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11)
블랙 라벨-210화(211/299)
블랙 라벨 210화
211. 폭풍이 지나간 자리 (2)
PM 6 : 00
파리 패션위크의 첫째 날 일정이 모두 끝났다. 재승은 바쁜 걸음으로 튈르리 공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월 플라워의 컬렉션 무대를 관람하기 위해 먼 걸음을 해준 이들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하는 수고를 무릅썼다.
“바쁘신 와중에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웃는 얼굴로 재승과 인사를 나누는 이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 그 자체랄 수 있었다.
마크 제이콥이나 알렉산더 킹을 비롯하여 재승과 친분이 두터운 유명 디자이너들. 제랄딘, 멜라니, 필 아도를 비롯한 유명 매거진 소속 에디터내지는 영향력 있는 칼럼니스트들.
세계 각국의 공중파 채널에서 파견취재를 나온 기자들.
비록 인연은 없지만 친해지고자 하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추고 있는 유명 스포츠스타들.
손영국, 권지훈, 위즈덤 칼리파를 비롯한 타 분야에서 맹활약 중인 아티스트들.
마지막으로 LVMH 그룹의 아르도 회장이나, 쟈넬 그룹의 베르타이머 회장을 비롯한 거대 자본가들에 이르기까지…….
재승이 그들과 지문이 닳도록 악수를 나누고 또 입안이 바싹 마르도록 미리 준비해 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던 그때.
송 이사는 각국의 바이어들 및 메이저급 백화점 소속 관계자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좁쌀만 한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는 계약서를 연달아 검토하고, 침을 튀겨가며 조건을 조율해 가면서 말이다.
일정이 간략하게나마 마무리된 것은 해가 아예 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의 일이었다.
* * *
일정을 마친 뒤, 재승은 곧장 호텔로 향했다.
답답한 와이셔츠와 정장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해 따뜻한 물로 몸을 씻었다.
샤워가운을 입은 채 따뜻한 커피를 음미하고 있노라니, 나른함 탓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제 뺨을 가볍게 ‘톡, 톡’ 하고 두드려 댄 뒤, 곧장 편한 옷을 골라 입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빠져나온 뒤에는 곧장 시내 외곽에 자리한 펍(Pub)으로 향했다.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함께 컬렉션을 준비해 온 동료들과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끼이익-.
지하 펍에 들어서기 무섭게 무수히 많은 이들이 재승을 반겨주었다.
“왜 이렇게 늦으신 거예요? 다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리, 오셨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지 않겠어요?”
“야, 이 멍청아. 애슐린 옆자리로 안내해 드려야지.”
“어떤 술로 준비해 드릴까요?”
재승을 제외한 전원이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하여,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던 듯 보일 따름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두리번거리고는 나직이 물음을 건넸다.
“전부 모이신 거 맞죠? 생각했던 것보다 인원이 훨씬 적은 것 같은데….”
이내 카이 그린이 한차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아무래도 아직 시즌을 끝마치지 못한 모델분들이 많이 빠져 버린 탓에, 그렇게 느끼실 수밖에 없으실 것 같군요.”
“시즌을 끝마치지 못한 모델분들이요?”
“그러니까, 파리 패션위크가 진행되는 이번 주 내내 몇 번은 더 런웨이 무대 위에 올라야 하는 모델들 말입니다.”
재승이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였다.
월 플라워 컬렉션에 참가한 모델들 중 절반가량이, 타 브랜드 컬렉션 무대의 런웨이 위에도 올라야 하는 상황이다.
아직 시즌을 끝마치지 못했으니, 술은커녕 제대로 된 식사조차 입에 댈 수 없는 처지인 셈 아니던가?
억지로 자리에 나와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바에는, 차라리 이처럼 양해를 구하고 참석하지 않는 것이 효율적인 선택인 것이다.
이내 애슐린이 재승에게 크리스탈 재질의 ‘온 더 락(On the Rocks)’ 잔을 건네주며 나직이 말했다.
