심각했던 거야?”
“별일 아니야. 그냥…….”
“그냥?”
“국내 백화점 브랜드 납품은 전부 포기해야 할 것 같네.”
“뭐? 그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야? 대체 어떻게 된 건데?”
재승의 설명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영국의 감정 역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이 끝맺어지자, 영국이 손에 쥐고 있던 빈 캔을 찌그러트려 보이고는 답했다.
“것 참, 갑질은 이쪽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네.”
“비슷비슷하겠지.”
“그나저나 괜찮은 거냐? 국내 시장을 아예 포기하게 되면…….”
“괜찮아.”
이내 재승이 다시금 자신이 세운 계획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반대로, 영국의 표정이 점점 더 밝아져만 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이야기가 얼추 끝맺어졌을 무렵. 영국이 “어……?” 하고 물어 보인 뒤, 재차 말을 꺼냈다.
“야, 잠깐만.”
“응?”
“내가 도와줄 방법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이내 재승이 숨죽인 채 그런 영국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빨리 말해보라고 닦달하는 것만 같은, 또렷한 눈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