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98)
블랙 라벨-197화(198/299)
블랙 라벨 197화
198. 양날의 검
파리 패션위크 관계자로부터 이번 컬렉션 일정을 전달받은 뒤, 마냥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재승도, 송 이사도, 남광민도. 그 누구 한 명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탓이었다.
톡, 톡, 톡.
일정한 박자에 맞춰 괜히 테이블을 두드려대고 있던 재승이 돌연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말문을 열었다.
“여기 앉아서 골몰한다고 마땅한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일어서는 게 어떨까요?”
한차례 “그래…….” 하고 답해 보인 송 이사가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애써 밝은 투로 답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술술 잘 풀려 왔잖아? 모르긴 모르더라도, 여태껏 이렇게 별다른 난관 없이 승승장구해 온 게 훨씬 더 기이한 상황일걸?”
온갖 악재가 겹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난감한 상황 탓일까? 다들 덤덤한 척하려 애쓰고 있었으나 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이내 세 사람이 나란히 호텔 로비에 위치한 카페를 나섰다.
* * *
재승과 남광민의 다음 행선지는, 파리 패션위크 당시 컬렉션을 선보이게 될 장소인 ‘튈르리 공원’이었다.
야외무대 설치 현장을 지켜보며 완공시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스케치해보기 위함이었다.
본래 목적은 그러했으나…….
마냥 심각한 표정으로 설치 과정을 지켜보는 데 집중하고 있는 남광민과 달리, 재승은 제 스마트폰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네, 리(Lee)입니다.”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매거진을 시작으로, 칼럼리스트, 디자이너, 유명 브랜드 하우스 소속 관계자들, 바이어 및 투자자, 심지어는 협업을 진행했던 바 있는 모델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이들이 약속이라고 한 것처럼 줄줄이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이유?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이번에 월 플라워가 겪게 된 크나큰 시련, 즉 ‘최악의 대진 운’을 위로해 주기 위해 전화를 걸어오고 있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한차례 “잘 지냈어? 나야” 하고 말해 보인 수화기 너머의 사내, ‘마크 제이콥’이 마냥 짓궂게 키득거려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이번 파리 월 플라워가 이번 파리 패션위크의 첫째 날, 첫 번째 순서로 컬렉션을 선보이게 되었다며?
“맞아요. 덕분에 평생에 걸쳐 받아야 할 위로를 오늘 하루에 몰아서 받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네요. 일정표가 공개된 지 몇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열여덟 번째 위로전화를 받는 중이거든요.”
재승이 심드렁한 투로 답해보이자, 마크 제이콥이 재차 웃음을 흘려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잠깐! 위로라니? 내가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위로의 말이나 몇 마디 건네려고 바쁜 시간 쪼개가며 전화한 줄 알아?
“네? 그럼요?”
-난 어디까지나 놀리려고 전화한 것뿐이라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대체 언제 리를 놀려볼 수 있겠어? 안 그래?
“제기랄, 이만 끊을게요.”
비록 마냥 신경질적인 투로 답해 보였다지만, 진심으로 기분이 상하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마크 제이콥의 본래 성격을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정말 오직 조롱만을 목적으로 전화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버럭버럭 소리를 내질러 댈 기운이 있는 거 보면, 그래도 완전 패닉 상태는 아닌 것 같군그래.
“그럼요, 당연하죠. 그냥 조금 막막할 뿐이라고요.”
-그래.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어. 오히려 데뷔 무대의 대진 운이 잘 따라주지 않은 덕에 나름 이목을 끌고 있는 상황이잖아?
이내 재승이 아무런 답 없이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렸다. 마크 제이콥의 말 그대로였다.
대진 운이 워낙 잘 따라주지 않은 덕에 패션 관련 웹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몇몇 웹진에 이번 파리 패션위크와 관련된 내용의 게시물이 게시될 때면 월 플라워의 이름이 꼭 한 번씩 거론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애매모호한 순서로 배정받는 것보다, 차라리 훨씬 나은 것 같아 보인다고.