“리, 축하해. 그동안 수고 많았어.”
재승이 잔을 받아 들자 이번에는 송 이사가 재승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사장,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이제 갈퀴로 돈 긁어모으는 일 밖에 안 남았다고!”
“계약은 어떻게 됐어요?”
“결정은 유보시켰고, 계약서만 받아뒀어. 참고로 쌓여 있는 계약서만 한 트럭이라고.”
“고생 좀 하시겠네.”
“이런 고생이라면 평생 해도 좋다.”
한차례 키득거려 보인 송 이사가, 재승 몫의 잔을 독한 양주로 꽉 채워주었다.
이내 곳곳에서 잔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 그 자체였다.
다들 별다른 걱정 없이 술을 들이켜 가며, 이번 컬렉션의 성공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빈 병의 개수가 늘고, 몇몇 이들이 취기를 어쩌지 못한 채 고개를 푹푹 떨궈대기 시작하던 무렵.
카이 그린이 살짝 풀린 눈을 한 채 재승에게 다가와서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리, 죄송한데 잠시 일 이야기 좀 꺼내도 될까요? 정신이 없어 미처 보고하지 못한 사항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럼요, 물론입니다. 말씀하세요.”
“다름 아니라, 빌리 반 코퍼레이션(Billy Ban Corporation)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내 재승이 눈썹을 한 번 튕겨 보이고는 되물었다.
“정산 문제라면 이미 해결된 상황 아닌가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한 금액에 퍼포먼스 디렉팅을 맡길 수 있었다.
여타 업체와 비교한다면 훨씬 비싼 편이라지만, 그래도 빌리 반 코퍼레이션의 이름값과 자문으로 투입된 마술사 형대욱의 몸값을 고려해 본다면 나름 저렴한 편이랄 수 있던 것이다.
먼 훗날, 빌리 반 코퍼레이션 측에서 무대 의상 제작을 요청한다면 무조건적으로 수락해 준다는 조건을 내건 덕에 받을 수 있던 ‘특혜 할인’이었다.
또 본래 재승이 ‘금전적 문제는 밍기적거리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자.’는 주의인 터라, 정산까지 깔끔하게 마친 상황이었고 말이다.
이내 카이 그린이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재차 말을 건네왔다.
“빌리 반 코퍼레이션 쪽에서 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비록 ‘패션 디자인’이 공연 예술이 아니라지만 매년 수차례씩 있을 컬렉션 무대를 생각해 본다면, 영입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더군요.”
“예? 그럼…?”
“아마도 리를 빌리 반 코퍼레이션 측 아티스트로 영입하고 싶어 하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디자이너 에이전시와는 아예 다른 규모의 우호적인 조건으로 말입니다.”
이내 재승이 멍한 얼굴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성공적으로 끝마친 꿈의 무대, 함께 그 무대를 준비하고 마친 뒤 웃고 떠들며 술을 들이켜고 있는 동료들, 마지막으로 가슴을 절로 뛰게끔 만드는 새롭고 거대한 비즈니스에 대한 제의까지….
인생에는 ‘곡선’이 존재한다고들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오르막 내지는 내리막에 비유해 보자면….
최고로 가파른 오르막을 내달리는 중이 아닐까?
* * *
[ 프리미엄 브랜드 월 플라워, 파리 패션위크 리서치 3관왕 달성. ‘파리 패션위크를 빛낸 브랜드 순위’, ‘디자이너들이 꼽은 파리 패션위크 최고의 컬렉션.’, ‘셀럽 피플이 뽑은 가장 입고 싶은 브랜드’ 등… 전체 1위 달성. ] [ 신생 프리미엄 브랜드 월 플라워가 이룩해 낸 쾌거, 올해 하반기 12개국 메이저급 백화점 입점 확정. ] [ 디자이너 리(Lee), 빌리 반 코퍼레이션 입성 사실상 확정 단계? 빌리 반 코퍼레이션 측 관계자 曰, “세부적인 조건 조율 중.” ]파리 샤를 드 골 공항 내부에 자리한 VIP 탑승객 전용 라운지.
