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12)
블랙 라벨-211화(212/299)
블랙 라벨 211화
212. 파라다이스
아르도 회장과 약속한 ‘휴가’를 보내기 이전에, 재승은 한국에서 이틀 정도 여유 가득한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물론 마음먹은 대로 쉬이 되지는 않았다지만, 머릿속에서 ‘일’이라는 단어를 아예 지워 버린 채 하고 싶은 일들만 하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집 앞 마트에서 구입한 퍼즐을 맞춰보기도 하고, 감자칩을 집어먹으며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죽이거나, 미루고 미루다가 아직도 보지 못한 고전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기도 했다.
문득 답답함이 치솟을 때면 승희와 함께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돌아오기도 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
청담동에 위치한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
TV 프로그램에 종종 얼굴을 내비추곤 하는 모던 한식 분야의 유명 셰프가 직접 관리·담당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인지라, 승희와 마실을 나온 김에 간단히 식사라도 할 겸 방문한 상태였다.
“오빠, 여기 너무 비싼 거 아냐…?”
손에 쥔 메뉴판을 응시하고 있는 승희의 동공이, 겨울철 날카롭게 몰아치는 바람 앞의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내 재승이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답했다.
“오늘만큼은 가격 걱정하지 말고 먹자. 기분 좋은 날이잖아?”
“그래도….”
말끝을 흐려 보인 승희가 제 옆자리에 한가득 쌓여 있는 쇼핑백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함께 청담동 일대의 프리미엄 브랜드 편집 샵을 돌아다니며 구입한 선물들이었다.
“승희야, 정말 괜찮으니까 기분 좋게 밥 먹고 들어가자.”
말을 마친 재승이 능숙하게 주문을 시작했다.
가급적이면 승희가 여태껏 한 번도 맛보지 못했을 만한 독특하거나 특별한 메뉴 위주로 선정했다.
음식 주문을 모두 마친 뒤에는, 와인 대신 알코올이 첨가되지 않은 샴페인을 주문했다.
쨍-.
물보다 살짝 농도가 짙은 샴페인이 잔 안에서 끈적한 궤적을 남기며 넘실댔다.
느긋하게 음식의 맛을 음미해 가며 승희와 일상적인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뭐? 커피숍 아르바이트? 언제부터?”
재승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건넨 질문에, 승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딱 한 달 됐어. 그냥 용돈이라도 직접 벌어서 써볼 겸 해서….”
“차라리 공부에 매진하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시간 남는다고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안 힘들어?”
“그냥 조금? 그래도 재미있어.”
말을 마친 승희가 혀를 살짝 내밀어 보이고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사실 알바비 받은 기념으로, 오빠한테 저녁이라도 사 주고 싶어서 나오자고 한 건데 여긴 너무 비싸네….”
“이야, 이승희. 제법 기특한데? 마음만 받을게. 난 괜찮으니까 어머니·아버지 선물 챙겨 드려. 남은 알바비는 차곡차곡 모아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알뜰하게 잘 쓰고.”
“흥, 벌써 챙겨 드렸거든요?”
말을 마친 재승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돌연 승희의 머리칼을 거세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한차례 “아, 뭐 하는 거야아-!” 하고 짜증스레 말해 보이는 승희였으나, 또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보일 따름이었고 말이다.
짓궂은 장난을 일삼는 오빠와, 칭얼대듯 불만을 표하는 여동생.
겉으로 보기에는 여타 평범한 남매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곧장 귀가 길에 올랐고, 퇴근시간의 강남대로가 으레 그렇듯 꼼짝없이 발을 묶일 수밖에 없었다.
괜히 차량 오디오 플레이리스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찰나. 아무런 말없이 조수석 차창 너머만 바라보고 있던 승희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오빠.”
“응?”
“고마워.”
“뭐가?”
“그냥 오빠 덕분에 엄마도, 아빠도, 나도….”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승희가, 제 입꼬리를 씰룩거려 보이고는 힘겹게 뒷말을 이었다.