“딱히 큰 위로가 되지는 않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이내 수화기 너머의 마크 제이콥이 장난기가 잔뜩 서려 있는 투로, 이죽거리듯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리, 내가 전에도 빌어먹을 파리 패션위크에 참가하지 말라고 말했었던 거 기억하지? 뉴욕 패션계에서 데뷔를 했으면, 친구들과 함께 뉴욕 패션계에서 활동하는 게 올바른 처사이지 않겠어? 이번 일은 ‘배신자’를 싫어하는 뉴욕 패션계의 신이 내린 저주라고 생각해. 크큭.
재승이 패션계 일각에 ‘리’(Lee)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던 계기는, 어디까지나 프리미엄 브랜드 알렉산더 킹의 시즌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던 덕이었다.
즉, 마크 제이콥의 말대로 뉴욕 패션계를 통해 디자이너로서의 데뷔를 마친 셈.
“사실 데뷔 무대만 뉴욕 패션계에서 치렀다 뿐이지, 공식적인 활동은 프랑스에서 훨씬 더 많이 치렀잖아요? 지난 ‘크리스찬 디옴’도 그렇고, ‘쟈넬’도 그렇고. 아무래도 프랑스에서의 입지가 더 굳건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요.”
-하긴, 그야 그렇지. 아쉬운 마음에 건넨 농담일 뿐이니까 마음에 담아두지는 말라고. 알다시피 LA크루 일원들은 리가 뉴욕 패션계에서 활동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파이가 커지기 위해서는, 업계 내에 자네처럼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들의 수가 더 많아져야 하니까 말이야.
말을 마친 마크 제이콥이 잠시 “흠…….”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뒤에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실은 전화한 이유 말인데, 다름 아니라 리와 리의 브랜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이 한 명 있어서 말이야.
“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요?”
-응. 세계 4대 패션위크는 매년 두세 번씩 꾸준히 진행되고 있잖아? 그 말인 즉 첫째 날, 첫 번째 순서로 컬렉션을 올리는 브랜드 역시 매년 열 몇 곳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말이야.
“네, 그렇죠. 그런데요?”
-비록 흔한 경우는 아니라지만 첫째 날, 첫 번째 순서로 컬렉션을 선보여야 했던 브랜드 중 꽤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브랜드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지.
잠시 숨을 걸러 보인 마크 제이콥이, 사뭇 심각하지 그지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프리랜서 VMD가 한 명 있어. 야외무대 디렉팅 분야에서 만큼은 스페셜리스트로 꼽히곤 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이례적인 경우’는 그의 손끝을 거친 경우가 많아.
“이례적인 경우요?”
-첫째 날, 첫 번째 순서로 컬렉션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고평가를 받았던 경우들 말이야. 이름은 ‘카이 그린(Kai Greene)’, 여기서 관건은 카이 역시 자네의 칼렉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이야.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카이 그린이라는 VMD가 저희의 이번 파리 패션위크 컬렉션 무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 맞죠?”
-그래.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야. 한두 시간 전쯤, 파리 패션위크 일정이 공개되기 무섭게 나한테 전화를 해서는 자네 연락처를 묻더군.
“알려 드렸나요?”
-아니, 아직. 어찌 되든 자네 동의를 구하는 게 우선이니까. 그냥 간단한 컨설팅 느낌의 대화라도 가볍게 나눠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때?
“저야 무조건 찬성이죠. 뉴욕 패션위크 막바지 준비 탓에 바쁘실 텐데, 신경 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리, 다시 말하지만 내가 신경 써줘서가 아니야. 애초에 그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거였거든. 그런데 자네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꽤 재미있어. 사실 나는 자네가 쌓아 둔 커리어나, 지난 작업물 덕에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넘겨짚고 있었거든.
“그런데요?”
-월 플라워라는 브랜드의 변천사도 꽤 흥미로웠지만, 협업을 거쳐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월 플라워 소속 VMD 때문이라더군.
이내 재승이 “예……?” 하고 되물어 보인 뒤, 고개를 슬쩍 돌려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남광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남광민은 여전히 이번에 월 플라워가 컬렉션을 올리게 될, 튈르리 공원 야외 무대 설치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재승이 멍하니 남광민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수화기 너머의 마크 제이콥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자네 메일에 카이의 포트폴리오와 연락처를 남겨두도록 하겠네. 이만 끊고 컬렉션 당일에 보자고.
