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
블랙 라벨-1화(2/299)
블랙 라벨 1화
2. Rewind (2)
그러고 보면 정말 악착같이도 살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동대문 의류타운 내에 자리한 소점포에 취직했다.
대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루 14시간을 일했다. 월급이라고 해봐야 고작 백만 원 언저리였지만, 같은 의류 계통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었다.
잠잘 시간을 쪼개가며 재봉틀을 만지고, 디자인 공부를 했다.
월급을 받으면 일부는 집에 보내고, 남는 금액으로는 패션잡지와 책을 샀다.
사장도 좋은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재승에게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었으니 말이다.
사장은 종종 재승에게, 매장 구석에 직접 만든 옷들을 DP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곤 했다.
심지어 직접 만든 옷을 팔아 번 돈은, 오롯이 재승의 몫으로 챙겨주기까지 했다.
돈도 돈이라지만, 자신이 직접 만드는 옷을 손님이 사갈 때의 희열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것임이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시절은 정말 힘들었던 시간임이 분명했다. 정말 힘들었다. 정말 힘들었는데, 이상하리만큼 행복했던 것 같다.
조금은 막연하게 생각했던 덕분인 듯했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만의 브랜드도 런칭하고, 쇼를 열고, 멋진 모델들의 런웨이가 끝난 뒤에는, 자신이 직접 스테이지 위에 올라가서 감사인사를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째깍– 째깍-
널찍한 작업실 안으로 초침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있기를 잠시.
“끄으-.”
작업실 다락에서 곯아떨어졌던 재승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고, 속은 누군가가 꽉 쥐어짜 대고 있는 것처럼 쓰라렸다.
재승은 눈을 최대한 가늘게 뜬 채, 벽면에 거치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째려보듯 보지 않으면, 시간을 확인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AM 5 : 20
다시 잠들기도, 그렇다고 잠기운을 떨쳐내고 일어나기에도 애매모호한 시간이었다.
재승은 기다시피 이동해서, 간이냉장고를 열고 생수 한 병을 꺼내 들었다.
재승은 곧장 물을 들이켰다. 식도 끝에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들어갔다.
“하아-.”
찬물로 갈증을 떨쳐내고 나니, 취기가 조금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곁을 살펴보니, 송 사장이 그렁그렁 코를 골아대며 잠들어 있었다. 냉장고 불빛이 비추고 있는 송 사장의 얼굴이 괜히 측은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송 사장도, 처음 보았던 때보다 한참은 늙었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송 사장의 허리께에 널브러져 있던 담요를 가슴팍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장사치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큰돈을 벌지는 못할 사람임이 틀림없다.
잔정이 너무 많다. 어제 술자리에서, 자신에게 건넸던 제안만 놓고 보더라도 그랬다.
* * *
“재승 씨.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자금 댈 테니까, 샘플 한번 만들어봐.”
“무슨 샘플이요?”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디자인 북 끄적였던 거 다 알아. 그거 만들어보자고.”
송 사장이 말하는 ‘디자인 북’은 재승의 손때 탄 노트를 일컫는 것이었다.
“거기 있는 디자인들의 샘플본을 만들어달라고요? 그걸 왜요?”
“재승 씨도 알다시피, 동대문 생산 라인 쪽은 내가 꽉 쥐고 있잖아. 아는 업주들 만나보면서 샘플 보여주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해볼 테니까… 한번 해보기라도 하자고.”
“유작(遺作)이라도 몇 점 남겨보자는 겁니까?”
“하여튼, 사람이 삐뚤어졌다니까….”
말끝을 흐려 보인 송 사장이, 이내 죄책감이 잔뜩 서려 있는 눈을 한 채 재승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후회하고 있었다.
재승에게 이미테이션 제조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넸던 것을. 악착같이 살던 자신을 음지로 끌어들인 것을. 철저히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비록 재승 씨 본래 꿈을 이뤄줄 순 없지만, 지금까지 그린 디자인들을 세상에 꺼내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 해줄 수 있다고. 동대문에서 먹은 짬밥이 있지….”
“그래서 옷 나온 다음은요?”
