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55)
블랙 라벨-254화(255/299)
블랙 라벨 254화
블랙 라벨 외전 6화
그날, 이후.
“리, 샘플 발주 완료했습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출근을 하자마자 자신이 직접 그린 도안의 샘플 제작 발주가 완료됐단 보고를 받았다.
아마 며칠 내로 공장 발주를 넣은 도안 샘플을 받아서 살펴볼 수 있게 될 터였다.
“디자인 팀 1차 공모 도식입니다.”
또….
“검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앓는 소리를 늘어놓던 디자인 팀 소속 디자이너 여럿이 제법 괜찮은 도식을 하루 만에 몇 장이나 만들고 보고를 올렸다.
이내 재승이 건네받은 도식화를 “사락, 사락.” 넘겨가며, 대강 훑어 본 뒤에 웃음기가 서린 투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거봐요,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예?”
“갈아 넣으면 다 나온다니까요.”
말을 마친 재승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 회의까지 검토하겠습니다.”
이제 제 일을 시작하려던 찰나….
똑똑.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리, 잠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브랜드 마케팅 팀장이었다.
“네, 얼마든지요.”
이내 마케팅 팀장이 말했다.
“이번 ‘파리 패션위크’ 참가 신청 완료했습니다.”
이번에는 내 복귀 무대가 되어줄 2021 파리 패션위크 F/W시즌의, 모든 참가 수속을 완벽히 마쳤다는 내용의 보고였다.
“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단순히 이번 시즌에 선보이게 될 제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슬슬 무대 구상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임박했다.
‘이번 시즌 쇼는 어떻게 구성해야 좋으려나….’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에 단순히 제품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컬렉션 무대의 구성이나 연출로도 호평을 받아왔다.
‘이번에도 꽤 완성도 있는 무대를 선보여야 할 텐데….’
무수한 평론가와 칼럼니스트들이 자신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 난 상황이 아니던가?
만약 제품의 완성도를 챙기더라도 형편없는 쇼를 선보였다가는 질책을 면치 못할 터였다.
아마 이제 감을 완전히 잃었다거나 더는 ‘월플라워’의 쇼가 기대되지 않는다는 소리를 늘어놓겠지.
“흠….”
그렇게 컬렉션 무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찰나였다.
똑똑.
다시금 누군가가 굳게 닫힌 대표실 문을 두드렸고….
“바빠?”
송 사장이 들어섰다.
“다름 아니라, 어제 말했던 TV쇼 출연 건 말인데.”
“네.”
“긍정적으로 이야기 잘 마쳤다고 말해주려고.”
이번에는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한 ‘트래쉬 토킹’을 목적으로 출연을 결심한 TV쇼 스케줄을 픽업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였다.
“하루 만에 일정이 픽스됐다고요?”
“방송 하나 따는 건 일도 아니지.”
“어느 방송사의 프로그램인데요?”
이내 재승이 흥미가 동한 양 펜을 내려놓으며 묻자, 송 사장이 손에 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로 간략히 설명했다.
“프로그램 이름은 르 그랑 주르날(Le Grand Journal)이고, 프랑스 내 유료 채널인 카날 플뤼의 인기 있는 토크쇼야.”
연달아 몇 번 “카날 플뤼….” 하고 중얼거리던 재승이 무언가를 떠올린 양 손가락을 한 번 튕기고는 곧장 되물었다.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이제야 생각났네요.”
“알아?”
“국내 걸그룹이 출연해서 화제였던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래?”
“아마 소녀세대가 출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프랑스 방송인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았으나, 입지가 상당히 굳건하고 유명한 방송인이 진행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촬영 일정은요?”
“이번 주말이야.”
짧게 답한 송 사장이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행 티켓 좀 여유 두고 느슨하게 끊는 건데….”
“이제 귀국하시려고요?”
