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00)
블랙 라벨-199화(200/299)
블랙 라벨 199화
200. 작전
“글쎄요? 딱히 고민의 여지가 있는 사항은 아닌 것 같은데요?”
깊은 상념에 젖어든 것처럼 허공만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재승이 한껏 나긋한 투로 꺼내 든 말이었다.
다시금 묘한 기류가 흐르기를 잠시. 카이 그린이 제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그럼……?” 하고 조심스레 되물었다.
“손에 쥐고 있는 카드를 최대한 영리하게 사용해보 자는 제안에 불과한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잘못 이해 한 건가요?”
“예? 아, 그렇긴 합니다만…….”
다소 당황한 듯 횡설수설 말끝을 흐려 보인 카이 그린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려 보이고야 말았다.
리(Lee)가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이토록 쉽게 오케이 사인을 줄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던 탓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보이며 나직이 물음을 건넸다.
“카이, 여태껏 협업을 거쳤던 디자이너들과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이 마냥 낯설게 느껴져서 그러시는 거죠?”
“예. 바로 그겁니다.”
짤막하게 답해 보인 카이 그린이 재차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와 엇비슷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수준의 디자이너들은, 보통 지나치게 확고한 예술관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아마 그들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예술관의 붕괴를 더욱 두려워하는 게 분명하다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토록 ‘숫자’, ‘계산’, ‘비즈니스’ 등의 단어를 그토록 혐오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리에게 했던 제안을 들은 타 유명 디자이너들은 제가 마치 ‘금은보화를 잔뜩 줄 테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보지 않을래?’ 하는 흉흉한 제안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게 마련이었거든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 보인 재승이 덤덤한 투로 답했다.
“가치관의 차이겠죠. 이미 가늠하셨겠지만 저는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쓸 만한 카드가 있다면 어떻게든 사용하는 게 맞을 테니까요.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존하는 모든 브랜드가 시즌 제품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우드보드를 작성하곤 합니다. 건축에 앞서 도면을 그려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과정에 ‘트렌드 분석’이 섞여 있습니다. 전 세계 브랜드의 제작 흐름 등을 분석하고 이번 시즌의 틀을 구상하는 과정인 거죠.”
“네, 그런데요?”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간단해요. 최대한 많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행위이자,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인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결국 예술 앞에 ‘계산’과 ‘분석’이 섞여 있는 셈이지 않겠습니까? 비록 상업적인 디자인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라지만, 계산과 분석을 예술가가 해선 안 되는 비열하고 추잡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말을 마친 재승이 계약서가 담겨 있는 서류 봉투를 집어 들어서는 카이 그린에게 건네주며 재차 덧붙였다.
“지금의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이룩해 온 ‘연승’을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디자이너 리는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항상 최고의 성적을 내야한다?”
한차례 “네, 맞습니다.” 하고 답해 보인 재승이, 카이 그린의 두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피해를 줄 여지가 있는 방법, 혹은 지나치게 비도덕적인 방법, 마지막으로 위법에 해당하는 방법까지. 이 세 가지 분류에 해당되지 않는 방법이라면 그 어떤 수라도 써볼 자신이 있어요. 제 연승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말이죠.”
대중들이 호기심을 품고 있는 월 플라워의 전속 VMD ‘남광민’을 대규모 매거진이란 이름의 무대 위에 올리고 이목을 집중시킨다.
또 자신 역시 쇼 디스플레이 등의 실무에서 물러난 뒤 인터뷰를 비롯한 마케팅 활동에 집중하여 관심도를 끌어올린다.
예술가로서의 긍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타 디자이너들이 이와 같은 제안을 들었더라면?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수준의 모욕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펄쩍 뛰어댔을 게 분명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예술’에만 치중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에이전시내지는 모기업 측에 적지 않은 금액의 수수료를 지불해 가며, 디자인 외적 업무에 대한 권한들을 위임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반면 리는?
제 발치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여념이 없던 카이 그린이, 고개를 치켜들어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려가며 계약서의 내용을 다시금 훑어보고 있는 재승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유가 뭡니까?”
“어떤 이유요?”
“연승을 유지하고 싶은 이유 말입니다.”
“세상에 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천연덕스러운 투로 답해 보인 재승이 얼추 십수 장은 되어 보이는 계약서를 협탁에 두드리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해 가며, 다시금 덤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제 목표는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패션계의 꼭대기 층에 존재하는 왕좌에 앉는 겁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농구라는 스포츠를 떠올릴 때면 자연스레 마이클 조던이란 이름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또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떠올릴 때면 자연스레 타이슨이란 이름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디자이너를 떠올릴 때면 리(Lee)라는 이름을 함께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는 겁니까? 멋진 목표로군요.”
“음, 비슷한데 조금은 다릅니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패션이란 단어만 듣더라도 저를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싶거든요.”
말을 마친 재승이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보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카이, 딱 한 가지만 질문토록 하습니다. 주관적인 생각이 궁금한 것뿐이니 솔직히 답해주셨으면 좋겠군요. 현 패션계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내 카이 그린이 미간을 팍 좁힌 채 “흐음…….” 하고 침음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던 탓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안건이었다.
과연 누굴까?
수십여 개의 패션 브랜드 위에 군림하고 있는 LVMH 그룹의 아르도 회장? 혹은 그의 몇 안 되는 적수로 꼽히곤 하는 쟈넬 그룹의 베르타이머 회장? 패스트 패션 브랜드 ‘타라’로 전 세계적인 큰 성공을 거두며 포브스가 집계한 최고 부자 Top100에 이름을 올린 아만시아 회장?
