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09)
블랙 라벨-208화(209/299)
블랙 라벨 208화
209. Dreamer
한마디 말조차 없이 런웨이 무대만 응시하고 있던 필 아도르가, 나직이 말문을 여는 것으로 침묵을 깨보였다.
“오랜 경험….”
이내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젊은 평론가들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려가며 “예?” 하고 되물었다.
다들 호기심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만, 안타깝게도 필 아도르는 곧장 답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 역시 번뜩하고 떠오른 생각들을 다듬어내지 못한 듯 보였다.
그는 제 턱 끝을 살살 만지작거려 가며, 우수(憂愁)에 잠긴 얼굴로 연신 혼잣말을 중얼대고 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을까?
젊은 평론가 무리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려 보이고는, 마냥 조심스러운 투로 질문을 건넸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디자인 자체에 무슨 문제라도….”
“자네는 저 디자인에 ‘문제점’이 있어 보이나?”
필 아도르가 다짜고짜 날이 바짝 선 질문을 건네자, 젊은 평론가가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꼴깍-.” 하고 넘겨 보인 뒤 힘겹게 답했다.
“아뇨,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맞아. 문제는커녕 지나치게 견고한 느낌이 강하지.”
“예, 그렇습니다.”
“그게 문제야.”
짤막하게, 또 힘 있게 말해 보인 필 아도르가 런웨이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야. 리(Lee)가 프랑스 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가 기획·구성한 쇼 전부를 단 한 개도 빼트리지 않고 직접 관람했네. 그러니까… 적어도 리가 일반적인 상식만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천재성을 지니고 있단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알고 있다는 뜻이지.”
이내 젊은 평론가가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보였다.
비록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꼭 “그럼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하고 묻는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패션계가 어떤 곳인가?
본래 경력이 아니라, ‘감각’의 유무에 의해 몸값과 대우가 달라지는 곳이 아니던가?
신인 디자이너가 데뷔 무대에서 정상에 설 수도, 또 십수 년째 승승장구를 거두던 베테랑 디자이너가 하루아침에 고꾸라질 수도 있는 잔인하면서도 매력적인 곳.
그렇기에 더더욱.
천재성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업계이기도 하다.
단숨에 ‘*메인스트림 마켓(*Mainstream Market)’의 지분을 잔뜩 거머쥐는 루키들의 등장이 심심찮게 일어나기에, 연일 고공행진을 이어나가던 디자이너나 브랜드가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몹시 빠른 속도로 몰락하곤 하기에, 또 그 밖의 예상할 수 없는 이변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발생하곤 하는 곳이기에 말이다.
“흠, 대체 어떤 점이 문제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로군.”
잠시 망설이던 젊은 평론가가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린 뒤 답했다.
“예,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이내 필 아도르가 한차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덤덤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게. 우리가 칼럼의 주제로 삼곤 하는 많고 많은 디자이너들 중 과연 ‘천재’가 아닌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건….”
“내가 기억하는 한 패션계는 지난 수십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쭉. 항상 ‘레드오션’상태였어. 무수히 많은 이들이 패션계의 중심에 들어서고자 노력했으나, 끝까지 살아남아 메인스트림 마켓에 다다른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
한차례 “아….” 하고 낮게 말해 보인 젊은 평론가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평론가들의 땔감이 되었다는 뜻인 즉, 이미 디자이너로서의 네임밸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
사실상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디자이너 전원이, 이미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천재’나 마찬가지다.
“여태껏 무수히 많은 천재들을 봤어. 자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은퇴를 선언하고 사라진 패션계 역사의 조각들부터, 내 앞 머리칼이 희끗해지기 시작했을 무렵에야 태어났을 신예 디자이너들에 이르기까지 말일세. 나는 천재들에 대해 잘 알아. 그들의 재능은 무시무시하지만, 절대 만능이 될 수는 없네.”
“만능이 될 수는 없다고요?”
나긋한 투로 “그래.” 하고 답해 보인 필 아도르가, 제 무테안경을 한 번 치켜 올려 보이고는 재차 설명을 덧붙였다.
“재능만으로 충당해 낼 수 있는 영역이 있는 반면, ‘경험’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절대 충당해 낼 수 없는 영역도 존재하게 마련일세.”
“그렇다면 리의 컬렉션은….”
“천재성이라는 말로 포장해 버리기엔 지나치게 노련해.”
짧은 설명.
필 아도르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더 이상 말을 걸지 말아달라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애꿎은 런웨이 무대만 뚫어지라 쏘아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한가득이었다.
원론적인 내용의 대화는 의문을 해소시켜 주기는커녕, 배가시켜 주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필은 대체 어떤 ‘노련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젊은 평론가는 심호흡까지 병행해가며 애써 호기심을 억눌렀다.
밥상을 차려주었는데, 떠먹여 달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고민하는 것은, 거듭된 고민 끝에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자신의 몫일뿐이다.
* * *
반면 장내에는 ‘필 아도르’가 말한 감상을 아예 똑같이 느끼고 있는 이들 역시 더러 존재했다.
“역시 시대는 급변하는군요….”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늙은 여성이 감격스럽다는 듯, 깍지 낀 제 양손을 꽉 움켜쥐어 보였다.
‘비비안 우스트웨드(Vivienne Wostwed)’.
그녀는 1990년과 1991년 연속으로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British Designer of the Year)’로 선정되었던 바 있으며, 영국 여왕으로부터 1992년 OBE(대영 제국 훈장)에 이어 2006년 DBE 작위(2등급의 작위 급 훈장)의 훈장을 수여받기까지 했다.
물론, 화려한 수상 이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트위드, 타탄 체크, 니트 트윈 세트, 클래식테일러 링 등….
