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13)
블랙 라벨-212화(213/299)
블랙 라벨 212화
213. 파라다이스 (2)
아르도 회장 소유의 섬, 중앙부 인근에 위치한 저택은 가히 경이롭다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한차례 “와….” 하고 감탄을 뱉어 보인 재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저택 내부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주기 시작했다.
“저택 내부에 있는 물건들 중 마이스터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물건이라곤 단 한 개도 없을 걸세.”
이내 재승이 제 고개를 끄덕여 가며 “예, 그런 것 같네요.” 하고 답해 보였다.
모르긴 모르더라도,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유명 목수가 최고급 원목을 사용하여 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억 원에 달하는 가격표를 달고 출시되는 가구들.
족히 수십 번의 공정을 거쳐 제작한 가죽을 이용하여 만든 소파.
예술 작품이라 칭하기에 일절 손색이 없어 보이는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심지어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이나 쿠션 커버마저도 모두 프리미엄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는 상태였다.
“빈방이 많으니 아무 곳이나 골라서 이용하면 될 것 같군. 묵게 될 방을 고르고 나면 ‘필립’에게 전달해 주고.”
필립.
아르도 회장의 섬에서 일하고 있는 16명의 직원들 중, 가장 높은 직급을 차지하고 있는 중년 남성의 이름이었다.
전용기가 착륙하던 때, 아메리칸 SUV 차량을 타고 자신과 아르도 회장을 직접 마중 나왔던 중년 사내 말이다.
“흠, ‘오션 뷰(Ocean View)’ 객실이 있을까요?”
제 콧잔등을 문질러 가며 “그럼.” 하고 답해 보인 아르도 회장이 곧장 덧붙였다.
“이 저택 내에 마련된 방들 중,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방은 단 한 곳도 없네.”
* * *
“와우.”
섬에 머무르는 동안 지내게 될 객실 역시 만족스러웠다.
통유리로 된 벽면 너머로, 석양 탓에 불그스름해진 에메랄드빛 수평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으니 말이다.
호텔 펜트하우스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웬만한 오성급 호텔의 객실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여행가방 한 개에 꾹꾹 눌러 담아 온 짐을 대충 풀어놓은 뒤, 곧장 저택 1층에 자리한 ‘연회장’으로 향했다.
아르도 회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특급 셰프가 저녁 식사를 조리하는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보았다.
그다음에는 함께 허기를 달래며, 점잖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패션계의 동향이나 추후의 흐름, 또 근래 감상한 예술 작품이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재승은 아르도 회장이 갖추고 있는 지식의 깊이 탓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자본을 무기로 삼은 경영자가 아니라, 조예 깊은 아티스트라 해도 믿을 지경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갖추고 있던 탓이었다.
대화를 마친 뒤에는 저택 2층에 위치한 ‘영화감상실’로 향했다.
“와, 이 DVD들 전부 다 볼 수 있는 거예요?”
족히 수만 편은 되어 보이는 DVD들이, 연도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개중에는 아무리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고전영화들의 DVD마저 섞여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그럼, 얼마든지.”
몰랐던 사실을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니라, 아르도 회장이 놀라운 로맨스 영화광이라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한 병에 한화 천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과, 송로버섯 가루가 흩뿌려진 짭조름한 감자칩을 맛보며 연달아 몇 편의 로맨스 영화를 시청해야만 했고 말이다.
이를 테면 ‘카사블랑카’라든지, ‘로마의 휴일’ 등의 고전영화를 시작으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이터널 션샤인’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영화를 모두 시청하고 나니, 동이 틀 무렵이 다 되어 있는 상태였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보인 아르도 회장이, 제 눈가를 살살 문질러 가며 말했다.
“내일의 일정을 위해 오늘은 이만 이별하는 게 좋겠군.”
섬에서의 첫째 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 * *
둘째 날,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재승이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저택 1층에 모습을 드러내던 찰나.
관리인 ‘필립’이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속삭이듯 말했다.
“리(Lee),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재승이 돌연 제 가슴팍에 한 손을 얹어 보였다.
필립이 말하는 ‘물건’이 무엇을 지칭하는 말인지를 단박에 꿰뚫을 수 있던 탓이었다.
필립이 재승에게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자그마한 크기의 보석함이었다.
