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06)
블랙 라벨-205화(206/299)
블랙 라벨 205화
206. Natural Premium
재승이 이번 컬렉션의 큐시트를 낱낱이 훑어보는 내내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아마 재승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 한마디로 인해, 얼마 남지도 않은 대기 시간이 지옥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변모하게 될지도 모른단 사실을 장내에 있는 이들 전원이 숙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완벽하네요.”
제승이 이번 컬렉션의 큐시트를 모두 살펴보기 무섭게 꺼내 든 말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큐시트가 무엇이냐고? 간단하다. 오늘 올리게 될 컬렉션의 상세 내용을 초 단위로 끊어 기록해 둔 서류이다.
몇 분, 몇 초에 어떤 음악이 나올지. 또 그 시각 어떤 모델이, 어떤 의상을 차려입은 채 런웨이의 어느 위치쯤에 서 있을지까지 낱낱이 기록해 둔 서류 말이다.
“감사합니다.”
카이 그린이 건넨 말에 미소로 화답한 뒤, “자, 다들 주목.” 하고 말해보이는 것으로 장내에 자리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지독한 적막이 흐르기를 잠시. 재승이 조곤조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결전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개중에는 파리 패션위크를 이미 몇 번 거쳐보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태반이 이번 무대가 첫 경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한차례 숨을 걸러 보인 재승이 많은 이들과 눈을 맞춰 보인 뒤에, 힘찬 목소리로 뒷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이번 컬렉션에 대해 막대한 기대와 확신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저와, 제 브랜드, 그리고 참여한 모든 이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꿔 줄 ‘빅 이벤트(Big Event);가 되어 주리란 기대를. 또 눈에 보이지 않는 트로피를 우리가 거머쥐게 되리란 확신을 말입니다.”
재승이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어지간해서는 빗나가는 법이 없는 제 계산대로라면, 여러분의 미래가 바뀌기까지 불과 삼십 분도 남지 않았군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 잘 견뎌내고 나면, 이 자리에 계신 전원이 계약서 금액란에 적힌 금액의 자릿수가 달라지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께서 월 플라워 측이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하신 순간부터, 저와 여러분은 한 배를 탄 동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영광도, 침체도 함께 누리게 될 테니까요.”
말을 마친 뒤 모델들의 모습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더라면 그저 그런 평범한 멘트였을지 모르겠다만, 글쎄?
몇몇 모델들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을 보면 깊은 유대감에 사로잡힌 듯 보일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시즌 준비 일정과, 과한 체중 조절 탓에, 감정 기복이 극에 달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벼락처럼 화를 낼 수도, 별것도 아닌 말 몇 마디에 눈시울을 적실 수도 있는 상태인 것이다.
더군다나 권위 있는 클라이언트 격인 디자이너와, 고용인 격인 모델들의 관계는 상하 수직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덕분에 ‘우리’니, ‘동지’니 하는 유대감을 자극하고 동료애를 끌어 올리는 단어 선정이 효과를 거둔 상황이랄 수 있었다.
“여러분과 함께 누리게 될 결과가 기왕이면 영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태껏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정말 고지가 코앞에 있는 상황이군요. 그러니 염치불고하고 딱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힘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간이 대기실 안으로 잔잔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정이 복받친 몇몇 모델들은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애꿎은 천장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렇게 하면 ‘자꾸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이렇게 하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원시적인 발상 덕인 듯했다.
감동의 물결에 휩싸여 있는 모델들과 달리,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쉰 뒤 마냥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몇몇 모델들의 메이크업이 눈물 몇 방울 덕에 잔뜩 번져 버린 탓이었다.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컬렉션에 나서기 전에 행해야 할 모든 준비를 끝마친 모델들이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뭐, 크게 나누자면 대충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듯했다.
첫 번째는 ‘백 스테이지’(Back Stage) 인근을 런웨이 삼아 모 의워킹을 해보는 것.
두 번째는 앉은 자리에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미지 트레이닝(Image Training)’에 전념하는 것.
어떤 방법이 됐든, 초조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어 가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급박함이 극에 달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유일하게 느긋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번 월 플라워 파리 패션위크 컬렉션의 ‘주인’이랄 수 있는 재승이었다. 재승은 분장거울 앞 의자에 앉은 채, 분장을 고치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또 그런 재승의 바로 곁에는 파리 패션위크 측 관계자가 초조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리(Lee), 그럼 개막식에 얼굴조차 내비추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리의 심정 역시 이해하는 바입니다만, 그건 몹시 곤란합니다. 리는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디자이너들 중 한 명이니 말입니다.”