“동대문 의류 타운 소점포에 쫙 납품하고, DP시켜야지. 비록 짝퉁처럼 큰돈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잖아. 안 그래?”
송 사장의 물음을 끝으로, 장내에 다시금 정적이 휘몰아쳤다. 재승은 잠시 상념에 젖어들었다.
자신이 시력을 잃기 전에, 직접 디자인했던 옷들이 DP되어 있는 광경을 보는 것. 분명 꽤나 의미 있는 일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옷이, 옷가게에 DP되는 것. 손님들이 그 옷에 관심을 보이고, 끝내 구입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최종 목표일 수도 있는 일이다.
또, 동대문에는 ‘두타즈’와, ‘밀레니엄’을 비롯한 꽤나 이름 난 의류 타운들이 많다.
송 사장과 재승에게는 집 앞마당 같은 느낌이라지만, 누군가에게는 꿈의 장소일 수도 있는 곳이다. 매력적인 제안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됐어요.”
“뭐? 왜?”
재승은 단칼에 송 사장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만약 자신의 디자인 샘플을 받아본 생산라인 업자들이, 제작을 거절한다면? 그래서 제작단계에 착수하지 못한다면?
이미 발생한 적지 않은 지출을, 모두 송 사장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어쭙잖은 죄책감 때문에 짊어지기엔, 너무 큰 리스크다.
“사장님.”
“응?”
“죄책감 느끼실 거 없어요.”
“뭐? 그게 무슨….”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제 탓이에요.”
한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답해 보인 재승이, 소주 몇 모금을 더 들이켜고는 재차 쐐기를 박았다.
“사장님 탓이 아니라.”
* * *
곤히 잠든 송 사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재승이,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잡념들을 떨쳐 버리겠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자신의 작업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력이 감퇴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앞이 잘 보이질 않아, 엉금엉금, 느린 속도로 곳곳에 손을 짚어가며 천천히 이동했다.
“하아-.”
거친 숨을 토해내고,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새벽 중, 송 사장에게 말했던 그대로다.
송 사장의 탓이 아니다. 그가 자신에게 이미테이션 제작을 권유했던 것은 사실이나, 선택은 재승 본인이 했다.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도 몇 번이고 있었다. 하나, 빠져나오지 않은 것은 자신이다. 돈의 맛과 향에 취해 버려, 돌아올 생각을 않았던 것이다.
다시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사실을 깨달은 뒤에야. 또, 옷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야 후회하기 시작했다.
몽롱한 눈으로 자신이 뱉어낸 희뿌연 연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문득 이런저런 망상들이 연거푸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이 바닥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이내 재승이 고개를 휘휘 내저어 보이고는, 작업대 위편에 설치된 백열전구를 켰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제 이렇게 이마에 닿을락 말락 한 위치에 전구를 달아놓지 않으면,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원단조차 제대로 식별할 수가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탓이었다.
‘…일이나 하자.’
속으로 조용히 뇌까려 보인 재승이, 재봉틀 페달 위에 제 발을 얹었다.
지이이이이잉-!
일단은 만들어야 한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두 눈이 죽어버리기 전까지 살아 있으려면. 그게 짝퉁이 됐건, 거적때기가 됐건. 그냥, 뭐라도 만들어야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 사장이 그렁그렁 코를 곯아대는 소리와 재봉틀이 내뿜어대는 굉음이 허공에서 뒤섞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조화로운 소음이었다. 재승은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재승의 두 눈 위로, 청아한 이채가 서렸다.
* * *
재봉틀이 쏟아내는 굉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어 있던 송 사장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햇볕이 작업실 한쪽 벽면에 난 작은 창을 투과하여 들어오기 시작할 때쯤. 송 사장이 침음을 흘려댐과 동시에 눈을 떴다.
“끄으-.”
송 사장은 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인근 백반 집에 전화를 걸어 제육백반 이인 분을 주문했다.
그가 연거푸 담배 몇 개비를 필터 부분까지 태웠을 무렵, 주문한 제육백반이 도착했다.
“재승 씨. 먹고 하자.”
