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5)
블랙 라벨-24화(25/299)
블랙 라벨 24화
25. 바쁜 와중에, 송 사장
다음 날 아침. 재승은 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택배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하루 발송해야 할 택배가 자그마치 50개에 육박하는 상황이었다.
그 많은 물량을 직접 보낼 수가 없으니, 업체 측으로 연락을 취한 것이다.
“네. 두 시까지 와주셨으면 하네요. 네, 그때 일괄적으로 수거해가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뒤, 재승이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주섬주섬 교복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흠. 오늘 중으로 앞으로 쭉 함께할 제휴 택배사를 물색해 봐야겠는데?’
단연 택배 문제뿐 아니라, 그 밖으로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정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우선 준비된 물량이 없어서 못 팔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공급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동대문.
일단 동대문 방문이 시급했다. 원단상가에 들러 코팅 데님(Coated Denim) 원단을 추가 매입 해야 하고, 생산 공장에 들러 추가 발주를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기왕 가는 김에, 다음에 출시할 디자인의 샘플을 만드는 데 사용할 원단과 부자재도 매입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점심 중으로 조퇴하긴 해야겠네….’
등교 준비를 모두 마친 재승이 거실로 나서기 무섭게, 어머니 김은형이 나직이 입을 뗐다.
“재승아, 아침 먹어.”
“어머니. 혹시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아,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
이내 재승이 덤덤한 어투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축약하여 들려주었다.
김은형은 고개를 주억거려가며, 또 이따금 놀란 기색을 훤히 드러내 가며 재승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윽고, 재승이 제 휴대폰 문자메시지함에 남아 있는 입금 내역 문자를 보여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어제 하루 매출이에요.”
“어제 하루?”
“네.”
김은형의 시선이 휴대폰 액정 위에 닿던 찰나, 김은형이 제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며 되물었다.
“어머, 아들! 이, 이게 얼마야…?”
때로는 잘 다듬어진 유려한 말보다, 숫자 몇 개가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마련이다. 재승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한차례 김은형의 눈치를 살핀 재승이, 이제야 조심스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실 조금 더 규모가 커진 다음에 말씀드려서,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어머니 도움이 필요해서요.”
“도움? 어떤 도움?”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너무 많아서요. 조퇴를 했으면 하는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도와주실 분이다. 그것도 물심양면으로, 어떻게든. 만에 하나 반대를 하신다더라도, 오늘 하루만큼은 불효자가 될 생각이었다.
본래 이 무렵, 재승에게 무단조퇴는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잠시간 고민하던 김은형이, 고개를 슬며시 끄덕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그래, 접수 완료.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해 놓을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재승이 말끝을 흐려 보이자, 김은형이 한차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아들.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부동산에 함께 가주셨으면 해서요.”
“응? 부동산?”
김은형이 나직이 되묻자, 재승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네. 집에서 작업하기가 곤란해서, 작업실을 마련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부동산 계약을 체결하려면 법정대리인 동의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이내 김은형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거려 보임과 동시에, 나긋하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그것도 접수 완료. 알겠어. 저녁에 공장 일 마치자마자 전화할게.”
“엄마.”
“응?”
“믿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재승이 화색을 해 보이며 건넨 답에, 김은형이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듯 말했다.
“엄마가 더 고마워.”
“네?”
“아냐, 아냐.” 하고 에둘러 말해 보인 김은형이, 제 핸드백을 어깨에 들쳐 메고는 나직이 말했다.
“엄마는 일단 출근해 봐야겠다. 가는 길에 선생님께 전화로 잘 말씀 드려놓을 테니까, 걱정 말고.”
“네, 어머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아들. 저녁에 보자.”
방긋 미소를 지어 보인 김은형이, 곧장 운동화를 챙겨 신고는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고 나선 그녀가, 채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돌연 걸음을 멈춰 섰다.
“하아-.”
가슴속에 불덩이라도 들어 있는 것인지, 연신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드리면 그런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몇 번이고 가슴팍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아들.
그 사무치도록 아팠던 단어 때문이었다. 그 두 음절로 이뤄진 단어가, 김은형에게 있어서는 세상에서 제일 슬픈 단어였다.
그런 아들이, 지난 며칠 새 몰라보도록 달라졌다.
어투, 눈빛, 행동거지. 모든 것들이.
그리고 오늘, 아들의 가장 큰 변화를 목격했다.
탁-.
이내 김은형이 제자리에 쪼그려 앉음과 동시에, 그녀의 낡은 핸드백이 바닥과 맞닿았다. 제 얼굴을 양팔 사이에 묻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끄으윽… 흐윽….”
아들의 탈선을 처음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던 못난 엄마였다.
무서웠던지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지라, 자신 역시 날 때부터 엄마였던 게 아닌지라. 아들의 탈선을, 바쁘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했었다.
오늘, 그랬던 아들의 꿈을 보았다. 단 한 번도 들여다보고자 한 적 없는, 아들의 재능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던 아들의 얼굴에서, 오뉴월 들풀에서나 느껴볼 수 있을 법한 싱그러움을 보았다.
알 수 없는 미안한 마음에, 좀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말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미숙하고 또 미숙하기만 한 엄마여서 정말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게도, 모든 문제를 너에게서만 찾았었노라고. 그래서 더더욱 미안하다고.
