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27)
블랙 라벨-226화(227/299)
블랙 라벨 226화
227. 자, 이제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있지?
테이블을 기점으로 모여 앉아 있는 시계 부호들의 얼굴 위로 노골적인 불쾌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들 재승의 말을 그저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의 허언’쯤으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심지어 몇몇은 애꿎은 아르도 회장에게 눈총을 주기도 했다.
반면, 아르도 회장은 능청스러운 태도로 일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몫의 와인을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던 와중,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요한 루퍼 회장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
한차례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그가 섬뜩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재차 덧붙였다.
“일단 들어보도록 하죠. 하지만 시답지 않은 내용의 제안이라면, 한 순간의 객기가 당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드릴 겁니다.”
노골적인 협박조였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이는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질 수 있는 인물이었고.
돈과 힘을 고루 갖춘 이가 아니던가?
그 두 가지를 적절히 섞어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방법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다.
더군다나 요한 루퍼 회장과 척을 진다는 뜻인 즉, 우르르 몰려다니기를 즐기는 시계 부호들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고 말이다.
마냥 스산하기 그지없는 투로 꺼낸 흉흉한 말이었으나, 재승의 반응은 영 미적지근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다들 바쁘신 분들이신 만큼, 본론부터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여러분께 내걸려는 조건은 저 시계 안에 담겨 있는 기술에 대한 ‘라이센스’입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제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덧붙였다.
“자, 그럼 지금부터 딱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데리고 계신 마이스터 및 연구원을 부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 시계를 겉으로 살펴봐도 좋고, 아예 뜯어내서 속을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물건의 가치를 확인해 보신 뒤에 나누는 게 좋겠군요.”
통보를 마친 재승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재차 뒷말을 이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나머진 협상은 그때까지 남아 계신 분들하고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덩그러니 남겨진 시계 부호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차례로 헛웃음을 흘려 보이기 시작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으나, 그들은 추태를 부리거나 언성을 높이는 행위 자체를 금기시 여기는 이들이다. 누구 한 명도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들 요한 루퍼 회장의 눈치를 살피는 데 급급해 보일 따름이었다.
이내 요한 루퍼 회장이 재승이 테이블 위에 내려둔 시계함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월 플라워라는 브랜드 네임이 정갈하게 각인되어 있는 고급스러운 재질의 시계함.
수차례 ‘월 플라워, 월 플라워….’ 하고 연달아 되뇌어 보이던 그가, 아르도 회장을 휙 돌아보며 물음을 건넸다.
“온갖 지면 매체를 통해 시계 라인 신설을 앞두고 있다며 떠들어대고 있던데, 이토록 호언장담하는 것을 보면 정말 자신만만한가 보군요.”
“예. 제품을 살펴보시면 리의 자신감에 대해 충분히 납득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좋습니다. 우선 한 번 살펴보도록 하죠. 하지만 볼품없는 제품이 담겨 있다면, 리는 오늘 자신이 범한 결례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겁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무의미한 경쟁이 빚어진다면 리의 편에 설 겁니다. 저는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움직이는 투자자로 기억되고 싶거든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씀인 것 같습니다만?”
이내 아르도 회장이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답했다.
“단언컨대,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은 그 어떤 브랜드에서 제작해 낸 시계보다도 견고하고 아름다운 제품일 겁니다.”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이 좌중들을 한 번씩 쭉 둘러본 뒤에 덧붙여 말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의 브랜드를 포함했을 때에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아르도 회장의 말이 요한 루퍼 회장의 신경을 자극한 것일까?
가소롭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조심스럽고 노련한 손길로 시계함을 개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드러운 경첩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찰나.
요한 루퍼 회장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안에 담겨 있는 제품은 추가 옵션이 단 한 개도 탑재되지 않은 듯, 평범하기 그지없는 느낌만 잔뜩 묻어나는 시계일 뿐이었다.
한데, 뭐랄까? 그저 겉치장이 화려하지 않을 뿐이지, 유리알 너머로 엿보이는 내부 매커니즘은 견고하기 그지없어 보일 뿐이었다.
한참 동안 멍한 눈으로 시계를 살펴보던 요한 루퍼 회장이, 다급한 손길로 제 휴대폰을 꺼내 들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는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금 당장 내가 불러주는 주소로 달려오게! 일 분, 아니! 일 초라도 더 빨리!”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다른 시계 부호들 역시 앞다퉈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는, 시계함 근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불안감과 기대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호기심이 뒤섞이고 있는 와중이었다.
저 시계가 대체 어떻길래?
비록 다른 물품을 감정하는 안목은 어떨지 몰라도, 시계의 진가를 살피는 안목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이내 다들 하나같이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황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했다.
물론 하나같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브랜드 연구소의 연구원 내지는 수석 마이스터를 호출하는 내용이었고 말이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 *
재승은 저택 정원에 외곽에 선 채, 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려가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크하하, 자네 덕분에 아주 재미있는 구경을 했네. 늙은 펭귄들이 뒤뚱거리느라 여념이 없더군. 연구원들이며, 마이스터들이며 발바닥이 찢어져라 달려오고 있을 걸세.”
어느새 재승의 곁에 다가선 아르도 회장이 건넨 말에, 재승이 고개를 치켜들며 능청스레 답했다.
“그 정도예요? 직접 보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네요.”