“우리 가족, 전부 다 행복해진 것 같아서.”
이내 재승이 승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승희는, 뭐랄까? 대학에 진학한 뒤 애 티를 벗으며 조금 더 완숙한 여인의 느낌을 풍기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외형적인 모습만 무르익은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언제까지고 철없는 여동생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홀로 기특한 생각도 잔뜩 떠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전생에서의 승희는 이맘때쯤에 무얼 하고 있었더라?
아아, 그래. 제과 공장에 취직하여 매일매일을 기계처럼 일하며 보냈었지.
이십 대 청춘을 다 바쳐 일을 하고, 그 돈으로 아버지의 병원비에 일조했었지.
그래, 맞다. 그러고 보면 매일 철없는 척, 맹랑한 척 말하려 애써도 실상은 기특하기 그지없는 속이 꽉 찬 아이였었지….
“오빠, 뭐야? 왜 사람 민망하게 대답도 안 하고….”
“승희야.”
“응?”
“앞으로는 더 행복할 거야.”
말을 마친 재승이 그윽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많은 이들이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고, 돈은 절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줄 수 없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글쎄?
나는 반대의 입장이다. 만약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는 게 규칙이라면, 그 규칙을 깨트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돈을 모으면 그만이다.
뭇 사람들의 말대로 돈으로 인해 파생되는 고민이나 근심·걱정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반대로 돈만 있으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떨어내 버릴 수 있는 고민이나 근심·걱정이 훨씬 많으니까.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더 견고한 성공을, 더욱 거대한 명예를 원한다.
매일매일 현재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더욱 큰 꿈을 꾸는 연습을 한다.
얼마나 큰 꿈이든 이뤄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다.
나는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왔고, 그 사실을 절대 잊지 않으니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들 중 그 무엇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애를 써대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 * *
휴가 셋째 날이 밝았다.
예정대로 움직이기 위해 동이 틀 무렵 잠에서 깨어났고, 준비를 마치기 무섭게 LVMH 그룹 측에서 지원해 준 전용기에 탑승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재승을 반겨준 것은, 다름 아닌 ‘아르도 회장’이었다.
“리(Lee), 여길세-!”
“맙소사, 회장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르도 회장이 자신을 마중하기 위해 직접 한국까지 왔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차려입고 있는 옷들이었다.
노란색 꽃무늬가 잔뜩 수놓아진 하와이안 셔츠에, 통이 큰 탓에 연신 펄럭이는 반바지, 마냥 편해 보이는 샌들슈즈에 이르기까지….
매일 같이 마이스터의 손길이 잔뜩 느껴지는 슈트에,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구두만 신고 있던 그답지 않은 친근한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자네처럼 바쁜 사람을 이틀씩이나 기다리게 한 게, 영 마음에 걸렸던 터라 말이야. 사죄의 의미로 직접 마중 나왔네.”
“기다리다뇨? 아닙니다. 그냥 편히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내다 보니 이틀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기다린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하핫!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로군. 자, 그럼 슬슬 움직이도록 할까?”
아르도 회장의 ‘보잉747’ 여객기에 탑승한 뒤, 샴페인을 나눠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일과 관련된 내용의 대화보다는, 시시콜콜하기 그지없는 사소한 내용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고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일과 관련된 내용의 이야기는 최대한 꺼내지 않으려 의식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승의 얼굴이 취기 탓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아르도 회장이, 비행기 창 너머로 펼쳐진 광활한 하늘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이고는 말했다.
“도착하려면 앞으로 족히 몇 시간은 더 비행해야 할 거야. 잠깐이라도 눈 좀 붙여두는 게 어떻겠나?”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인 재승이 “예, 아무래도 그게 좋겠네요.” 하고 답해 보인 뒤, 제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곤히 잠든 재승의 손끝이 살짝 늘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전용기는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나아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바다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아르도 회장의 섬을 향해서….
