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08)
블랙 라벨-207화(208/299)
블랙 라벨 207화
208. Natural Premium (3)
곧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있으리란 사실 탓에 벌벌 떨고 있는 임원들과 달리,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의 두 눈은 집념으로 반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 한편에서 문득 ‘여태껏 안주해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또 그와 동시에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이제 패션계 전체를 통틀어 봐도 더 이상의 적1수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서는 데 성공했다.
잠시 반짝하고 빛나는 브랜드가 있을지언정, 그뿐이다. 결국 패션계를 대표하는 그룹이자, 부동의 1위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LVMH 그룹이 아니던가?
“크하핫, 것참! 마술이라….”
아르도 회장이 감탄 어린 혼잣말을 중얼대자, 임원 한 명이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패션쇼 무대에 ‘매직 퍼포먼스’를 개입시키다니요? 이는 쇼의 본질을 흐리는 퍼포먼스인 데다가, 관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주최 측에 월 플라워의 도를 넘어선 퍼포먼스에 대한 정식적인 항의를….”
임원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아르도 회장이 미간을 팍 좁힌 채 스산하기 그지없는 투로 되물었다.
“관례? 재미있군. 선례가 없는 퍼포먼스임은 확실하지만, 정말 관례에 어긋난 퍼포먼스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그 관례는 대체 누가 정하는 거지? 파리 패션위크 측에서 제정한 정식 공문 내에, 컬렉션 쇼에 매직 퍼포먼스를 절대 넣어선 안 된다는 룰(Rule)이 따로 고지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친구야, 정신 똑바로 차리게. 자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저 선구자에 대한 알량한 시기와 질투일 뿐이야. 이토록 효과적인 퍼포먼스를 먼저 떠올리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 거야. 알겠나?”
근엄한 투로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이, 다시금 시선을 옮겨서는 런웨이 무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번 월 플라워의 대진운이 최악이라는 사실은, 무대를 한 번이라도 기획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야외무대라는 점에서 이미 수없이 많은 퍼포먼스에 제한이 생긴다.
한데, 하필이면 시간대마저 환한 낮 시간대로 배정된 탓에 조명 장비마저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고 말이다.
덕분에 모두가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상황이 아니던가?
한데, 마술?
허점을 제대로 파고든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기야, 그간 리가 남겼던 전적을 되짚어 본다면 무리도 아니었다.
지난 알렉산더 킹 컬렉션 당시 선보였던 대대적인 플래시 몹 쇼를 시작으로, 크리스찬 디옴 오뜨 꾸뒤르 당시 선보였던 석양 퍼포먼스, 쟈넬 컬렉션 당시 선보였던 시간 이동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과연 그룹 소속 VMD들이, 저들만큼 무대를 위해 골몰했을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다.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패배는 한 번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뛰며, 아드레날린이 잔뜩 분비된다.
젊었을 적, 부친께 물려받은 막대한 부동산을 모두 되판 뒤 패션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조건적인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젊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시가와 함께 타들어간 젊은 날들.
그 치열했으며 고통스러웠지만, 이젠 추억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버린 그날들이….
패션계에 군림하고 있는 왕이란 낯 뜨거운 칭호가 익숙해져 버린 지금, 그에게 있어 젊은 디자이너 ‘리’(Lee)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자극제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부로 그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이야기들을 터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이자, 지고 싶지 않은 경쟁자가 되어 버렸다.
“그룹 휘하 백화점 측 관리자들에게 공문 넣게. 그 어떤 조건을 감내해서든, 이번 월 플라워 제품은 무조건 우리 쪽 백화점 브랜드가 선점해야 하네. 그래야 타 브랜드 측에서 발생한 손해액을 조금이라도 최소화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한차례 “예, 알겠습니다.” 하고 답해 보인 임원 한 명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함과 동시에 마냥 급한 걸음으로 장내를 벗어났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목을 쭉 뺀 채, 객석의 분위기를 한 번 훑어보기 시작했다.