재승이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로 보석함을 열어 보이던 찰나.
*소더비즈(*Sotheby’s: 미국의 경매 전문 기업)를 통해 슈퍼카 브랜드의 자동차 몇 대와 맞먹는 가격에 낙찰받은, ‘옐로우 다이아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면 오늘 저녁 중, 애슐린의 손가락에 끼워지게 될 반지가 예정대로 도착한 것이다.
“맙소사, 정말 아름답군요….”
“전부 잘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오후 일정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호텔 조식과 흡사한 느낌의 스크램블 에그, 구운 빵 등으로 간단히 허기를 달랜 뒤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돌며 이런저런 음악을 감상하다가, 아르도 회장을 따라 낚싯대를 던져보기도 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오후 무렵의 나른함을 만끽하는 데 보탬이 되는 따사로운 햇빛,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올 때가 아니라면 좀처럼 일렁이지 않는 해수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
저도 모르게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던 재승이 깨어난 것은, 아르도 회장의 고조된 목소리 탓이었다.
“리, 정신 차려! 지금 막 애슐린이 도착했다는군!”
누군가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는 말이었다.
괜히 “뭐라고요?” 하고 되물을 새도 없이, 곧장 낚싯대를 거두어들였다.
요트는 물살을 가르며 다시금 섬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연습하고, 상상했던 상황이 직면해 있다.
재승이 애꿎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던 찰나, 아르도 회장이 재승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른 채 말했다.
“리도 별거 없군. 뉴욕 타임즈 다음 발행호의 한쪽 면에 자네 이야기가 실릴 거야.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대로, 프러포즈를 앞두고 겁먹은 고양이처럼 부르르 떨어댔던 자네 이야기를 잔뜩 과장해서 떠들고 다닐 생각이거든.”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이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재승은 여전이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좋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서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다고요….
* * *
요트에서 내려선 뒤, 아르도 회장과 걸음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떠올리지도 못한 채 마냥 급하게 움직였다.
심지어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내내, ‘어떤 말로 인사를 건네야 자연스러워 보일까?’ 하는 되도 않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까지 할 따름이었다.
“제기랄.”
저택 앞에 다다른 재승이 제 가슴팍을 한 번 쓸어내려 보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1층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필립이, 제 안경을 협탁에 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오셨군요.”
“필립, 애슐린은요?”
“2층 객실에 계실 겁니다.”
말을 마친 필립이 한차례 그윽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리가 사용하고 계신 객실의 바로 옆방에요.” 하고 덧붙였다.
한차례 감사를 표해 보인 재승이 거의 뛰어가다시피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필립이 재승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리, 떨리시겠지만 저녁까지는 참으셔야 합니다! 어제 보여 드렸던 섬의 해안가에서 사랑을 고백하신다면, 절대 실패하실 일이 없으실 거예요!”
이내 재승이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나직이 답했다.
“조언 고마워요, 필립.”
“별말씀을.”
금세 2층에 다다른 재승이 곧장 애슐린이 짐을 풀어놓고 있을 객실을 향해 다가갔다.
문을 몇 번 두드린 뒤, 곧장 문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애슐린, 나야. 들어갈게.”
말을 마침과 동시에, 문을 활짝 열어보이던 찰나.
김이 빠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넓은 객실 안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애슐린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던 탓이었다.
이내 재승이 안쪽으로 들어선 뒤, 널찍한 매트리스 위를 살펴보았다.
활짝 열린 캐리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짐을 풀어놓다가, 급히 어딘가로 움직인 듯 보일 따름이었다.
왜일까? 가슴 깊숙한 곳에서 기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객실 내에 비치된 욕실 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구역질’을 하는 것만 같은, 그런 소리였다.
이내 재승이 “애슐린…?” 하고 작게 되뇌어 보인 뒤, 욕실 문을 서서히 열어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욕실 내부 전경이 훤히 드러나던 찰나.
“맙소사.”
재승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애슐린이 욕실 변기를 붙잡은 채, 쓰러져 있던 탓이었다.
재승이 다급하게 그런 그녀의 곁에 주저앉은 채, 반복해서 이름을 불러대자 애슐린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의료진을 불러 올게.”
“정말 괜찮아. 단순한 ‘*아노렉시아(*Anorexia: 섭식장애)’증상일 뿐이야.”