속도 좋은 사람이다. 전날 새벽, 적지 않은 폭언과 막말 세례를 받고도 다락을 차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밥까지 먹고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니 속이 좋은 사람이라는데 있어서만큼은 이견이 없으리라.
“사장님.”
“응?”
“죄송해요.”
“뭐가?”
“어제 막말했던 거….”
“됐어. 미안하면 와서 포장이나 좀 같이 뜯어.”
물기가 맺혀 있는 쌈 야채 몇 종, 먹음직스럽게 잘 조리해 낸 제육볶음. 스티로폼 용기에 담겨 있는 공깃밥.
상차림이 얼추 끝나자,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수저를 집어 들었다.
“사장님. 다 드시고 나면 가세요. 나 일해야 돼.”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었어. 나도 바쁜 사람이거든?”
이내 송 사장이 재승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사뭇 덤덤한 투로 물었다.
“재승 씨. 그런데 눈은 언제부터 그랬어?”
“몰라요. 꽤 됐어요.”
“백내장 비슷한 건가?”
송 사장의 굴곡 없는 어투에서, 애써 무던한 척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동정과 연민을 내비추지 않으려는, 기특하기 그지없는 노력이. 재승 역시 그런 송 사장의 노고를 고려하여, 최대한 무덤덤한 어투로 답해주었다.
“당뇨 합병증이래요.”
“당뇨?”
“우리 아버지 당뇨 환자였잖아요. 물려받을 유산은 없었는데, 병은 있었나 보죠.”
“그래?”
정적.
이내 재승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곤 물었다.
“사장님. 맹인도 뭐 연금 같은 거 나오나?”
“글쎄다?”
“나오면 좋은데. 그쵸?”
다시 또 정적.
젓가락으로 괜히 제 밥그릇에 담긴 밥알을 콕콕 찔러대던 재승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과 알고 지낸 십수 년간, 이토록 어색했던 시간이 있었나?
아마 없었던 것 같다.
* * *
식사가 끝나고, 송 사장이 돌아간 뒤. 재승은 곧장 작업대 앞으로 돌아와, 재봉틀의 페달을 밟아댔다. 월 말까지 최대한 물량을 맞춰주려면, 시간이 몹시 빠듯했던 탓이었다.
이렇게 홀로 작업을 하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는 새에 쓸데없는 망상들에 빠져들게 마련이었다.
대단한 망상은 아니었다. 구입하지도 않는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되면, 어떤 방식으로 소비할까?’와 비슷한 맥락의 망상들이 주를 이루었다.
허황되고, 실현될 리 없는. 하지만 누구든 한 번쯤은 품게 마련인 흔해빠진 망상 말이다. 재승이 매일 품는 망상은 한결같았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이미테이션 제작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남의 디자인이 아니라, 자신의 디자인들을 필두로 브랜드를 런칭할 수 있었을까?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을까?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매일 어루만져 댄 덕에 너덜너덜해진 망상을 속에 품은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찰나.
쾅쾅쾅-!
누군가가 철문을 두드려 대는 소리 탓에, 재승이 다시금 페달에서 발을 뗐다.
‘누구지?’
작업실에 찾아 올 손님이라고 해봐야, 송 사장을 비롯한 업자 몇 명밖에 없다.
작업실을 나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송 사장이 다시 돌아왔을 리는 없고, 친분이 그리 깊지 않은 다른 업자들은 찾아오기 전에 미리 전화를 주곤 한다. 이내 재승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설마 경찰인가?’
불시에 방문할 손님이라고는 경찰밖에 없다. 비록 수사선상에 오를 정도의 규모로 일을 하고 있는 중은 아니라지만, 어쨌든 이미테이션을 만드는 건, 법에 저촉되는 불법행위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치더라도 이상할 일이 없는 것이다.
이내 재승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서는, 철문 앞에 섰다.
그러고는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눈을, 외시경에 아예 박아 넣다시피 해버렸다.
외시경 너머로,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이내 철문 너머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택배입니다-!”
재승은 여전히 외시경에 한쪽 눈을 처 박아둔 채, 입안 가득 고인 침을 한 번 삼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