개막식에 얼굴을 비추어 달라? 주최 측의 요청이니만큼, 더군다나 동네 행사도 아니고 파리 패션위크 측의 요청이니만큼 웬만하면 수긍하고 받아들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절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뭐냐고?
“개막식이 끝나면 잠깐의 틈조차 주어지지 않고 컬렉션을 선보여야 합니다. 컬렉션이 시작되고 나면 모니터링에 돌입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고요. 지금이 아니라면 메이크업을 고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비록 저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저희 측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니 그 정도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컬렉션 피날레 인사 장면이 9시 뉴스는 물론이고, 인터넷 뉴스를 도배하게 될 게 분명했다.
땀 때문에 본의 아니게 번지고, 지워진 분장 상태로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 전 세계 방방곡곡에 퍼지는 상황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파리 패션위크는 여태껏 셀 수 없이 긴 나날 동안 꿈꿔온 꿈의 무대가 아니던가?
원하지 않는 꼴로 런웨이 무대 위에서 인사를 올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리….”
패션위크 측 관계자가 재차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재승이 그를 쏘아보며 덧붙였다.
“제가 개막식뿐 아니라 폐막식에조차 얼굴 한 번 내비추지 않기를 희망하시는 게 아니라면 제 입장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이해해주셔야만 할 겁니다.”
명백한 협박의 말이었다. 기분 나쁜 기색을 표출할 법도 한 말이었으나, 패션위크 측 관계자의 표정은 마냥 덤덤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저 적막만이 맴돌기를 잠시,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패션위크 측 관계자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패션위크 측 관계자가 간단한 인사말 몇 마디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자, 송 이사가 재승의 뒤편에 성큼 다가서며 이죽대는 투로 말했다.
“이야, 서울 촌놈이 많이 크긴 했다. 파리 패션위크 관계자도 쪼물딱 쪼물딱 잘 주물러 대고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오랫동안 꿈꿔왔던 무대에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요. 많이 큰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도 말 좀 살살 하지 그랬어? 올해야 그렇다 치고, 내년에라도 괜히 페널티를 준다거나 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쉬운 건 그쪽일 걸요? 세계 4대 패션위크는 말 그대로 네 개 잖아요? 저희야 활동 무대를 바꾸면 그만이고요. 뉴욕도 있고, 밀라노도 있고, 런던도 있고… 브랜드가 주거지를 옮기는 경우가 흔치는 않다지만 종종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이제 저희 가치를 몰라주는 곳에서 피땀 흘려가며 일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송 이사가, 제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 본 뒤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개막식 참석하러 가봐야겠다. 미용에 관심 많은 사장 둬서, 팔자에 없는 대리출석까지 하게 생겼네. 술독에 빠진 대학생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미용에 관심 많은 사장 덕분에 대기업 간부 이상급 연봉 받으시잖아요?”
한차례 “어쭈? 하다하다, 이제 생색까지 내네?” 하고 답해 보인 송 이사가, 히죽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곧장 답했다.
“그렇지. 싫다는 게 아니라, 옛날 생각도 나고 좋다는 뜻으로 말한 건데 왜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어쨌든, 대표님. 그럼 성실히 임무 수행하러 가보겠습니다. 충성!”
익살스러운 투로 말을 마친 송 이사가, VMD 실무 담당자랄 수 있는 카이 그린과 남광민을 대동한 채 간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개막식 시작이 코앞에 있는 것인지 대기실의 얇은 천막 너머에서 안내 멘트가 한창 들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 파리 패션위크 개막식을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제 곧 개막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지정된 좌석에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내 멘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재승이 고개를 한 번 털어 보이는 것으로 잡념을 털어내고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말 그대로 ‘형식적인 일정’에 불과한 10분짜리 개막식이 시작될 것이다.
개막식이 끝나고 나면? 곧장 파리 패션위크에서의 첫 번째 컬렉션이 시작될 테고 말이다.
첫째 날, 첫 번째 순서.
거울 속 자신의 두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재승이,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파리 패션계, 다 죽었어….”
남은 올해 안으로, 파리 시내에 월 플라워의 로고가 도배될 것이다.
무조건.
* * *
네임밸류가 낮고, 역사가 짧은 행사일수록 개막식 등의 형식적 행사 진행 시간이 지나치게 길고 지루한 경향이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인 것이다.
