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40)
블랙 라벨-239화(240/299)
블랙 라벨 239화
240.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우선 펜트하우스 거실로 나온 뒤, 소파에 앉아 애슐린이 준비 중인 아침 식사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웹 뉴스에 기재된 기사와, 휴대폰 메세지 함을 가득 채우고 있는 축하인사들을 토대로 군데군데가 비어 있는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8관왕.
하루아침에 꿈꿔본 적도 없는 경이로운 타이틀을 손에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웹 뉴스는 물론이고, 온갖 지면 매체가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리, 얼른 먹자.”
한차례 “응.” 하고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거실 식탁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침 메뉴는 따뜻한 스프 한 접시와, 부드러운 빵 몇 조각이었다.
“아직도 잘 기억 안 나?”
“중간중간은.”
“그러니까, 어제는….”
말끝을 흐려보였던 애슐린이 어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해서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우선 시상식이 끝난 뒤 포토 존에서 진행한 십 분 남짓한 인터뷰를 끝으로, 곧장 축하 파티를 벌이기 위해 파리의 호텔 바로 향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모든 비용은 아르도 회장이 결제해 주었고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중간중간 일부 장면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했고 말이다.
일단 애슐린이 정성스레 끓여준 스프를 금세 비워낸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나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
“알겠어.”
일단 담배를 챙긴 뒤 펜트하우스의 발코니로 향했다.
날씨가 꽤 쌀쌀하고 바람이 날카로웠지만, 햇볕 덕인지 그럭저럭 괜찮은 느낌이었다.
“어디 보자….”
작게 중얼거려 보인 재승이 메시지 함 안으로 가득 쌓여 있는 축하 문자의 수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언제 일일이 답장을 할지 막연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화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우선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신호음이 끝맺어지던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하고 반가운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아들!
마음이 절로 편안해지게끔 만들어주는 음성이다. 이내 재승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엄마, 죄송해요. 어제 전화드린다는 게 너무 경황이 없었나 봐요.”
– 아냐, 아냐. 바빴을 텐데 괜찮아. 아들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수화기 너머에서 “재승이야? 재승이야?” 하고, 연거푸 되물으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얼핏얼핏 들려오는 듯했다.
간간이 송 이사의 목소리도 들려오는 듯했고 말이다.
어라? 잠깐만. 송 이사님 목소리는 대체 왜?
이내 재승이 의아하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어머니,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지금 이사님 집에 계세요?”
– 어머, 어떻게 알았어? 어제 오셔서 시상식 나오는 채널 맞춰주시고, 함께 시청하셨거든. 잠깐만. 금방 바꿔 드릴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재승이 한차례 말끝을 흐려보이던 찰나, 곧장 송 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야, 사장! 안 그러셔도 되긴, 뭘 안 그러셔도 돼? 나한테 이러기야?
“어차피 통화 마치는 대로 곧장 이사님께 전화드릴 생각이었어요.”
– 하여튼 혓바닥은 미끌미끌해 가지고 말이야. 일단 축하한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8관왕이라니, 정말 고생 많았어.
재승이 “감사합니다.” 하고 답해 보이자, 송 이사가 곧장 말을 이었다.
– 다른 건 아니고, 혹시 기뻐서 미치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한 번 받아 본 거야. 오늘 여기저기 전화 돌리느라 정신없을 텐데, 일단 부모님 다시 바꿔 드릴게. 통화 마치는 대로 중요한 전화들 먼저 해결하고.
“아녜요. 저한테는 이게 제일 중요한 전화죠. 그나저나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발한 생각을 하셨어요?”
– 메이저 방송사 몇 군데에서 방영권 구입한 거 기사 다 났는데, 가장 먼저 생각났지. 부모님께서 제일 보고 싶어 하셨을 거 아냐?
“그렇죠. 어쨌든, 정말 감사해요. 프랑스에는 언제 오시는 거예요?”
한차례 “흐음….”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송 이사가, 곧장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일단 티켓팅은 진즉에 마쳐뒀어. 팀도 이미 꾸려뒀고. 이번 주 토요일에 파리 도착하니까, 그 전까지는 쉬면서 밀린 서류만 검토하고 있으면 될 것 같네.
이런저런 설명이 추가로 이어졌다.
송 이사는 파리에 도착하는 대로, 패션위크 관련 업무를 모두 내려놓고 브랜드 하우스 리모델링에만 주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패션위크 당시, VMD팀을 도와 무대를 기획·설계해 주었던 ‘카이 그린’이 다시금 합류하게 되리란 이야기도 덧붙여 주었고 말이다.
– 어쨌든, 일 이야기는 잠깐 미뤄두자. 일단 나는 이만 줄일 테니까 가족들하고 대화 나눠. 나는 이제 사무실로 복귀해야 할 것 같네. 보나마나 인터뷰 섭외 메일 잔뜩 들어와 있을 테니까….
다시금 어머니, 아버지, 동생 승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통화를 마쳤다.
그다음에는 축하 문자를 보내온 순서대로, 한 명씩 한 명씩 천천히 전화를 걸어 감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꼬박 몇 시간이 걸린 작업이었다. 손이 차갑게 식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괜찮아졌다 싶으면 다시 발코니로 나서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전화를 마친 뒤. 재승이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애슐린에게 말했다.
“애슐린, 나 오늘 다녀올 곳이 있는데 혹시 함께 가지 않을래?”