구토감이 끊기질 않고 계속된 탓에, ‘탈진’과 흡사한 상태에 접어들게 된 것뿐이라는 게 애슐린의 설명이었다.
또 처방받은 약을 꾸준히 먹다 보면 괜찮아지리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물론 그 정도 설명만으로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이 진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재승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되물었다.
“거식증? 언제부터? 어째서 말해주지 않은 거야?”
“지난 시즌 초기부터.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
말을 마친 애슐린이 고개를 축 늘어트린 채, 재차 덧붙였다.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리는 늘 정신없고 바빴잖아. 가뜩이나 힘들 텐데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뿐이야.”
재승이 착잡함을 숨기지 못한 채, 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던 찰나.
“리, 기왕이면 못 본 걸로 해줬으면 좋겠어.”
“어떻게 그래?”
“어려워도 그렇게 해줘. 리한테는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단 말이야.”
이내 애슐린이 변기를 짚은 채, 힘겹게 일어서며 덧붙였다.
“그냥 리가 자세히 모르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뿐일걸? 정말 별거 아냐. 이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한두 번쯤은 앓게 되는 병이나 마찬가지야.”
재승이 “애슐린….” 하고 나직이 말을 끊자, 애슐린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쳐 보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내가 알고 지내는, 혹은 경쟁 관계에 있는 모두가 앓고 있는….”
그때, 재승이 애슐린의 한쪽 손목을 살짝 움켜쥐었다.
다름 아니라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던 탓이었다.
이내 재승이 날카롭기 그지없는 투로 되물었다.
“그럼 수전증은? 언제부터 앓고 있던 건데?”
“이건….”
재승 역시 모델들의 섭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디자이너와 모델. 악어와 악어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들인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아니, 현역 모델이 아니라면 모를 수밖에 없는 은밀한 영역의 일들까지도 꿰고 있다.
애슐린의 말처럼 섭식장애를 앓는 모델들의 수는 수두룩하기 그지없다.
그저 그 대상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던 것일 뿐.
하지만, 수전증은?
화학적 방법을 동원해 체중을 감량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를 테면 주사를 이용해 천식 치료제인 에페드린을 몸에 억지로 주입시키거나, 클랜 등의 경구제를 복용하게 되면 부작용 중 하나인 것이다.
모델들 중 태반이 잘못된 방법의 경쟁을 자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섭식장애를 강요당하고, 잘못된 약물 복용을 강요당하고 있다. 물론, 애슐린마저도 그 범주에 속해 있다.
이내 재승이 날카로운 투로 말했다.
“이대로도 정말 괜찮다면, 그리고 정말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절대 말리지 않을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그간 모델로 활동하며 이미 건강을 많이 잃었으리란 거겠지.”
“…….”
“애슐린, 사실은 말이야. 오늘 밤에 끝내주는 곳에서 청혼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아무래도 그때까지 미룰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래서 그냥 지금 말하려고.”
잠시간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애슐린이 마냥 멍한 얼굴로 재승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찰나.
재승이 한차례 심호흡을 해보이고는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랑 결혼해 줬으면 좋겠어. 만약 지금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의향도 있어. 하지만, 혹시라도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한다면. 또 지금의 생활이 사실은 많이 힘들고 무서운 거라면….”
“그렇다면?”
“내 청혼을 승낙해 줘. 비록 당신이 모델로서 꿈꾸던 커리어 어딘가에 결혼이란 변수는 없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힘들 때든 기쁠 때든 내가 항상 당신 곁에 있을 거니깐 기대도 돼.”
이내 재승이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손을 도로 빼냈다.
반지가 들어 있는 보석함을 제 객실 침대 옆, 서랍장 안에 넣어두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탓이었다.
장소도, 멘트도, 심지어 준비해 둔 선물마저도….
모든 게 예상했던 것과, 준비해 둔 것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내 애슐린이 제 얼굴을 감싸 쥔 채, 흐느끼듯 애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리,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럼…?”
“나 실은, 혼자 너무 무섭고 두려웠어.”
말을 마친 애슐린이 제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한 번 훔쳐낸 뒤, 재승의 품에 기대듯 안겼다.
재승은 그런 애슐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명백하기 그지없는 승낙의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