대중들이 알아서 인정해 주지 않으니, 인정받기 위해 온갖 장점을 끄집어내고 포장지를 덕지덕지 발라 입힌 취지와 연혁 등을 소개하기 바쁜 것이다
반면 세계 4대 패션위크는 다르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개막식을 진행할 뿐, 적어도 하등 쓸모없는 소개말 등으로 귀빈들의 시간을 빼앗는 등의 행위는 일절 하지 않는다.
– 귀빈 여러분, 지루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정부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자금이 섞인 행사인지라 개막식 등의 행사를 생략할 수가 없는 점,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막식의 끝과, 이번 파리 패션위크의 시작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개막식이 시작된 지 10분도 되지 않았을 무렵, 사회를 맡은 파리 패션위크 주최 측 협회장 ‘마틴’이 연단 위에서 꺼내 든 말이었다.
한차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오기를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금 유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이번 파리 패션위크의 초미(初味)를 장식하게 된 브랜드는, 신생 브랜드인 동시에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브랜드입니다. 이미 기량을 입증한 디자이너 ‘리’가 이끌고 있는, 신생 브랜드 월 플라워의 컬렉션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틴 회장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다시금 한바탕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앞서 울려 퍼졌던 박수갈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높고 낮은 술렁임이 섞여 있던 탓이랄 수 있었다.
컬렉션 시작 직전의 여론이 으레 그렇듯 긍정적인 여론도, 부정적인 여론도 섞여 있었다.
또 우쭐대는 투로 제 생각을 늘어놓고 있는 이들 중 태반이, 부정적인 여론을 조장하고 있는 이들이었고 말이다.
“리(Lee)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원맨 팀에 불과합니다. 저렇게 자리를 잡은 브랜드는 절대 오래갈 수가 없어요. 리의 행실, 발언, 사소한 부진 하나하나까지 전부 브랜드 매출에 반영될 게 분명하니 말입니다.”
“마케팅에 신경 쓸 시간에 제품의 퀄리티를 올리는 게 더 좋았을 겁니다. 룩북을 통해 공개된 제품 일부만 보더라도, 스트릿 브랜드 이미지를 제대로 탈피하지 못한 느낌이 강렬하더군요. 프리미엄 브랜드 칭호를 얻기에는 아직 수년은 이르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뭐, 다 좋습니다. 하지만 월 플라워는 자신들이 어떤 신세인지를 망각한 채, 지나친 마케팅을 자행했어요. 베르타이머 회장과, 아르도 회장의 입김만 있으면 전부 다 해결되리라 예상했겠지만 글쎄요?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신생 브랜드에 불과할 뿐입니다. 기업 이미지만으로 고객들의 신뢰를 사기에는….”
월 플라워를 공격하는 내용의 칼럼을 몇 개씩 저술한 바 있는 칼럼니스트들이 신이 나서 저들끼리 의견을 주고받고 있던 찰나, 세련된 음악의 일렉트로닉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장내에 돌연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첫 번째 흑인 남성 모델이 런웨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몇몇 사람들의 낯빛이 새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적나라하게 묘사하자면, 마치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보일 따름이었다.
그때,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동양인 한 명이 작게 중얼댔다.
“쯧, 돌끼리 부딪혀 봐야 스파크 조금 튀는 게 고작이지. 이제야 좀 잠잠해진 것 같네요. 안 그래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니라, 나날이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젊은 빌보드 스타 ‘저스커스’였다.
이내 그의 곁에 근엄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던 위즈덤 칼리파가 제 선글라스를 살짝 치켜 올림과 동시에, 평론가 무리를 쏘아보며 답했다.
“빌어먹을 놈들, 운 좋은 줄 알아야 할 거야. 조금만 더 주절주절 떠들어댔으면, 입을 박살 내버릴 생각이었다고.”
“그건 너무하잖아요?”
“형제를 욕하는 건 참아선 안 될 일이야. 새로 산 조던 신발을 짓밟는 것만큼이나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주의거든.”
“비유가 뭔가 이상한데요?”
두 사람이 키득거리는 사이, 어느덧 런웨이 끝자락에 다다른 첫 번째 흑인 남성 모델이 자유분방하기 그지없는 느낌의 턴을 선보였다.
기자들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하며, ‘사각, 사각-.’ 하고 종이와 펜이 맞닿을 때 울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또 터지는 셔터 소리와, 술렁임. 변해 버린 바이어들과 투자자들의 눈빛.
장내에 찾아온 모든 변화가, 이번 컬렉션에 대한 긍정적인 조짐을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