월 플라워가 컬렉션 퍼포먼스에 ‘마술’을 접목시켰단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은 단연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몇몇은 그 기발한 발상에 완벽히 매료된 듯 보였고, 또 다른 몇몇 원칙주의자들은 재승이 마치 저질러선 안 될 반칙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분기서린 눈을 한 채 앉아 있을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수차례 “리, 리, 리….” 하고 되뇌어 보인 아르도 회장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과 협업을 함께 하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루키’라 불리던 애송이 디자이너가 이젠 업계를 뒤흔드는, 또 자신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혁신자’ 라인에 올라서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 * *
“야외무대가, 돔을 비롯한 실내 무대에 비해 훨씬 열악한 조건이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퍼포먼스를 아예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쇼 디스플레이 구상 단계에서, 카이 그린이 재승에게 자신감 가득한 투로 건넨 말이었다.
“그럼요?”
재승이 의구심 가득한 투로 되묻자, 카이 그린이 “간단해요.” 하고 답해 보인 뒤 술술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됩니다. 우선 돔 형식의 무대 바깥에서도 별다른 무리 없이 행해지는 퍼포먼스가 무엇이 있는지 떠올려 보는 게 우선적인 일인 것 같네요.”
간단한 설명만 들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여러 장르의 공연 예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저 잠시 생각을 되짚어 본 게 전부인데도 불구하고, 대여섯 개가량이 떠올랐다. 버스킹, 플래시 몹, 저글링, 마술 등….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무렵. 재승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 하고 탄성을 뱉어 보인 뒤 말을 이었다.
“카이, ‘마술’은 어때요?”
이내 카이 그린이 흥미롭다는 듯 “음?” 하고 추임새를 넣어 보인 뒤 되물었다.
“마술이라, 나쁘지 않은데요?”
“네, 만약 마술 트릭을 활용해 제가 구상하는 그림을 그려낼 수만 있다면….”
“가능성을 재는 건, ‘전문가’들에게 맡깁시다.”
“전문가요?”
“리, ‘빌리 반 코퍼레이션(Billy Ban Corporation)’이란 회사 들어본 적 있죠?”
“아, 예. 물론입니다.”
유명 매거진들이 심심할 때마다 거론하곤 하는 대규모 에이전시 회사다.
공연의 메카랄 수 있는 라스베이거스를 점령하고 있다시피 하는 회사인 데다가, 공연 예술자들에게 있어서는 성공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공연예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면,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유명한 곳이랄 수 있었다.
“리, 만약 이번 컬렉션에 투입될 자금을 최대한 아끼고 싶은 생각만 아니시라면, 빌리 반 코퍼레이션 쪽 아티스트에게 자문을 받아 기획해 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군요. 마침 소속 아티스트 중 리와 국적이 같은 마술사가 한 명 있습니다. 더군다나, 나이대도 얼추 비슷한 것 같고요.”
“예? 그쪽에 저와 나이대가 비슷한 한국인 아티스트가 있다고요?”
맥없이 되묻기를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아….”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재승이 제 짐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형대욱 마술사 말씀하시는 거 맞죠?”
대한민국의 자랑들 중 한 명이랄 수 있는 마술사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남긴 마술사 최고 수입 기록을 갈아치운 것으로, 국내외에서 크게 한 번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형대욱 마술사는 결혼 발표 후 잠정적 은퇴를 선언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 은퇴 발표 덕분에 자국 뉴스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아뇨, 복귀하셨어요.”
“예?”
“올해 초, 그러니까 조금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2014년 2월 1일자로 빌리 반 코퍼레이션과 재계약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습니다.”
“카이,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그런 정보는 대체 어떻게 입수하는 거예요?”
“저야 빌리 반 측과 몇 번이고 협업을 거쳐본 이력이 있으니까요. 당연히 내부 연락망도 갖추고 있고요.”
