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4)
블랙 라벨-23화(24/299)
블랙 라벨 23화
24. 트리거(Triggers)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는 쿠바쿠바 스토어 담당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중,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 몇 마디가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준비된 자뿐이라는 말.
– …하니까, 우선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나누는 게 좋겠네요. 괜찮으시죠?
이내 재승이 화들짝 놀라 답했다.
“아, 네! 그럼요.”
– 시간은 언제쯤이 괜찮으세요?
“일단 오늘은 힘들 것 같고….”
말끝을 흐려 보인 재승이,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캘린더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될 수 있으면 수요일 전이었으면 좋겠네요.”
수요일은 FTV와의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되도록 그 전에 미팅을 갖고, 될 수 있으면 입점 계약까지 체결해 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명분이 더욱 굳건해지고, 인터뷰의 효과 역시 극대화될 테니 말이다.
18살의 어린 오너 디자이너가, 쿠바쿠바와 같은 대형 웹진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온·오프라인 스토어에 입점한다? 적어도 ‘에디터가 멋대로 선정한 유망주 10인!’에 들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는 경력이다.
‘가지고 있는 카드들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지.’
이내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쿠바쿠바 스토어 담당자가, 나직이 입을 뗐다.
– 재승 씨. 그럼 월요일은 어떠세요? 괜찮으신가요?
“네. 좋습니다.”
그 뒤로, 약속 장소와 시간까지 조율을 마쳤다. 일단 장소는 일전에 FTV 매거진 편집 팀과 이야기를 나눴던, 카페 하우스텐. 시간은 저녁 8시. 학교가 끝난 뒤, 빠듯한 시간 덕에 쫓기듯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 아무쪼록 첫 판매, 좋은 결과 거두실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도록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이내 통화 종료버튼을 손으로 꾹 눌렀다. 통화하는 내내, 저도 모르는 새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것일까?
“후우-.”
폐부에 남아 있던 묵은 숨을, 긁어내듯 뱉어냈다. 통화를 마쳤음에도, 정신이 영 몽롱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것처럼 머리가 ‘핑-’ 하고 도는 것만 같기도 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거대한 기회가, 갑작스레 찾아왔다.
쿠바쿠바 스토어.
이미 어느 정도 단단히 자리를 잡은 브랜드들조차, 입점하지 못해 안달이 난 곳이다.
잠시 상념에 푹 젖어들었던 재승이, 이내 피식하고 미소를 흘려 보이기에 이르렀다.
‘흠…. 따지고 보면, 영국이 덕분에 얻을 수 있던 기회인 셈이네.’
어제 명동에서 스트릿 스냅 샷을 촬영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만약 영국이 자신에게 명동에 함께 가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스냅 샷을 촬영했을 일도, 지금처럼 쿠바쿠바 스토어의 관리자와 미팅 일자를 잡을 일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조만간 제대로 된 밥이라도 한 끼. 아니, 필요한 음악 장비라도 한 대 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입점 계약부터 완전히 체결시킨 다음에.
“좋아.”
나직이 되뇌어 보인 재승이, 들뜬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다시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첫 번째 자체 제작 상품들의 판매 개시까지 남은 시간은 8시간. 남아 있는 막바지 준비 작업을 위해,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PM 11: 57
자제제작 의류 상품 판매 시작 시점인,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분 남짓. 그렇게나 고대하던 순간을, 이제 단 3분밖에 남겨놓고 있지 않게 된 것이다.
재승은 제 방 침대 위에 가만히 앉은 채, 제 휴대폰 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흠, 이상하게 떨리네.’
그간 리폼 의류 판매를 준비할 때와는, 조금 다른 류의 떨림이었다.
리폼 의류처럼 타인이 만든 옷을 ‘리터치(Retouch)’한 게 아니라, 아예 자신이 직접 만든 옷이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내 옷을 팔았던 게 언제였더라….’
이미테이션 의류 제작에 착수하기 이전, 동대문 의류 타운 내에 자리한 소점포에서 외판원으로 일하던 때였다.
정말 밤잠을 쪼개가며 힘겹게 만들었던 옷들이, 매장에 *DP(Display의 약자) 되던 때의 희열.
재승은 아직도 그 희열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후-.”
거대한 떨림에 휩싸여 있는 한편. 오늘 하루 내로 준비한 물량이 모두 완판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블로그 방문자의 수도 부쩍 늘어났고, 그중 자체 제작 의류가 출시되면 꼭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이들도 수두룩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웹진 쿠바쿠바에 게시된 ‘스트릿 스냅 샷’ 아래로는, 이미 백 개가 넘는 댓글들이 달린 상황이었다.