* * *
비행기가 착륙한 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내려서던 찰나.
“와아….”
재승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 보이고 말았다.
바람 탓에 잔잔히 일렁이고 있는 에메랄드빛 수면 위, 해질녘 노을이 한바탕 떨어져서는 조각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묘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온 재승이 모래사장에 첫발을 내딛던 찰나, ‘관리인’인 듯 보이는 중년 남성이 재승을 반겨주었다.
“리(Lee),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회장님은….”
말끝을 흐려 보인 관리인이 고개를 치켜든 채, 재승의 등 뒤편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도 회장이 기지개를 켜 보이며 모습을 드러내자 관리인이 재차 고조된 투로 말했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래, 그간 잘 지냈나?”
“그럼요, 물론이지요.”
이내 관리인이 옆에 정차되어 있던 차량에, 재승과 아르도 회장의 짐을 손수 실어주기 시작했다.
오프로드 주행에 특화되어 있는 패셔너블한 아메리칸 SUV 차량이었다.
두 사람이 뒷자리에 오르자, 차량이 달달거리는 소리를 내가며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그나저나 차량을 타고 이동해야 할 정도로 거리가 있는 편인 겁니까?”
“걸어가기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라서 말이야. 차량으로 족히 20분 정도는 달려야 하네.”
“아무래도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섬인가 보군요.”
말을 마친 재승이 차창 너머로 보이는 야자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던 찰나, 한차례 호탕한 미소를 지어 보인 아르도 회장이 자랑스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 인근에 보유하고 있는 섬은 총 세 개야. 섬끼리 이동할 때는 선박을 이용해야 하네. 또 원활한 관리를 위해 한 개의 섬당, 여서 일곱 명가량의 관리직원을 붙여두었지.”
“굉장하군요. 관리 명목으로 발생하는 지출만 하더라도, 상상 이상일 것 같습니다.”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아르도 회장은 이곳 외에도 세계 방방곡곡에 자신만의 특별한 사유지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재력이 어찌나 대단한 지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동안 모래사장 바깥쪽으로 난, 비교적 평평한 길을 달리던 차량이 잠시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이내 관리인이 차량 룸미러를 통해 재승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저곳이 ‘리’(Lee)의 프로젝트를 위한 장소입니다. 인접해 있는 세 개의 섬들 중, 가장 풍광이 좋은 곳이죠.”
이내 아르도 회장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물었다.
“내려서 한 번 살펴보겠나?”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차량에서 내려선 뒤, 관리인이 건네준 망원경으로 저 멀리 떨어진 섬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꽤 멀어 보이지만 요트를 타고 10분 정도만 나아가면 닿을 수 있습니다. 우선 저녁 식사부터 마치신 뒤에, 한 번 간단히 둘러보고 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재승이 관리인의 설명을 집중해서 듣고 있던 찰나, 아르도 회장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불쑥 끼어들었다.
“리, 부디 자네 계획이 무사히 성사 됐으면 좋겠군. 만약 자네 계획이 무사히 매듭지어진다면… 나는 이곳 섬들을 ‘관광지’로 전향시켜 버릴 생각이네.”
“흠,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 당장 관광지로 전향시켜도, 일절 손색이 없는 곳인 것 같은데요?”
“아냐, 아냐. 상징성이 부족해. 그래서 더더욱 자네 계획이 무사히 완료 되었으면 좋겠군. 그래야 ‘세계적인 디자이너 리가, 탑 모델 애슐린에게 결혼 프러포즈를 한 곳’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달고 홍보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이 호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이다.
내일, 애슐린이 섬에 도착하고 나면….
“후우….”
한차례 숨을 길게 내쉬어 보인 재승이, 마냥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저 멀리 떨어진 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멀리 해안에서 불어온 바람이 피부에 닿는다. 약간의 짠 내와, 익숙하지 않은 풀 향기가 뒤섞인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