그녀는 영국 패션을 대표하는 요소들을 직접 만들어낸 장본인이며, 1970년대의 펑크 문화를 이끈 장본인인 동시에, 영국 패션계의 대모(大母)라는 칭호를 얻어낸 인물이다.
여든을 넘어선 지금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일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현역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 전성기 시절과 다를 바 없이 섹스, 누드, 도덕을 둘러싼 금기가 담겨 있는 충격적인 쇼를 선사하고 있다.
비록 브랜드 가치는 차이가 날지 모르나, 상징적 부분만 고려해 본다면 칼 라거벨트를 비롯한 원로 디자이너들과 견주었을 때 일절 손색이 없는 전설적 인물인 셈.
그런 그녀가, 월 플라워의 컬렉션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다.
이유?
“비록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고,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지만… ‘리’(Lee)가 어찌나 영리한 디자이너인지 만큼은 정말 정확히 알 수 있겠군요. 비록 담아내고자 한 예술적 메시지가 흐릿한 점은 아쉽지만, 적어도 장사꾼을 흉내 내는 데 목을 매는 어설픈 루키들과는 비교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내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원로 디자이너가 흐뭇한 투로 답했다.
“가르칠 게 없는 제자였죠.”
그는 재승이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재학하던 당시 물심양면으로 돕고자 노력했던 스승, ‘에딘 토마스’ 교수였다.
이내 비비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월 플라워는 현재 상업성을 띤 프리미엄 브랜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 젊은 디자이너, 아니, 저 어린 친구는 뭐랄까? 마치 소재와 소재간의 ‘상호작용’을 완벽히 꿰뚫고 있는 것만 같군요.”
“저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계셨군요.”
“네. 리는 어떤 방법과, 형태와, 간격으로 배치해야 각 소재들이 더욱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완벽히 깨우치고 있는 것 같네요. 에딘, 당신도 알다시피 소재간의 상호작용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해도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 내기 힘든 고난이도 작업이지 않습니까? 나이를 감안해 보면 오랜 연구 끝에 얻어낸 능력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저 모든 것을 그저 감각만으로 해냈다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성이 떨어진다.
소재에 대한 견문과 경험, 또 피나는 노력까지.
세 가지가 삼박자를 고루 갖추지 못한다면 절대 체득할 수 없는 능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말이다.
이내 에딘 토마스 교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답했다.
“제가 여태껏 지켜봐 온 결과, 리는 시류의 흐름에 적응할 줄 아는 원로 디자이너와 같은 느낌입니다. 굳이 현역 디자이너와 비교해 보자면 칼 라거벨트와 흡사한 느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이내 비비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이고는 답했다.
“역시 올해에도 어김없이 새 바람이 불어오는군요.”
“예. 하지만 전례 없는 강풍인 것 같습니다.”
단연 비비안과 에딘 토마스 교수, 두 사람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원로 디자이너들이 자리를 빛내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비슷한 변화의 바람을 피부로 만끽하고 있는 중이랄 수 있었다.
전례 없는 신인이 메인스트림 마켓에 나타났다.
신인의 기발함에서 그치지 않고 백전노장의 주도면밀함과 노련함까지 고루 갖춘 괴물 같은 신인이, 한 손에는 포크를 또 다른 한 손에는 나이프를 쥔 채 마켓 전체를 집어삼키겠다는 흉흉한 예고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흠?”
런웨이 무대를 들여다보고 있던 에딘 토마스 교수가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려보이고야 말았다.
다름 아니라, 방금 막 런웨이에 모습을 드러낸 모델이 차려입고 있는 재킷의 프린팅 탓이었다.
등판 부분에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흑백사진이, ‘드리머(Dreamer)’라는 글귀와 함께 프린팅 되어 있던 것이다.
에딘 토마스 교수의 어린 시절 사진이 프린팅된 재킷을 차려입은 모델이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델들의 워킹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배경음악 역시 가빠르게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말이다.
불과 십수 초나 흘렀을까?
이내 같은 재질과 형태의 프린팅 재킷을 차려입은 모델들이 한 명, 두 명씩 줄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워킹의 격식을 깬, 아니, 격식에 어긋난 구성이랄 수 있었다. 이토록 워킹의 템포가 빨라지면 디테일한 부분들을 살펴보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이내 몇몇 귀빈들이 눈살을 찌푸려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객석의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어라? 같은 제품이 아냐. 등판 부분 사진이 재킷마다 프린팅이 다 다른 것 같은데?”
“칼 라거벨트의 유년기 시절 사진 아니야-?”
“저건 비비안 우스트웨드.”
“저 백인 모델이 입고 있는 재킷에 프린팅된 사진은 베르사치잖아?”
또 다른 파격적 시도였다. 전설적 디자이너들의 유년기 사진을, ‘드리머(Dreamer)’라는 글귀와 함께 프린팅시켜 버린 것이다.
이윽고, 마지막 모델인 듯 보이는 여성 모델 한 명이 자연스레 런웨이 끝자락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한차례 여유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가볍고 우아한 턴을 선보였다.
이내 그녀가 차려입고 있는 재킷의 프린팅이 드러났다.
마지막 모델, ‘애슐린’이 차려입고 있는 재킷의 등판 부분에는 재승 자신의 유년 시절 사진이 ‘드리머’라는 글귀와 함께 프린팅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내 바이어 한 명이 아직 쇼가 끝나지도 않은 시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채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외쳤다.
“제기랄! 마지막 시리즈 재킷은 미쳤습니다! 모든 걸 걸고 장담컨대, 이건 무조건 날개 돋친 듯 팔릴 겁니다! 어떻게든 계약을 따내야만 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