“컬렉션 당일에요? 괜찮으시겠어요?”
마크의 브랜드, ‘마크 제이콥’이 참가하게 될 뉴욕 패션위크 역시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시점이기에 건넨 물음이었다.
지금 마크가 어찌나 바쁜 일상을 영위하며 지내고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이내 마크 제이콥이 나직이 답했다.
-자네와의 친분 때문만이 아니야. 리(Lee)는 이미 메인스트림 마켓을 지휘하다시피 하고 있는 유능한 디자이너고, 월 플라워는 가장 촉망받는 신흥 브랜드잖아? 그런 디자이너와 브랜드의 컬렉션인데,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직접 관람하는 게 진정한 직업정신이지 않겠어?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래도 너무 과한 칭찬인 것 같은데요?”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 어쨌든 알렉산더와 함께 가게 될 것 같으니까, 로열석 두 티켓 두 장 킵해두는 것 잊지 말고. 이만 끊을게.
“네. 고마워요, 마크.”
통화를 마친 재승이 남광민에게 다가서며, “혹시 ‘카이 그린’이라는 VMD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세요?” 하고 물음을 건네던 찰나.
남광민이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잘 모르겠어요. 몇 번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기분 탓인 것 같기도 하고…….”
“아녜요. 아무래도 VMD가 명성을 얻는 경우는 흔치 않잖아요?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그런데 그분은 왜요?”
남광민이 호기심이 잔뜩 서린 눈으로 재승을 들여다보고 있던 찰나, 재승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잘하면 그 사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어줄지도 모르겠어서요.”
* * *
“리(Lee), 반갑습니다. 카이 그린입니다. 그냥 편하게 ‘카이’라고 불러주시면 될 것 같군요.”
말을 마친 정장 차림의 흑인 사내, ‘카이’가 이가 훤히 드러나게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악수를 청해왔다.
이내 재승이 카이 그린의 손을 꽉 맞잡으며 답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카이 그린은 뭐랄까? 재승의 상상 속 이미지와는 아예 상반된 느낌을 띠고 있는 사람이었다.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안타까워 보일 지경으로 깡마른 몸을 하고 있었다.
차려입고 있는 정장 역시 한 치수쯤 커 보이는지라 초라한 느낌을 배가시켜 주고 있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뉴욕에서 지내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아아, 연락받고 날아왔으면 못해도 열 시간은 더 걸렸겠죠. 며칠 전쯤 파리에 와 있었습니다. 이번 파리 패션위크 관람 목적으로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카이 그린이 고개를 한 번 두리번거려 보이고는 나직이 되물었다.
“그나저나 쟈넬의 이번 시즌을 디스플레이 했던 VMD 분은 오늘 뵐 수 없는 건가요?”
“곧 도착할 겁니다. 아직 업무가 끝나지 않아서요. 그러고 보니, 저희 쪽 VMD에게 관심이 있으시다고…….”
“예. 뭐, 이성적 호감을 느끼고 있거나 한 건 아니니 딱히 괘념치 않으셔도 될 겁니다.”
천연덕스러운 투로 말해 보인 카이 그린이 들고 온 서류 가방을 집어 들며 재차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너무 걱정하시지는 않으셔도 될 겁니다. 첫째 날, 첫 번째 순서는 양날의 검이거든요. 브랜드의 ‘무덤’이 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선구자’의 인상을 강렬히 심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으레 건네는 말이 아닙니다. 첫째 날, 첫 번째 순서에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둔다면 뒷순서에 있는 모든 브랜드를 무덤에 묻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면…….”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카이 그린이 제 무테안경을 가볍게 치켜 올려 보이고는 덧붙였다.
“여러 가지 부분을 고려해 보았을 때, 리의 브랜드 ‘월 플라워’는 충분히 후 순서에 있는 모든 브랜드를 묻어 버릴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확신 가득한 투로 말을 마친 카이 그린이 한차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승은 멍한 얼굴로 그런 카이 그린의 두 눈을 들여다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형광등 빛을 잔뜩 머금은 채 밝게 빛나고 있는 무테안경 너머에 자리한, 카이 그린의 두 눈이 확신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