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14)
블랙 라벨-213화(214/299)
블랙 라벨 213화
214. VS Imitation
“두 사람, 함께 느긋한 시간 보내는 것도 간만일 텐데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네. 시간이 맞거든, 저녁 식사나 함께하자고.”
재승이 멋쩍은 표정을 한 채 “죄송합니다.” 하고 답하자, 필립이 끼어들어서는 잔뜩 너스레를 떨어댔다.
“하하! 리, 괜찮습니다. 회장님은 제가 보필할 테니, 부디 애슐린과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군요.”
말을 마친 필립이 재승의 귓가에 대고 재차 속삭였다.
“부디 좋은 결과 거두셨으면 좋겠군요. 그러니까, ‘프러포즈’ 말입니다.”
필립을 포함한 모두가, 사실은 재승이 애슐린에게 이미 프러포즈를 했고 승낙까지 받아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재승이 무어라 해명의 말을 늘어놓으려던 찰나. 아르도 회장이 재승을 바라보며 윙크를 한 번 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요트 위에 올랐고, 필립은 조종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모터가 굉음을 내기 시작함과 동시에, 요트가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내 덩그러니 남겨진 재승이, 제 곁에 서 있는 애슐린을 돌아보며 나긋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했다.
“애슐린, 우리도 휴가 기분 좀 내볼까?”
“좋아.”
재승과 애슐린 역시, 직원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요트를 타고 인근에 위치한 무인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본래 프러포즈 장소로 물색해 두었던 풍광이 가장 좋은 섬 말이다. 헤네시사의 리차드급 코냑과, 간단한 안주거리가 담겨 있는 아이스박스를 챙기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요트가 해변에 정박한 뒤, 직원이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덤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리,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 두 분을 다시 모시러 오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훌륭한 곳인지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행여나 마음이 바뀌어 조금 더 이르게 돌아오고 싶어지신다면 제 개인번호로 전화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우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 곧장 에메랄드빛 바다에 몸을 던져 넣었다.
원 없이 수영을 즐긴 뒤에는 곧장 해변으로 돌아와, 비치타월로 몸을 감싼 채 코냑을 나눠 마시며 치즈를 곁들였다.
독하기 그지없는 코냑 한 병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재승이 보석함 한 개를 내밀며 말문을 열었다.
“애슐린, 받아.”
“이게 뭐야?”
이내 재승이 멋쩍은 듯 제 콧잔등을 살살 문질러 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래 이곳에서 멋들어지게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어. 그 반지를 끼워주면서 말이야.”
재승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한차례 “흠?” 하고 중얼거려 보인 애슐린이 제 기다란 손가락으로 보석함을 가볍게 열어보였다.
살짝 열린 뚜껑 틈새로 소더비 사를 통해 낙찰받은 고가의 옐로우 다이아 반지가 영롱한 빛을 뿜어대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몽롱한 눈을 한 채 옐로우 다이아 반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애슐린이, 팔꿈치로 재승의 옆구리를 ‘콕, 콕.’ 찔러가며 재차 물었다.
“리(Lee), 그럼 이 반지를 끼워주면서 청혼하려고 했던 거야?”
“응. 원래 계획은 그랬지.”
“굉장히 낭만적인데? 원래는 어떤 멘트로 프러포즈하려고 했던 건데?”
“그만 놀리는 게 좋을걸?”
“놀리다니? 궁금해서 그래. 생각해 둔 멘트가 있었을 거 아냐?”
재승이 아무런 답 없이 애슐린을 쏘아보자, 애슐린이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알겠어, 알겠어.” 하고 타이르듯 중얼댔다.
이내 재승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런 애슐린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저 아무런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만끽하며, 주변의 풍광을 둘러보기만 할 뿐이었다.
모든 게 아름다웠다. 붉은 노을빛을 머금은 채 빛나고 있는 드넓은 해변의 모래알과, 잔잔히 일렁이는 해수면.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쉬면 기분 좋은 향이 코를 자극했다.
애슐린의 향수 냄새, 바닷바람 속에 섞여 있는 은은한 짠 내, 협죽도와 유칼립투스 잎 특유의 향에 이르기까지….