김은형은 싸늘한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한참을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어야 했다.
* * *
그날 오후.
택배 발송을 모두 마친 재승이, 곧장 동대문 원단 상가로 향했다. 어머니의 퇴근 시간 이전에 모든 일과를 마치려면, 부지런히 움직이어야 할 성 싶었다.
‘일단 데님 원단 먼저 매입하자.’
원단 상가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익숙한 경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우선, 일전에 데님 원단을 구입한 바 있는 단골 점포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 점포의 사장과 수다를 나누고 있던 점포 사장이 재승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 왔어?”
“네. 잘 지내셨어요?”
“며칠 전에 봐놓고, 뭘….”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점포 사장이, 이내 간이냉장고에서 음료수 한 캔을 꺼내 들어서는 재승에게 건네주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밥은 먹었고?”
“네. 전 간단히 먹고 왔어요.”
“그래, 오늘은 뭐 찾는 물건 있어?”
“전에 가져갔던 코팅 데님이요.”
재승의 답에, 점포 사장이 흐뭇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되물었다.
“이야, 제품 나왔나 보네?”
“네. 어제부터 판매 시작했어요.”
“반응은 좀 어때?”
“다행히 초기 물량은 완판이에요.”
이내 점포 주인이 “경사 났네, 경사 났어….” 하고 중얼대며, 장부를 뒤적거려 대기 시작했다.
재승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찰나, 점포 주인이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월 플라워, 여기 있다. 그래. 물량은 얼마나 필요해?”
“오늘은 백육십 마 주세요.”
재승이 짤막하게 답해 보이기 무섭게, 옆 점포 사장이 이죽거리는 투로 덧붙였다.
“어이, 젊은 사장님. 백 마면 백 마고, 이백 마면 이백 마인 거지… 백육십 마는 뭐야?”
그 말에, 점포 사장이 발끈하며 답했다.
“박 씨! 모르면 조용히 해! 우리 사장님이 저번에는 사십 마 사 가셔서, 이번에 백 마 단위로 맞춰주려는 거라고. 딱 보면 몰라?”
“몰랐지, 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것도 모르면서 왜 참견하고 지랄이야? 그런 것도 모르면 장사 접어야지. 뭘 자랑이라고….”
표현이 격하긴 하지만, 그만큼 친밀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재승이, 이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래 원단 상가 내의 소점포 점주들은, 어떤 원단이든 백 마 단위로 파는 것을 가장 선호하는 편이었다.
보통 백 마 단위로 거래가 진행되기 때문에 어중간한 자투리 원단이 남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어중간한 물량을 구입해 가려는 이들에게, 괜히 면박을 주는 것이었고 말이다.
이내 재승이 나직이 말을 건넸다.
“저, 사장님. 배송지가 저번이랑 달라요. 생산 공장으로 바로 보내려고요.”
“그래, 있다가 주소 적어줘. 저녁 되기 전에 바로 배송해 줄게.”
“아! 사장님. 그리고 혹시 명품 가방 원단도 취급해요?”
“흠, 정품 원단 말하는 거지?”
“네.”
한차례 침음을 흘려 보인 점포 사장이,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답했다.
“우리는 없는데, 구해줄 수는 있지. 얼마나 필요한데?”
“혹시 소량도 구해주실 수 있어요?”
“까짓거 구해주지, 뭐. 정확히 얼마나?”
“여덟 마 정도요.”
다름 아니라, 아까 아침에 보았던 어머니의 가방이 자꾸만 눈에 밟혔던 탓이었다.
명품 브랜드의 정품 원단을 이용해, 꽤 괜찮은 수준의 핸드백을 만들어 선물해 드리고 싶었다.
이내 점포 사장이 한차례 손가락을 튕겨 보이고는, 특유의 쾌활한 어조로 되물었다.
“저번에 준 명함 가지고 있어? 태양사 명함.”
그 말에 재승이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가지고 있어요.”
송인혁 사장의 명함을 일컫는 것이었다. 아직 엄두가 나질 않아, 연락을 취해보지는 못했으나 애지중지 보관해두고 있었다.
이내 점포 사장이 재승에게 바짝 다가와서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 태양사 사장이 그쪽에서 잔뼈가 굵어.”
“그쪽이요?”
“복각판, ‘짝퉁’ 말이야.”
알아요. 굵죠. 그것도 엄청나게.
“어느 브랜드 원단 원하는 건지 말해주면, 내가 그 친구 통해서 구해줄게.”
“아…. 네, 감사합니다.”
자꾸만 얽힌다. 정말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니만큼, 탑을 쌓듯 조심스럽게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싶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한데, 자꾸만 접점이 생긴다.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잠깐 잊고 지내다가도, 불쑥불쑥 그 이름이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이내 점포 사장이 고른 치열이 훤히 드러나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내가 말해놓을 테니까, 연락해 봐.”
“네?”
“거쳐서 이야기해 봐야 서로 번거롭기만 하지 않겠어? 나도, 젊은 사장님도, 태양사 송 사장도.”
“송 사장도”라는 말이 유독 귓가에서 빙빙 울리는 듯했다.
마치 메아리처럼. 이내 재승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그래. 때가 됐다.
인연을 다져볼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