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45)
블랙 라벨-244화(245/299)
블랙 라벨 244화
245. Diamond Look VS Wall flower (4)
쿵, 쿵, 쿵.
강렬하기 그지없는 일렉트로닉 풍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객석을 꿰차고 앉아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자세를 고쳐 앉기 시작했다.
이들 중 태반은 오직 ‘월 플라워’의 컬렉션을 보기 위해 장내를 찾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
그들은 마치 신성한 의식이 시작되기를 기대하는 광신도들처럼, 무언가에 홀린 눈빛을 한 채 런웨이 무대 방향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 런웨이 무대 위로 인영(人影) 한 개가 나타났다.
첫 번째 모델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조명 빛이 너무도 미비했던 터라 제대로 된 식별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롱핀 조명은 오직, 모델들이 턴(Turn)을 선보이는 런웨이 무대 끝자락만을 비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첫 번째 모델이 런웨이 무대 끝자락에 들어서며 제 모습을 드러내던 찰나.
“아방가르드?”
“허….”
객석 곳곳에서 낮은 술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모델이 차려입고 있는 옷은 전형적인 *아방가르드(*Avant-grade) 풍의 패션이었던 탓이었다.
전위적 패션을 뜻하는 단어이나, 사실상 대중성을 조금 배재하거나 혹은 아예 포기한 채 자신들의 예술성을 드러내기 위해 창안해 낸 디자인이랄 수 있었다.
물론, 월 플라워의 첫 번째 모델이 차려입고 있는 옷 역시 그랬다.
괴기한 퍼포먼스를 즐기는 팝 아티스트가 무대 의상으로 사용할 법 해 보이는, 통이 넓고 펑퍼짐한 검정색 바지와 회색 끈 나시. 어깨선이 오롯이 드러나 있는 상태였으나, 관능적인 매력보다는 묘한 신비함이 느껴지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다들 ‘리(Lee)’가 고작 한 시즌 만에 이토록 실험적인 소재의 디자인 라인업을 선보이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한 듯 보일 따름이었다.
객석 어딘가에서 시작된 술렁임이 좀처럼 끊일 생각을 않고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왜일까?
런웨이 무대 끝자락에 다다른 모델이 턴을 선보일 생각을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선 채 포징을 시작했다.
마치 화보 촬영을 할 때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정면 허공을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술렁임은 점점 더 커져만 갈 따름이었고 말이다.
이윽고.
치지지직-.
스피커를 타고 기이한 ‘소음’이 울려 퍼짐과 함께, 돌연 모든 조명들이 암전되었다.
삽시간에 장내에 짙은 어둠이 내리앉아 버리게 된 것이다.
그때, 런웨이 무대 뒤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위로 한 줄짜리 글귀가 나타났다.
– Wall flower
이윽고, 글귀가 왼쪽 끝에서부터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하더니 돌연 흑백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에 위치한 월 플라워 사옥에서 촬영한 모티베이션 영상이었다.
열심히 재봉에 임하고 있는 아뜰리에 소속 마이스터들의 모습이 송출되다가, 장면이 전환되며 이번 시즌 디자인 라인업의 도식들을 펼쳐놓고 신중히 회의에 임하고 있는 리(Lee)와 소속 디자이너들의 모습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 이번 시즌은 브랜드 월 플라워의 아이덴티티(Identity)와 추후 방향성을 보여줄 때입니다.
재승의 말이 자막으로 번역되어 송출되었다.
굵은 시가를 피우며 고민하는 재승의 모습, 어두컴컴한 밤하늘, 그다음에는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모습….
전형적인 브랜드 모티베이션 영상의 느낌일 뿐이었다.
문제는 컬렉션 무대 도중, 돌연 모티베이션 영상을 상영 중인 상황이라는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글쎄?
몰입도가 저하되거나,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있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유? 간단했다. 이건 타 브랜드가 아닌, ‘월 플라워’의 컬렉션 무대이니까.
여태껏 리가 기획·구상했던 컬렉션들이 모두 틀에 얽혀 있지 않았던 탓일까?
이제 월 플라워는 컬렉션 무대에서 그 어떤 퍼포먼스를 선보이든 이상하다 느껴지지 않을 만큼 특이한 이미지를 갖춘 브랜드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내 송출되던 영상이 중단되고 화면이 점점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페이드아웃(*Fade-Out)’ 기법을 차용하여 영상을 편집해 낸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시금 중단되었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제자리에 한참을 멈춰 서 있던 첫 번째 모델이 화려한 턴을 선보임과 동시에 백 스테이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번째 모델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던 찰나.
“대중성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군요.”
두 번째 모델이랄 수 있는 키가 훤칠한 백인 남성이 런웨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권위 있는 평론가 필 아도르가 꺼내 보인 말이었다.
그는 얇은 재질의 검정색 블레이저 재킷을 입은 채, 통이 넓고 펑퍼짐한 검정 슬랙스를 차려입고 있는 상태였다.
바지의 기장이 어찌나 긴 것인지, 신고 있는 구두의 코만 간신히 엿보일 지경이었다.
한데, 뭐랄까?
웬만한 이들이라면 길거리에서 입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난해 한 것이 아방가르드 패션이지 않던가?
반면 월 플라워가 선보이고 있는 아방가르드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난해하다기보다는 특별한 느낌이었으며, 트렌드를 표방하고 대중성을 살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으니 말이다.
적어도 ‘길에서 절대 입을 수 없겠다’라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특별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이정표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런웨이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세 번째 모델, 흑인 여성이 차려입고 있는 옷은 점프슈트 형식의 멜빵바지였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내의로 아무것도 받쳐 입지 않았다는 점 정도랄까?