재승이 고개를 돌려서는 애슐린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시선을 의식한 애슐린 역시 그런 재승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말이다.
그렇게 사뭇 끈적한 느낌의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애슐린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다급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리, 잠깐만. 여긴 야외야. 더군다나 언제 누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곳이고….”
“아니, 괜찮아.”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애슐린의 등허리를 확 휘어 감았다.
이내 애슐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다시금 고조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잠깐만!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행여나 누가 보기라도 하면….”
“여긴 상주하는 관리인이 한 명도 없는 섬이거든. 두 시간 뒤에 요트를 몰고, 우릴 데릴러 올 직원 말고는 아무도 우릴 방해할 수 없다고.”
이내 애슐린이 제 눈을 지그시 감아보였고, 재승은 그런 애슐린에게 자연스레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춤과 동시에 그녀의 입술에 맴돌고 있는 코냑 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은은한 알코올의 향. 그 향은 취기를 더욱 자극했고,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을 더욱 빠르게 말소시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 미적지근하게 식어 버린 모래알이 달라붙어댔다.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나방도, 나비로 보일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 * *
“축하하네!”
아르도 회장이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건넨 말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심스레 프러포즈에 대한 승낙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기 무섭게,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독한 양주가 잔뜩 담겨 있는 온 더 락 잔을 단숨에 비워내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며 말을 이었다.
“내년부터는 이곳을 관광지로 개방해야겠어. 담당자는 필립이 좋겠군.”
그 말에 식탁 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던 필립이 화색을 해 보이며, “리와 애슐린 덕분에 승진 아닌 승진을 하게 되었군요.” 하고 답해 보였다.
이내 재승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엷게 떨리는 투로 되물었다.
“잠깐, 잠깐만요. 그냥 농담이었던 거 아니에요?”
한차례 “리.”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해 보인 아르도 회장이, 잘 구워진 연어 스테이크에 제 포크를 푹 찔러 넣으며 말을 이었다.
“난 돈과 관련된 농담은 절대 하지 않아.”
“뭐, 나쁘지는 않네요.”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축하하네.”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이 다시금 빈 잔을 집어 들었다.
이내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그런 아르도 회장의 잔을 꽉 채워주었고 말이다.
쨍-.
허공에서 연신 잔이 부딪혔다. 잔뜩 신이 난 아르도 회장은 잔이 부딪힐 때마다 새로운 건배사를 선창해 주었다.
자리가 끝맺어진 것은 아르도 회장이 취기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궈 버렸을 무렵의 일이었다.
한차례 “이런….” 하고 중얼거려 보인 필립이 아르도 회장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재승에게 나직이 말했다.
“저는 회장님을 모시고 먼저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저희 직원에게….”
“아닙니다. 저희도 내일을 위해 슬슬 올라가보려던 참이었거든요.”
말을 마친 재승이 애슐린을 돌아보자, 애슐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그렇게 다들 저택 2층으로 이동하려던 찰나. 잔뜩 취한 아르도 회장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재승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리, 잠깐 가까이 와 주겠나?”
“네. 회장님.”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아르도 회장의 지척에 다가섰을 무렵.
아르도 회장이 재승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준 뒤, 반쯤 꼬여 있는 혀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결혼을 축하하네. 그래서 말인데, 결혼 선배로서 자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어서 말이야.”
“네, 새겨듣겠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법은 간단하네. 매일매일이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살도록 하게.”
한차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아르도 회장이 재차 덧붙였다.
“오늘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 어찌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낼 수 있겠나? 늘 그렇듯 이별은 예고를 해주지 않아. 느닷없이 찾아와서 감내할 수 없는 슬픔을 잔뜩 안겨주곤 하지. 그런 이별 앞에서는 모든 게 무의미해지게 마련이야. 돈도, 명예도, 전부 다 말일세.”
뭐랄까? 많은 감정이 느껴지는, 또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만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고 해야 할까?
일순 아르도 회장의 두 눈 위에 서렸던 정체 모를 기색 탓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승이 마냥 진중한 투로 “조언 감사합니다.” 하고 답하자, 아르도 회장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필립에게 말했다.