‘그래. 분명 오늘 내로는 완판이 될 거야. 애초에 준비한 물량이 많지 않으니까….’
그때.
AM 12: 00
자정이 되며, 휴대폰 액정 위로 나타나고 있던 날짜가 바뀌었다.
블로그 마켓의 ‘예약 게시’ 기능을 통해, 판매 관련 게시물들이 일괄적으로 게시될 시간이 온 것이다.
재승은 자신이 석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동자세로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크나큰 인고의 시간이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속에서 뒤섞이기 시작했다.
은근한 기대와 더불어, 근본 없는 불안감. 이런저런 잡념들이, 해일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하나, 핸드폰은 여전히 잠잠하기만 할 뿐.
이내 재승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제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뭐야? 구매 관련 연락이 한 통도 안 온다고? 혹시 예약 게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한 건가…?’
이윽고, 재승이 컴퓨터 의자 앞에 다다르던 순간.
지이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재승의 휴대폰이 멈출 줄 모르고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내 재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자신의 휴대폰으로 들어오고 있는 문자를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 재킷, 블랙진 세트 구입하고 싶습니다. 일괄 구매하면, 면 티셔츠는 사은품으로 오는 거 맞죠?
– 블랙진 S사이즈 구입하고 싶습니다. 계좌번호 주시면, ‘이경훈’이름으로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 혹시 제품 관련 문의는 블로그로만 받으시나요? 재킷 S사이즈 여성도 입을 수 있을까요?
* * *
재승은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홀로 고객들을 응대하는 와중에, 모두 품절된 제품의 판매 관련 게시물에 ‘Sold out’이라는 글귀를 첨부해야 했다.
다시 한번 시간이란 게, 얼마나 상대적으로 흐르는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릴 때에는 그렇게 느리게만 움직이던 시계 침들이, 바삐 움직일 때에는 눈으로 좇을 수 없을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딱 43분.
재승이 초기 물량으로 준비한, 옷들이 모두 판매되는 데 소요된 시간이었다.
만약 ‘구색’이 갖춰져 있었더라면, 훨씬 더 빨리 끝났을 게 분명했다. 홀로 고객 응대, 문의 답변, 입금 확인 등의 업무를 도맡느라 한참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아-.”
한차례 묵은 숨을 토해내 보인 재승이, 얼떨떨한 마음에 제 볼을 한 번 꼬집어보았다.
참으로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13년의 세월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오던 때에도, 꿈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볼을 꼬집어보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이내 재승이 허무한 마음에, 피식피식 웃음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모두, 맨 마지막에 도착한 입금 문자의 내용 덕분이었다.
[ Web발신 ]함께은행 / 20921***141 / 이민호
전자금융입금
210,000 원
잔액: 6,630,250 원
재킷과 블랙진을 일괄 구매하면, 21만 원에 면 티셔츠를 사은품으로 지급하는 형식으로 판매를 진행했기에 구매 고객의 대부분이 일괄 구매 고객이었다.
초기 자체 제작 의류 제작이, 단돈 60만 원으로 진행되었으니 순식간에 10배로 불어나 버리게 된 것이다.
애석하게도 기쁜 감정을 곱씹을 새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원단 추가 매입을 하고, 공장에 발주를 넣어야 해. 블로그 마켓에 곧 추가 물량이 입고되리란 공지사항도 게시해야 하고… 내일 당장에라도 작업실 겸 스튜디오도 마련해야겠다.’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히 정리해 낸 재승이, 이내 제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첫 자체 제작 의류 판매는,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해주었다.
본래 들끓던 열정 위로, 누군가가 기름을 잔뜩 쏟아부은 것만 같은 기분.
제 감정이 닳고 닳았다고만 생각했던 재승이었다.
그렇기에, 더는 처음이란 단어 덕에 가슴을 설렐 일은 없으리라고 짐작했었다.
물론, 크나큰 오산이었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시작’이라는 말은 여전히 황홀하고 달콤했다.
뜨거운 눈물 몇 방울을, 정말 손쉽게 자아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끄윽… 흐윽….”
이내 재승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가슴팍에서 시작된 전율이, 전신을 몇 번이고 순회했다.
지독하리만큼 편안한 안도감이었다. 스스로에게 품고 있던 의심과 일말의 불안이, 완벽히 해소되었다.
해낼 수 있다는 짙은 확신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방아쇠는 당겨졌으며, 자신은 그로 말미암아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제 더더욱 명확해졌다.
이건.
옷을 만든다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