“정말 특별하네요.”
객석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 여성이 저도 모르게 꺼내 든 말이었다.
그녀는 퍼포먼스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기괴한 예술관과 화려한 퍼포먼스 기획 능력을 두루 갖춘 일본의 세계적인 팝스타 ‘우먼 키코’였다.
그런 그녀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도, 월 플라워의 이번 시즌 의류들은 ‘이정표’ 내지는 ‘길라잡이’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조금 더 앞서가고 있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패션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소화하기에도 일절 거북함이 없을 만한 교묘하고 애매한 경계선을 찾아내어 제작해 냈다.
이내 그녀를 비롯한 많은 셀럽들이 선글라스를 벗은 채, 또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런웨이 무대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은 앞두고 있는 중요한 공연이나, 시상식 무대에서 월 플라워의 이번 시즌 제품을 착용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만으로 꽉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월 플라워의 이번 시즌 제품들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한다.
본래 패션이란 상류사회의 귀족들을 위해 파생한 문화가 아니던가?
우월감을 빌미로 유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줄 테니, 자신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후에도 자극적이고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은 느낌의 디자인들이 계속해서 공개되기 시작했다.
마치 우주를 옮겨 담아놓은 것만 같은 화려한 색감의 원피스와, 모시 천을 메인 패브릭 삼아 제작한 롱 가디건을 코디한 모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조명 빛 탓에 롱 가디건 내부에 자리한 모델의 속살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관능적인 매력과, 화려함, 진보적인 느낌, 대중성을 두루 갖춘 디자인이었다.
그다음에는 하이웨스트 느낌의 검정 롱 치마에, 얇고 부드러운 재질의 합성소재를 이용해 제작한 긴 팔 티셔츠를 코디한 모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빈들의 감탄을 자아낸 것은 티셔츠 위로 새겨져 있는 프린트였다.
마치 노을을 연상시키는 것만 같은 색감을 골고루 섞어 추상적인 느낌이 들게끔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이내 객석을 지키고 앉아 있던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라 불리는 디자이너, ‘드로 맥퀸’이 멍한 눈을 한 채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대중적인 아방가르드라, 마치 ‘뜨거운 얼음’처럼 이질적인 느낌이군요. 믿기지가 않습니다. 지금 리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성질의 무언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것이 프리미엄 브랜드 월 플라워의 아이덴티티이며, 추후 방향성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리는, 이토록 혁신적인 디자인을 해마다 만들어낼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이는 대중에게 강요하는 이기적인 형태의 예술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예술이지만,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상업적 잠재성마저 갖추고 있음이 분명했다.
소름이 끼침과 동시에, 막혀 있던 사고가 부서지고 새로운 형태의 무언가가 밀집되는 느낌이 들었다.
경이롭고 지고하기 그지없는 예술 작품과 독대하게 된 순간, 큰 깨달음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역사의 한 획이 될 만한 혁신적인 디자인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탄식과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기자들의 손이 더욱 분주해졌다.
‘고작 한 시즌 만에?’
객석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패션계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드리머 티셔츠와, 틀을 박살 내다시피 한 경이로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파리 패션위크를 재패하다시피 한 게 고작 반년 전의 일이지 않던가?
한데, 고작 그 짧은 시간 만에 아예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낸 것이다.
“경쟁이 되지 않는군.”
자연을 교묘하게 잘 따라 그리는 화가와, 자연을 만들어낸 창조주가 동일한 선상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 참가한 브랜드와, 월 플라워의 상관관계가 바로 그러했다.
이미 정해진 체제 안에서 최대한 혁신적인 작업물을 내놓는 이들과, 체재를 만들고 정립해 낸 이가 어찌 경쟁할 수 있겠는가?
다이아몬드 룩과 월 플라워의 경쟁이라고?
아니다. 애초에 동일한 선상에 설 수 없다. 다이아몬드 룩 뿐 아니라, 모든 이번 패션위크에 참가한 모든 브랜드가 그랬다.
이번 파리 패션위크는 월 플라워의 독무대였으며, 모든 브랜드가 들러리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들러리들 중 가장 앞선 수준이었던 브랜드가 다이아몬드 룩이었을 뿐.
이윽고.
마지막 모델의 런웨이 워킹이 끝남과 동시에 피날레 무대가 시작되었다.
다들 넋이 나간 듯 모델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찰나, 다시금 스크린을 통해 모티베이션 영상의 뒷부분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 우린 대중적인 아방가르드를 선보이는 브랜드로 기억되기를 희망하는 게 아니에요.
재승의 말이 자막으로 그대로 번역되었고.
– 그럼요?
그다음엔 디자이너의 되묻는 말이.
– 장르와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인 브랜드. 패션이란 단어를 떠올렸을 때,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최우선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는 그런 브랜드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겁니다.
이윽고.
암전되었던 조명이 다시 켜지며, 재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 와이셔츠, 빛나는 커프스, 슬림한 핏의 고급 커스텀 테일러와 수제 구두에 이르기까지.
평소 무대 위에서 보이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색을 한 채였다.
하나, 객석의 반응이 달랐다. 오너 디자이너가 모습을 드러냈고, 영국 신사처럼 멋들어지게 인사를 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반응도 돌아오고 있지 않던 것이다.
“…….”
“…….”
모두가 경배와 경이가 가득 서린 눈을 한 채, 그런 재승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객석 한편에서부터 천천히, 박수 소리가 전이되고 또 전이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짝짝-!
월 플라워가 이번 시즌에도 꿋꿋이 왕좌를 지켜냈음이, 또 판도가 수년 안에 뒤바뀌지는 않으리란 사실이 너무도 확실해지는 순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