재승은 전용기 이륙 시간을 기다리는 내내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월 플라워와 관련된 내용의 기사를 훑어보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컬렉션 무대를 선보인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간 상태였다.
어제는 파리 패션위크의 끝을 알리는 폐막식 무대가 진행되었고,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귀국일’이다.
재승이 제 스마트폰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찰나, 송 이사가 기지개를 한 번 켜 보이고는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지시한 대로 귀국 후 스케줄은 전부 다 비워뒀어.”
“고마워요.”
“한국에 들렀다가 바로 떠나는 거지?”
“네, 부모님만 뵙고 바로 움직이려고요.”
중요한 업무를 모두 마쳤으니, 이제 ‘약속된 휴가’를 즐길 차례였다.
한국을 잠시 경유한 뒤 LVMH 그룹의 아르도 회장 소유의 무인도로 이동해, 이 주가량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다가 돌아올 예정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려 보이고는 송 이사에게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그나저나 이사님은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언제 또 쉴 수 있을지도 잘 모르는데, 그러지 마시고 저랑 같이 푹 쉬다가 오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야, 사장. 너랑 나랑 둘 다 쉬면 세계증시에 문제 생긴다니까? 난 됐으니까 푹 쉬다가 와. 정 신경 쓰이면 다녀와서 휴가 내주든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재승이 흐뭇한 투로 답했다.
“그래요, 그럼. 저 다녀온 뒤에 이사님도 한 이 주 정도 푹 쉬고 돌아오시면 되겠네요.”
이죽거리는 투로 “것참, 눈물 나게 고맙네.” 하고 답해 보인 송 이사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재차 말을 이었다.
“돌아올 때 깜짝 놀랄 준비하는 거 잊지 말고.”
“예?”
“그때까지, ‘월 플라워 시계 라인’ 준비 모두 끝내둘 예정이니까 말이야.”
“다 좋으니까 쉬엄쉬엄하세요.”
이내 송 이사가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하여튼, 말만 번지르르하지… 그럼 쉬엄쉬엄 할 수 있을 정도의 일만 시키던가?” 하고 칭얼거려 보였다.
장담컨대, 송 이사는 자신이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뒤 휴가를 지급한다 한들 쉬지 않으려 들 게 분명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송 이사는 시계 라인 준비를 시작한 뒤, 눈빛이 아예 달라졌다.
매일같이 칭얼거리지만 일에 매진하는 것을 즐기는, 모순적인 워커홀릭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재승이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송 이사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 송 이사가 재차 물음을 건넸다.
“그나저나 빌리 반 코퍼레이션은? 얘기 잘 되어가고 있는 거야?”
“휴가 끝난 뒤에 조건 다시 조율해보기로 했어요.”
본래 에이전시를 둘 생각이 없던 재승이었으나, 빌리 반 코퍼레이션 정도 규모의 에이전시라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계약 체결을 위해 양측 다 이래저래 노력하고 있는 중이랄 수 있었다.
“그래, 알아서 잘 하겠지.”
되뇌듯 중얼거려 보인 송 이사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덧붙였다.
“슬슬 일어나자.”
“그래요.”
앞으로 2주,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기간이다.
꽤 긴 편에 속하는 휴가를 다녀오고 나면 또다시 많은 게 바뀌어 있을 것이다.
전 세계 메이저급 백화점에 월 플라워 매장이 들어서게 될 것이고, 유명 편집 샵마다 월 플라워 카테고리가 마련될 것이다.
고개를 몇 번 세차게 내저어 보인 재승이, 송 이사의 뒤를 따라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적어도 휴가 기간 동안 만큼은 일과 관련된 생각을 아예 접어둘 요량이었다.
그래, 편한 마음으로 즐겨보자.
다시 올지, 안 올지 모를 2주짜리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