말을 마친 카이 그린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차 이런저런 부연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돈이야 많이 깨지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확실히 믿고 맡길 수 있을만한 ‘스페셜리스트’지 않겠습니까?”
스페셜리스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가십성만 놓고 보더라도 무조건 계약을 체결하고 협업을 진행하고 싶은 상대였다.
그저 협업을 진행하는 것만 하더라도, 꾸준한 시청률을 기록 중인 국내 공중파 9시뉴스를 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재승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카이 그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예, 카이 그린입니다. 다름 아니라, 전에 말씀드렸던 비즈니스에 대해 다시 한번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
* * *
컬렉션의 2막이 막 시작된 지금, 재승은 백 스테이지(Back Stage) 한편에 자리를 잡고 선 채 모니터링을 하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던 기간은 뭐랄까?
곳곳에 위험부담이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 가득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선 현존하는 무수히 많은 패션 브랜드 중 그 어떤 브랜드도 행하지 않는 위험한 컨셉을 메인 테마로 잡았다.
더군다나 첫째 날, 첫 번째 순서라는 악조건을 뚫기 위해 전례가 아예 없는 위험한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온갖 매스미디어를 통해 이목을 끌기 위한 이런저런 활동을 진행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따금씩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차라리 내일 당장 쇼를 올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결과는?
“리(Lee), 성공적입니다! 30초밖에 안 됐는데, 벌써 긍정적인 내용의 기사들이 업로드되고 있어요-!”
재승의 곁을 지키고 있던 카이 그린이, 제 스마트폰을 훑어보며 울먹이다시피 하는 투로 건넨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빼앗다시피 낚아채며, 화면 위로 떠 있는 기사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 파리 패션위크 생중계 칼럼, 프리미엄 브랜드 월 플라워. 패션계 역사상 전례 없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다. ] [ 전문가들의 염려를 완벽히 깨트린 파격적인 발상과 시도. 월 플라워가 컬렉션에서 선보인 매직 퍼포먼스. ]앉은 자리에서 황급히 작성한 기사를 곧장 게시해 버린 탓인지, 자세한 설명이나 각주 없이 기사의 제목을 뒷받침하는 사진이나 짤막한 영상만 게시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내 카이 그린이 제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잔뜩 고조된 투로 중얼댔다.
“제기랄, 이제야 한숨 놓을 수 있겠군요.”
그간 애써 덤덤한 척 해왔으나, 그 역시 그간 무수히 많은 고민의 밤을 지새웠음이 분명해지는 대목이었다.
이내 재승이 그런 카이 그린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중얼대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 왔어요. 이제 다 왔어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이는 사실상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 * *
쇼의 2막이 시작되고, 대여섯 명가량의 모델이 런웨이 무대를 거쳐갔을 무렵.
“맙소사, ‘1막’과는 아예 다른 컨셉이로군요.”
객석에 앉아 있던 제랄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건넨 말이었다.
컬렉션의 1막은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든 느낌이었다면, 월 플라워 컬렉션 2막은 뭐랄까?
친절히 ‘프리미엄 브랜드’의 정의를 내려주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최고급 재질의 원단과 부자재를 이용하여 만든, 프레타포르테 의상의 향연.
1막에서 선보였던 자유분방한 느낌의 디자인들과 아예 상반되는 느낌의 의류들을 입은 모델들이 줄줄이 런웨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상생활에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무난함 속에 간단한 차이를 줘 특별함을 깃들인, 또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디자인의 나열.
제랄딘이 넋을 놓은 채 런웨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 그녀의 바로 곁에 앉아 있던 멜라니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중얼댔다.
“허, 이 감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두 개 브랜드의 쇼를 관람하는 기분인데요?”
이윽고 그녀들이 앉은 자리를 지나던 남성 모델과, 그녀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던 순간.
모델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고, 쇼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그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