“응, 아마 당장 돌아가도 이런저런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걸.”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는 양 심호흡을 해보인 송사장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정작 여기까지 와서 가장 재밌는 구경을 놓치게 된 건 마냥 아쉽지만 그렇다고 귀국을 더 미룰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밤 비행기라고 했던가?
“오늘 밤 비행기라고 하셨죠?”
한차례 “응, 맞아.”하고 답한 그가 덧붙였다.
“아쉬운 대로 TV로 봐야지.”
그 말에 재승이 “하기야….” 하고 낮게 중얼댔다.
송 사장의 말대로 어차피 조금만 기다린다면….
이번 인터뷰 내용이 세계 각지로 중계될 터였다.
“그나저나 인터뷰 ‘방향’은 조금 생각해뒀어?”
“네, 간단하게나마 생각해 두기야 했는데….”
말끝을 흐린 재승이 틈을 두고는 덧붙였다.
“모쪼록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 정도야?”
“파격적인 내용을 준비했거든요.”
* * *
그날 저녁.
“먼저 간다, 몸조리 잘하고.”
“네, 사장님.”
“종종 연락 주고받자고.”
이내 재승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답했다.
“이번 시즌 마치고 나면 한국에 꼭 들를게요.”
송 사장을 비롯한 한국 지사들의 직원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 꼭 한 번 들러.”
이내 “네.” 하고 답한 재승이 낮게 되물었다.
“그땐 동대문이나 갈까요?”
“동대문?”
“닭 칼국수에 소주 어때요?”
그 말에 “오!” 하고 감탄사를 흘린 송 사장이, 손가락을 세게 튕겨가며 덧붙였다.
“이야, 역시 뭘 좀 안다니까?”
“괜찮죠?”
“공장 할 때 많이 갔었는데….”
재승이 말한 닭 한 마리 칼국수는 동대문의 명물 중 하나였다.
“정말 많이 갔거든….”
재승을 만나기 전에 ‘태양사’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제봉 공장을 운영하던 당시에는 한 주에도 몇 번이고 걸음 했던 바 있었다.
“그럼요, 알죠.”
재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만 한 안주가 없다니까?”
전생에서 송 사장과 함께 음지에서 살아가던 때.
“속 든든하고 뜨끈하고….”
송 사장의 손에 이끌려 몇 번이고 방문했었지.
“자, 얼른 먹어.”
큼지막한 다리를 뜯어 제 접시에 덜어주고는, 살코기를 발라내 주던 송 사장의 모습이 눈에 아른댔다.
“장님이니까 발라주는 거야.”
“것 참….”
“틀린 말 했나? 장님 맞잖아.”
그는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항상 나를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 난 양 굴어대던 사람이 분명했다.
“자, 든든히 먹고 힘내자고.”
“예.”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
취기로 인해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로, 퉁명스럽게 덕담을 늘어놓던 그의 모습이 아직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다 해결해 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송 사장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곤 덧붙였다.
“이제 정말 가야겠다.”
이내 재승 역시 고개를 끄덕여가며 답했다.
“네, 연락 올릴게요.”
짧은 이별일 테니 썩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 * *
“어디 보자….”
그 뒤로 재승은 주말에 있을 방송 출연을 위한 준비에만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이 정도면 되려나….”
사실 준비라고 해봐야 자신에 대한 신랄한 악평을 쏟아낸, ‘평론가’와 ‘칼럼니스트들’의 글을 잘 정리한 스크랩북을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 외우는 일만 남았군.”
그러고는 그들의 ‘이름’과 ‘발언’을 암기했다.
죄다 가장 악질적인 칼럼을 쏟아낸 이들이었다.
이들을 이용하여 ‘관심’을 끌어볼 요량이었다.
“먼저 시작한 건 당신들이니까….”
이들은 자신의 복귀에 대한 성패와 브랜드의 흥망성쇠를 이용해 매일 칼럼을 집필해 고료를 받고 있다.
예전에는….
