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26)
블랙 라벨-225화(226/299)
블랙 라벨 225화
226. 내가 졸부라고? (3)
“어차피 저녁 식사 석상에서 다시 보게 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자리를 뜨기 전에 얼굴 도장이라도 한 번 찍어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어떻게 하겠나?”
경매 행사가 종료됨과 동시에 아르도 회장이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건네 온 말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내저어 보이고는 답했다.
“아뇨.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네요.”
흥미롭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아르도 회장이, 제 턱을 살살 쓸어가며 되물었다.
“이유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재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외투를 챙겨 입으며 나긋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연회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 중 태반이 시계 부호들과 안면을 터두겠다는 일념 하나로 방문한 이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찾아가봐야 여타 승냥이들과 동류라는 인식밖에 심어두지 못할 겁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저녁 식사 석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텐데, 굳이 조급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 웃음을 흘려 보인 아르도 회장이 제 외투를 챙겨들며 답했다.
“아주 훌륭한 선택이야. 시간이 꽤 남았으니 느긋하게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때를 엿보자고.”
연회장을 나서기 직전, 시계 부호들이 서 있는 부근을 한 번 힐끔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승냥이 떼들이 잔뜩 꼬여 있는 상태였고, 그들은 자본주의의 미소를 머금은 채 시답지 않은 인사말에 일일이 화답해 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는 곧장 연회장을 나섰다. 더 이상 머물러 봐야 득이 될 리 없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이미 마지막 경매품을 낙찰받는 것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은 것까지는 아니라지만 일말의 호기심 정도는 불러오는 데 성공했음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 * *
다음 행선지는 호텔 인근에 위치한 커피숍이었다.
연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테라스 쪽 테이블을 꿰차고 앉은 채,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기를 잠시.
아르도 회장이 제 와이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어, 느슨하게끔 만들어 보이고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 의외였네. 자네가 순간적인 결정에 의해, 리미티드 에디션 제품을 낙찰받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거든.”
메인스트림 마켓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타 디자이너들과 달리, 사치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재승이 아니던가?
그는 재승이 큰 효용가치가 엿보이지 않는 한정판 시계 따위를, 수십억 원에 낙찰받은 것이 영 얼떨떨하게만 느껴지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이내 재승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어차피 저를 졸부 정도로 보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괜찮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졸부로 보여지는 게 낫지 않겠어요?”
“크하핫! 그래서 시계를 낙찰받았다는 겐가?”
“일말의 호기심이라도 불러왔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순조로운 비즈니스를 위한 투자로, 450만 달러는 전혀 아깝지 않은 것 같네요.”
말을 마친 재승이 경매장을 나서기 직전 대행사 측 직원으로부터 건네받은 카탈로그를 한 번 훑어보았다.
시계는 보름 이내에 항공편을 통해 한국 집으로 배송될 예정이었다.
수취인은 아버지.
전 세계에 오직 12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리치몬트 그룹의 모든 기술이 집약된 리미티드 에디션 시계와 가장 잘 어울리시는 분께 선물로 지급될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떤 계획을 세워둔 겐가?”
아르도 회장의 질문에 재승이 손에 쥔 컵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번 해볼까 해요.”
이내 아르도 회장이 호기심으로 반들거리는 눈을 한 채 재승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승이 제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설명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아르도 회장의 표정은 점차 환해질 따름이었다.
이윽고, 재승의 설명이 모두 끝맺어지던 무렵.
아르도 회장이 한차례 박장대소를 해 보이고는 덧붙였다.
“크하하하! 오직 자네만 떠올릴 수 있는 대범하고 괘씸한 제안이로군!”
* * *
재승의 말에 아르도 회장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봐야 기분 내기 좋은 가격대와 시설이 갖춰진 레스토랑에서 만나리라고 예상했었으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약속 장소로 선정된 곳은 다름 아닌, 시계 부호들 중 한 명인 ‘장 클로드(Jean-Claude)’의 개인 저택이었던 것이다.
널찍하기 그지없는 복도를 따라 값비싼 예술 작품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작품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내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택인지, 박물관인지 구별이 안 될 지경인데요? 샹들리에 좀 보시겠어요? 오래 쳐다봤다간 실명하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재승이 장난스레 건넨 말에 아르도 회장이 한차례 콧방귀를 뀌어 보이고는 퉁명스레 답했다.
“전시품들이며, 가구들이며 모조리 세금 회피를 목적으로 사들인 물건들이겠지.”
“그런가요?”
“암, 그렇고말고. 알고 지내는 부호들 중 태반이 예술에 있어서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이네. 클로드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야.”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이 재승의 귓가에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이듯 말했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라면, 자네 같은 아티스트들을 고작 ‘졸부’ 정도로 취급할 수 있겠나?”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큼지막한 문 앞에 당도한 상태였다.
이내 안내를 돕던 직원이 정중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내 재승이 묵례로 화답해 보인 뒤, 문손잡이를 조심스레 움켜쥔 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문 틈 사이로, 문 너머가 언뜻언뜻 엿보이기 시작하던 찰나.
“오랜만이군요.”
기다란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노신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르도 회장을 반겨주었다.