“필립, 추태를 부려서 미안하군. 침실까지만 함께 가줄 수 있겠나?”
“그럼요, 물론입니다.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먼저 계단을 올라간 뒤, 재승이 애슐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애슐린, 먼저 올라가 있을래?”
“응? 왜?”
“담배 한 개비만 피우고 올라가려고.”
애슐린은 팔짱을 낀 채 한참을 노려보다가, “알겠어.” 하고 답했다.
이내 재승이 저택 바깥으로 빠져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둠이 내리 앉자, 낮에는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던 해수면이 흐릿하게 형태만 보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매캐한 연기를 몇 번 연달아 내뿜었을 무렵. 등 뒤편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얇은 외투라도 걸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밤바람이 생각보다 날카롭거든요.”
“네, 앞으로는 그래야겠네요.”
한차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필립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묵묵히 담배만 피워대기를 잠시.
필립이 먼저 말문을 여는 것으로, 두 사람 사이에 내리앉아 있던 침묵을 깨보였다.
“리, 회장님께서 올라가시기 직전에 해주신 말씀 말입니다만….”
“네.”
“분명 큰 도움이 될 조언일 겁니다.”
말을 마친 필립이 “회장님의 경험이 담긴 조언이니까요.” 하고 덧붙였다.
“경험이요?”
“네.”
짤막하게 답해 보인 필립이 저 멀리 해수면을 바라보며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매년 휴가 때마다 회장님과 사모님을 함께 모셨습니다. 사모님은 아름답고 현명한 분이셨고, 회장님은 대단한 애처가였어요.”
모든 말이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한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혹시, ‘사별’(死別)하신 건가요?”
필립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해 보일 뿐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치켜 올려서는 저택 3층의 불이 켜진 방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아르도 회장이 사용하고 있는 객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르도 회장의 휴가 속에는 거부들의 여가 생활에 꼭 껴있어야 하는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여자.
선상파티, 낚시, 술, 영화, 음악. 모든 게 다 존재했지만, 여색을 즐기는 모습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있는 이 섬에,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였다.
역시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아르도 회장이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 들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하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객실로 돌아온 뒤, 샤워를 하기 전에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송 이사’에게 말이다.
재승이 객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스마트폰부터 집 어들자, 애슐린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설마 여기서도 비즈니스를 해결할 생각인 거야?”
“송 이사님께 결혼 소식을 전해 드리려는 것뿐이야.”
“정말?”
“그럼, 물론이지.”
뭐. 겸사겸사 일 이야기도 할 생각이지만.
그렇게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은 짜증이 섞여 있는 것 같은, 날이 서 있는 송 이사의 목소리가 말이다.
– 것참, 휴가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화야?
“보고 싶어서요.”
– 뭐? 징그럽게 왜 이래? 용건이나 말 해.
“혹시 월 플라워 ‘*이미테이션(*Imitation: 가품)’도 돌고 있는 중인가요?”
이내 송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말도 마. 컬렉션 공개되고 나면 20분 만에 가품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잖아? 동대문 쪽 시찰 나갔다가 뒤집어질 뻔했다. 아마 우리가 이번에 찍어낸 물량보다, 돌고 있는 이미테이션 물량이 훨씬 많을걸?
“그럼 혹시 그중에 저희 디자인이 아닌, 제품들도 있어요?”
– 그야 당연하지. 그냥 우리 로고만 박아 놓은 디자인들도 수두룩해. 그나저나 이미테이션은 왜? 단체로 묶어서 소송이라도 걸 생각인 거야? 찾는 거야 어렵지 않을 거야. 도매 업체부터 꼬리 물기 식으로 천천히 파고들다 보면….
송 이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재승이 “아뇨, 그냥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서요.” 하고 말을 끊어 보인 뒤 재차 덧붙였다.
“아, 그리고 말인데 저 결혼해요.”
– 뭐?
“그렇게 됐어요. 말하자면 기니까, 휴가부터 끝내고 나서 말씀 드릴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잠깐, 잠깐만!” 하는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으나, 재승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통화종료 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다름 아니라, 곁에 선 채 자신을 뚫어지라 쏘아보고 있는 애슐린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