“마침 저기 한 대 들어오는군.”
해치백 차량이 저택 정문을 통과하여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이의 성미가 급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급한 일이 있는 것인지 좁은 정원로에 들어선 뒤에도 속도를 줄일 생각을 않고 있었고 말이다.
안에서 내린 이는 가운 차림의 중년인이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안에 있는 시계 부호들 중 한 명이 호출한 연구원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듯했다.
이내 재승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제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시계 부호들에게 준 시간이 모두 지나가고 다시 저택 안에 들어섰을 때, 그들이 보일 반응이 너무도 궁금해 가슴팍이 간질거릴 지경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저택 내부는 시계 부호들과 연구원들. 또 마이스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다들 반쯤 해부된 시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며 저들만의 감정평을 늘어놓는 데 여념이 없었던 탓이었다.
“혁신적인 기술의 집약체입니다. 매커니즘이 어찌나 견고한지, 개발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을 지경이에요. 정말 이 정도 수준의 기술력을 고작 ‘돈’을 대가로 판매하겠다고 한 겁니까?”
돈 앞에 고작이란 수식어가 붙는 경우는 흔치 않다.
중년 연구원이 심각하기 그지없는 투로 꺼낸 말에, 요한 루퍼 회장이 제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그래.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니고 있는 라이센스라고 생각하지?”
“족히 10년가량은 앞선 수준의 기술력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죠. 완벽한 오토매틱 기법에 의거해서 작동하는 시계예요. 오차가 생길 리가 만무한 데다가, 현존하는 모든 기술을 뛰어넘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 지경이에요. 만약 이 라이센스의 주인이 제 지인이었더라면, 어떻게든 설득해서 판매를 막았을 겁니다.”
이내 요한 루퍼 회장이 애꿎은 제 손톱을 물어뜯어 대기에 이르렀다.
처음 살펴보았을 때는 그저 특별한 기법에 의거하여 제작된 시계쯤으로 여겼다.
특이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은. 하지만 헐값에 사들일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구매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수준의 기술 정도로 본 것이다.
하지만 수석 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정신이 영 몽롱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족히 10년은 앞서 나간 기술력이라고?
한낱 패션 브랜드의 오너 디자이너가, 대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술을 손에 넣었다는 말인가?
이내 요한 루퍼 회장이 곁눈질로 벽면에 거치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젊은 오너 디자이너가 자신들에게 툭 던져준 한 시간이라는 제한 시간이 거의 다 소진된 상태였다.
협상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는 지금, 그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분명 돈을 받고 팔 거라는 이야기는 안 했지. 대체 어떤 조건을 요구하려는 걸까…?’
이 시계에 담겨 있는 기술력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란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더군다나 시계 라인 신설을 앞두고, 온갖 지면 매체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중이라면 더더욱.
어떻게든 구매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만연해 있는 와중인데, 젊은 오너 디자이너는 돈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확률이 컸다.
돈보다 훨씬 더 충족시켜 주기 어렵고, 힘든 무언가를….
그때.
철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재승이 들어섰다.
“준비한 ‘상품’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다들 제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신 걸 보면 말입니다.”
유독 ‘상품’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해 보인 재승이, 자연스레 비어 있는 테이블의 상석을 꿰차고 앉으며 재차 말문을 열었다.
“그럼 다들 협상에 대한 의사가 충만한 것으로 여기고, 조건을 털어놓아 봐도 괜찮을까요?”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그 누구도 감히 꾸짖을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었다. 다들 계산이 빠른 만큼, 지금 이 순간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이는 자신들이 아니라 젊은 오너 디자이너란 사실을 깨달은 덕이었다.
이내 요한 루퍼 회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엷게 떨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원하는 조건이 뭔가?”
“간단합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한차례 씽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차 덧붙여 말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향후 2년간 월 플라워의 시계만을 착용해 주실 것. 그렇게 해주신다면, 라이센스는 2년 후에 무상으로 배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시계 부호들 대열에 섞여 있던 ‘해리 보르’ 회장이 대뜸 고함을 내질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회장님은 실격입니다.”
“뭐, 뭐라고?”
한차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위스키 병을 집어 들며 재차 설명을 덧붙였다.
“그 어떤 조건을 내걸어 주신다고 한들, 회장님께는 절대 라이센스를 넘기지 않겠습니다.”
이내 장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 번의 실수가 불러올 타격에 대비하기 위한, 계산적인 침묵의 향연이었다.
재승이 내건 조건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전 세계 시계 시장을 대표하는 브랜드의 오너들이, 어찌 2년이란 시간 동안 타 브랜드의 시계를 착용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는 결코 2년 안에 모든 비밀을 파헤쳐 낼 수 있는 기술력이 아니다.
더군다나 기술의 비밀을 파헤쳐 낸다 한들, 법에 저촉되지 않게끔 개량을 거쳐야 자신들의 제품에 대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재승의 조건에 따르고 2년 뒤 라이센스를 넘겨받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긴 한 것이다.
다들 바삐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대고 있던 찰나. 한차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제 어깨를 가볍게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덧붙였다.
“마지막 1분 드리겠습니다. 대동한 연구원 및 마이스터 분들과 최종적인 상의를 마치신 뒤에 결정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군요.”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장내에 모여 있는 시계 부호들 전원이 침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한 채, 자신들의 앞에 주어진 딜레마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