“지금 당장? 어딘데?”
* * *
빌리 반 코퍼레이션에서 지원해 준 차량을 타고 한참을 내달렸다.
이런저런 행사 석상으로의 초대를 받았으나,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었던 탓이었다.
쉼 없이 나아가던 차량이 멈춰 선 것은 저녁노을이 일렁이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었다.
“리, 도착했습니다.”
시골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나, 나름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청소를 비롯한, 저택 관리를 위해 직원을 세 명이나 붙여두었던 덕이었다.
대체 무슨 저택인 것이냐고?
다름 아니라 칼 라거벨트에게 유산으로 상속받은, 그의 고향 생가(生家)였다.
이내 저택 안에 있던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걸어 나와서는 정중한 투로 말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차례 “괜찮습니다.” 하고 답해 보인 재승이, 재차 말을 이었다.
“칼을 만나고 싶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내 직원을 따라나서자 평범하기 그지없는 묘비 한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세기를 평정했던 패션계의 거장, 칼 라거벨트의 묘비치고는 지나치게 단출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이내 재승과 애슐린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묘비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섰다.
애도를 위한 묵념의 시간.
노을빛이 저택 뒤뜰의 잔디를 붉게 물들였다.
덕분일까?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이는 풀잎이, 병아리의 솜털처럼 보드라워 보일 따름이었다.
* * *
본래 시간이란 또렷하기 그지없는 상대성을 띠고 있게 마련이지 않은가?
시즌 중에도 몇 번이고 시간이 빠르다고 느꼈던 바 있다.
하지만, 쉴 때는 몇 배나 더 빠르게 흐르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으리으리하네. 이 정도면 조금만 손보면 될 것 같은데?”
곧 브랜드 하우스로 거듭나게 될 건물에 발을 들인 송 이사가, 잔뜩 들뜬 투로 꺼내 보인 말이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월 플라워 측 직원들이 파리 패션위크 준비를 위해 합류하기 전까지 주어졌던 사 일가량의 휴식기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이다.
이내 재승이 콧잔등을 살살 문질러가며 답했다.
“리모델링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으세요?”
“넉넉잡고 두 달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파리 패션위크를 끝마치고, 블랙 라벨 제품 준비가 얼추 되어갈 무렵이면 브랜드 하우스를 정상적으로 오픈할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송 이사님에게 ‘넉넉잡고’라는 말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기간을 말해보자면….’이라는 뜻이나 다름없는 뜻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니 말이다.
이내 송 이사가 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이지? 패션위크 순서 발표 말이야.”
“네. 오늘 자정 발표네요.”
“다 떠나서 저번 같은 대진운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내 재승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한번 더 그 정도로 열악한 대진운을 이겨낼 자신은 없었다. 아니, 이겨낼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한차례 긴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의자에 걸쳐두었던 외투를 챙겨들며 말했다.
“일단 저는 이만 가볼게요. 브랜드 하우스 리모델링 관련 사항은 전적으로 위임할 테니까, 원 없이 한 번 꾸며보시면 될 것 같네요.”
“그래. 믿고 맡겨줘. 예산은 어느 정도로 잡을까?”
“앞으로 백 년 이상 쓰게 될 공간인데, 원 없이 쓰셔도 좋아요.”
“그래? 괜찮겠어? 사옥부터 시작해서 이래저래 지출이 클 텐데….”
이내 재승이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다시 벌어서 채우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원 없이, 제대로 한 번 꾸며보세요.”
이내 송 이사가 입맛을 한 번 다셔가며, “그렇단 말이지?” 하고 되물었다.
두 눈은 이미 의욕으로 가득 차 번들거리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그런 송 이사를 잠시간 바라보고 있던 재승이 재차 말문을 열었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브랜드 하우스가 될 파리 시내의 건물을 나섰다.
앞에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오른 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 한번, 전력질주를 해야 할 시점이다.
* * *
PM 11 : 59
파리 패션위크에 참가한 브랜드들의 컬렉션 장소 및, 시간대 발표까지 딱 일 분 남짓한 시간을 남겨놓고 있는 시점.
재승을 비롯한 월 플라워의 디자인 팀 직원들이, 파리 호텔의 특실에 모두 모여 앉아 있는 상태였다.
객실 공용 컴퓨터 앞을 지키고 앉아 있는 추지훈은 연신 “제발, 제발….” 하고 되뇌어가며,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대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추지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막 장소랑 순번 떴습니다!”
이내 재승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는 그 내용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 모니터를 중심으로 둥글게 선 채 화면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한차례 객실 내에 “와아아아-!” 하고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유? 간단했다. 저번 시즌과는 아예 상반되는, 최고의 대진운 탓이었다.
마지막 날, 마지막 순서에 월 플라워의 이름이 적혀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장소마저 완벽했다.
월 플라워의 이번 패션위크 컬렉션 무대가 진행될 장소는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으로, 비록 백화점 무대라지만 무수히 많은 브랜드들이 몇 번이고 대규모 패션쇼 무대를 진행했을 정도로 설비가 잘 갖춰진 곳이기도 했다.
만족스럽다는 듯 득의의 미소를 지어보인 재승이, 저도 모르게 “어…?” 하고 중얼거려 보이기에 이르렀다.
다름 아니라, 월 플라워의 바로 앞 순서로 배치된 브랜드 탓이었다.
– PM 7 : 00 Diamond Look
– PM 8 : 00 Wall Fl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