카이 그린이 그렇게 깊은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찰나.
“아마 지금 카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들 중 태반이 디자이너가 아닌 ‘자본가’일 겁니다.”
“아…… 정말 그렇군요.”
“저 역시 타 디자이너들과 엇비슷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데, 초연한 예술가로 살아가며 그런 거대 자본가들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할 것만 같더군요. 제 진정한 경쟁자는 그들입니다. 예술은 경쟁이 아니라지만 경영은 너무도 명백한 경쟁이니까요.”
유려하게 말을 마친 재승이 잘 포개어 쌓아둔 계약서 뭉치를 슬쩍 밀어서는, 카이 그린에게 건네주었다.
카이 그린은 아무 말 없이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만년필을 집어 든 뒤, 계약서의 내용을 낱낱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데, 뭐랄까?
글씨를 읽고 있기는 한데 좀처럼 내용이 들어오질 않는 느낌이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아무리 정신을 다잡아 봐도 자꾸만 딴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LVMH 그룹의 브랜드 인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로군…….’
그때.
“카이,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조건이 있으신 거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최대한 우호적인 방향으로의 수정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내 “아!”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카이 그린이 곧장 서명을 시작하며 답했다.
“우린 서로에게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 * *
“리, 고생 많으셨습니다. 패션위크 기일이 코앞인지라 한창 정신없으실 텐데, 요청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네요.”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가 끝맺어진 뒤, 매거진 엘라(Ella) 소속 디렉터가 한껏 밝은 투로 건넨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제 고개를 가볍게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엘라와의 협업은 늘 즐겁거든요.”
“리, 그런데…….”
“네.”
“말미쯤 답변이 조금 자극적인 편인 것 같은데, 그대로 내보내도 괜찮을까요?”
이내 재승이 제 손에 들린 생수병의 뚜껑을 괜히 만지작거려 가며, 어떤 답변 때문에 이와 같은 질문을 건넨 것일지 인터뷰 내용을 복기해보고 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 하고 탄성을 뱉어 보인 재승이, 덤덤하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가급적 인터뷰 내용 그대로 작성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다름 아니라 ‘이번 파리 패션위크 무대에 함께 서게 된 브랜드들 중, 어떤 브랜드를 가장 경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때문인 듯했다.
‘저희는 그 어떤 브랜드도 경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파리 패션위크가 끝난 뒤에는 전 세계의 모든 브랜드가 월 플라워를 경계하게 될 것 같군요.’
이내 표정이 한결 밝아진 엘라 측 디렉터가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예, 그럼 말씀해 주신 대로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민감한 부분인지라 잘라내야 하는 건 아닐지 고민했었거든요…….”
“그렇군요. 아무쪼록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향후 스케줄 탓에 바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엘라 측 디렉터와의 대화는 간단한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뒤에야 마무리되었다.
스태프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온 뒤. 재승은 마냥 급한 걸음으로 주차장에 대기 중인 차량으로 복귀했다.
푹신하기 그지없는 뒷좌석 시트에 주저앉기 무섭게 묵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재승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있는 힘껏 ‘꾹, 꾹’ 눌러대고 있던 찰나.
조수석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가 룸미러로 그런 재승을 힐끔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리,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한차례 짤막하게 “잠시만요” 하고 답해 보인 재승이, 제 스케줄이 기재된 서류를 유심히 한 번 훑어본 뒤 답했다.
“포그 매거진 본사로 가주시면 될 것 같네요.”
“예, 알겠습니다.”
다음 스케줄도, 그다음 스케줄도, 또 그다음 스케줄도 모두 ‘인터뷰’내지는 ‘취재’였다.
카이 그린이 월 플라워 VMD팀에 합류하게 된 뒤, 패션위크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인위적으로 이슈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전과 다를 바 없이 인터뷰에 임하다가, 짓궂은 의도로 건넨 가십성 질문이 돌아올 때면 놓치지 않고 자극적인 답을 건네는 형식이었으니 말이다.
결과 역시 나쁘지 않았다. 공격적인 인터뷰 탓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더러 존재했으나, 태반이 그 만큼 이번 시즌에 대한 자신이 있기에 보일 수 있는 행동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리, 도착했습니다.”
끼이익-
재승이 탑승하고 있던 세단 차량이 포그 매거진 파리 본사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한차례 “감사합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답해 보인 재승이 차량에서 내려서던 찰나. 본사 건물 정근 인근에 서 있던 사내 두 명이 재승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남광민과, 마냥 쾌활해 보이기만 하는 카이 그린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스케줄 끝난 대로 바로 온 건데…….”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 친구 죽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카이 그린이 제 엄지손가락으로 남광민의 얼굴을 가리켜 보이며 건넨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돌려 남광민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기를 잠시.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광민 씨, 그렇게 긴장되세요?”
“네? 네. 아니, 아니오.”
“막상 겪어보면 별거 없어요.”
한편으로는 ‘정말 저렇게까지 긴장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생에 첫 인터뷰가 초대형 매거진인 ‘파리 포그’(Paris Pouge)인 상황인데, 어찌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내 재승이 그런 남광민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고는 나직이 덧붙였다.
“긴장 좀 풀어요. 잘하면 다음 달 파리 포그 발행호의 메인커버에 광민 씨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릴 수도 있는…….”
재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던 찰나, 남광민이 돌연 “웁…….” 하고 헛구역질을 해 보이고는 다급한 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자, 잠시만 화장실 좀…….”
어차피 그 어떤 말로도 긴장을 풀어줄 수 없다면, 차라리 긴장을 배가시켜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건넨 농담이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