몇몇 평론가들과 칼럼니스트들의 악평에 정신을 다잡지 못하고 마냥 괴로워하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들의 말 몇 마디에 상처입기엔 패션계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어진 느낌이라고 하면 되려나?
“똑같이 돌려주지.”
이번에 출연하게 될 방송을 통해 이들을 공격적으로 언급해 세간의 관심과 이목을 끌어볼 생각이었다.
“좋아….”
그렇게 며칠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고.
어느덧 예정된 방송 출연 당일에 접어들었다.
* * *
프랑스의 유료 채널인 까날 플뤼의 방송국 건물 안에 위치한 스튜디오 소파 위에 재승과 진행자가 나란히 앉은 채였다.
반짝, 반짝….
스튜디오의 내부 곳곳에 놓여 있는 카메라 위로 붉은 빛이 점멸하며,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중이었다.
“언변이 워낙 뛰어나신 터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나 봅니다.”
진행자가 큐 카드를 한 장 뒤로 넘겨보였다.
“리, 다음 질문입니다.”
촬영이 시작된 지 어언 몇 시간이 흘렀으나, ‘인터뷰 형식’의 녹화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이어질 따름이었다.
이들의 입장에서 시청률 보증 수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재승의 출연은 호재였다.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자극적인 질문으로만 꽉 채워진 인터뷰를 만들어 보고자 노력했다.
“이 또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 만한 내용입니다만….”
수입이라든지, 재산이라든지, 은퇴 이후의 생활처럼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질문을 몇 번이고 연달아 건넨 채였다.
“아직도 궁금해하실 만한 질문이 남아있나요?”
그 말에 “물론이죠” 하고 나직이 답한 진행자가, 재승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투로 다시금 질문했다.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러 평론가 및 칼럼니스트 분들이, 리의 복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비치고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다들 기나긴 공백을 이유로 이번 시즌에 참패를 당하게 되실 거라 짐작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말에 재승이 되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될까요?”
“네, 솔직하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같잖습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카메라 렌즈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몇몇 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미로이슬라바, 일본의 키코, 덴마크의 페르닐, 영국의 청, 그밖에도 무수한 분들이 제 실패를 점치고 계십니다.”
이내 진행자가 되물었다.
“만약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께 한 말씀을 드린다면, 어떤 말씀을 드리고 싶으신가요?”
그 말에 재승이 답했다.
“그렇게 당당하면 내기를 하시죠.”
“내기?”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재승이 곧장 덧붙였다.
“아마 ‘디옴’의 객원 디자이너로서 오뜨꾸뛰르 의류를 선보이던 때의 일 같습니다만….”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그때 악평을 쏟아냈던 모 평론가 분과 재미있는 내기를 했었습니다. 그분은 제 실패를, 저는 제 성공을 확신했으니 내기가 성립됐던 거죠.”
“내기라면….”
“제가 업계로부터 다시금 호평을 이끌어낸다면, 출시될 예정에 있는 모든 의류를 구매하시겠다며 엄포를 놓으시더군요.”
“결과는요?”
재승이 시원하게 답했다.
“아마 그분 옷장에는 지금도 제가 만든 옷이 꽉 채워져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카메라를 슬쩍 바라보며 확신에 찬 투로 덧붙였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저와 내기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신 “톡, 톡….” 하고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려 대던 재승이 덧붙였다.
“만약 제가 여러분 뜻대로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서 볼품없는 모습을 선보인다면 100만 달러씩 10곳에 기부하겠습니다.”
“1억 달러를….”
“네, 각국의 소외계층을 위해서 유지 운영되고 있는 여러 기관에 정확히 배분해서 기부하고 그 사실을 인증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재차 물었다.
“그렇게 제 실패를 확신하고 계신 여러분께서는 뭘 거시겠습니까?”
계획대로 그들을 이용해 세간의 모든 ‘관심’을 끌어모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