유명 매거진, TV뉴스 등을 통해 몇 번이고 봐왔던 인물이었다.
까르티에, 몽블로, LWC, 바쉐론, 피이제, 파네라, 앱솔 르쿨르트, 클리프 아펠 등. 유명 시계 브랜드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리치몬트 그룹의 주인 ‘요한 루퍼(Johann Ruper)’ 회장이었다.
시계 부호 순위를 꼽을 때면 빠짐없이 1순위에 등재되곤 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여태껏 무수히 많은 인사들을 만나왔다지만, 실제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 실감나지 않는 듯했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그와 가볍게 포옹을 나누며 가벼운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우선 앉으시죠.”
말을 마친 요한 루퍼 회장이 재승을 힐끔 바라보고는 나긋한, 하지만 알 수 없는 의미가 내제되어 있는 투로 말을 건네 왔다.
“저희 프리미엄 에디션을 낙찰받으신 귀빈분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귀빈.
그 이상으로는 보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인가 싶었던 터라, 재승의 미간이 일순 움찔거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아직은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출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새어 나오려는 감정을 꾹 눌러 담았다.
한차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능청스레 화답했다.
“절제력을 말소시킬 정도로 훌륭한 시계더군요.”
“과찬 감사합니다. 귀빈께서도 우선 앉으시죠.”
아르도 회장이 귀띔해 준 대로, 자신을 졸부쯤으로 여기고 있단 사실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하다못해 배정해 준 자리만 놓고 보더라도 그랬다.
아르도 회장은 안내에 따라 중간쯤에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착석했고, 재승은 테이블 끄트머리 말석쯤의 빈자리를 꿰차고 앉아야 했다.
이내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간파해 낸 재승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려 보이고 말았다.
‘설마 재력 순서에 따라 자리를 배정한 건가?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군….’
공신력 있는 여러 매거진에서 선별한 재력 순위에 따라 자리를 배정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정작 이곳 저택의 주인 격인 장 클로드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로 밀려나 있었고, 늘 1위로 손꼽히곤 하는 리치몬트가의 요한 루퍼 회장이 상석을 꿰차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중단되었던 저녁 식사가 속개되었고 아르도 회장은 별다른 위화감 없이 자리에 섞여들었다.
그렇게 식사가 진행되는 내내, 살가운 태도로 재승에게 먼저 말을 붙여오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요한 루퍼 회장이 냅킨을 집어 들어서는 제 입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식사 자리가 끝났음을 알리는 암묵적인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이내 재승이 제 앞에 놓인 물 컵을 집어 들어서는, 물 몇 모금을 들이켰다.
자리가 끝나기 전에 본론을 꺼내야 한다.
더군다나 여러 정황을 토대로 유추해 보건대,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결심을 내린 재승이 말문을 열려던 찰나.
장내에 집결해 있는 이들 중 최고 권력자랄 수 있는 요한 루퍼 회장이 먼저 대뜸 말문을 열었다.
“리(Lee)라고 하셨죠?”
“예. 회장님.”
“프리미엄 브랜드의 오너 디자이너라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아르도 회장님이 아니었더라면 참석을 불허했을 겁니다. 보시다시피, 프리미엄 브랜드의 오너 디자이너가 참석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니까요.”
조곤조곤한 투로 건넨 말이라지만, 날이 서 있고 뼈가 담겨 있다.
이내 재승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주변을 한 번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좌중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 속에는 비슷한 의문이 담겨 있다.
마치 ‘네가 대체 여길 왜 왔어?’라고 묻는 것만 같은 노골적인 괄시가 담겨 있는 비릿한 눈빛들.
이내 재승이 최대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써가며 나긋한 투로 답했다.
“예, 회장님. 참석을 허용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위스키 병을 집어든 뒤, 제 잔에 콸콸 따라 넣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도수 높은 술이 식도를 따라 흘러 들어오자 불쾌함 탓에 터질 듯 뛰어대던 심장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는 듯 느껴졌다.
후, 하고 숨을 몰아쉬자 후끈한 숨결이 잔뜩 새어 나왔다.
자, 이제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오만한 늙은이들에게 처지를 각인시켜줄 시간이다.
이내 재승이 그들을 천천히 한 번 둘러보고는 덤덤한 투로 물음을 건넸다.
“제가 일개 패션 브랜드의 오너 디자이너쯤으로 보이십니까?”
한차례 정적이 내려앉았고.
“아니면, 가소로운 수준의 성공을 몇 번 거두고 잔뜩 우쭐해하고 있는 졸부쯤으로 보이십니까?”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좌중들의 표정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잔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반면, 재승은?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린 채, 그런 시계 부호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내 재승이 손에 쥔 온 더 락 잔으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려 가며 뒷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잘못 생각하고 계세요.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엔 영 부끄럽지만 저는 여러분이 나눠 드시고 계신 달콤한 파이를 잔뜩 빼앗아가게 될 강력한 경쟁자입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제 외투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시계함 한 개를 꺼내 들어서는 테이블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염치 불고하고 식사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예요. 제가 영 탐탁지 않으신 분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단 돌아가시는 분들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수년 안에 브랜드 가치가 반토막 나게 되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