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74)
블랙 라벨-273화(274/299)
블랙 라벨 273화
블랙 라벨 외전 25화
몇 년 만에 만난 부모님이 부쩍 늙은 것 같아 보인단 생각이 불쑥 뇌리를 스쳤다.
“아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머니의 물음에 재승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이내 어머니께서 재차 말씀하셨다.
“얼른 먹어.”
어머니께서는 과도를 손에 쥔 채로 야무지게 사과를 깎아내고 계셨다.
“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애써 무심한 얼굴로 신문 위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로 재승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건네실 따름이었다.
“일은 잘되고 있는 거냐?”
그 말에 재승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이고야 말았다.
다름 아니라….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 것 같아요.”
얼마 전 파리 패션 위크에서 거둔 성공은 물론이거니와, LVMH 그룹 경영권을 거머쥐게 되었다는 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도 요새 일이 얼마나 잘 풀리고 있는지에 대해 모르고 계시지는 않을 게 더없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마땅히 붙일 말이 없으신가….’
이내 아버지께서 답하셨다.
“그럴수록 겸손해야 한다.”
“네, 아버지.”
“걱정거리 같은 건 없고?”
그 말에 재승이 짧게 답했다.
“물론이죠.”
이윽고 진짜 질문이 나왔다.
“밥은?”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밥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냐?”
재승이 이 질문이 아버지께서 계속 묻고 싶던 ‘진짜 질문’이라 판단한 연유는 마냥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이제야 내리 신문 위에만 고정해 두고 계시던 시선을 옮겨 제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하셨으니까.
“예, 끼니야 뭐….”
재승이 멍하니 되묻던 찰나였다.
“야위었다.”
짧게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괜스레 “큼, 흠” 하고 헛기침을 해보이시곤 덧붙이셨다.
“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또 그 사람들이 아등바등 일해서 먹여 살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끼니는 잘 챙겨라.”
그 말에 재승이 미소 지었고….
“고향 땅에서 타국 나가 일하고 있는 아들 걱정에 매일 잠 설치는 네 엄마 생각도 해주면 더 고맙고.”
연달아 이어진 기분 좋은 잔소리에 재승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때 아버지께서 돌연 읽던 신문을 챙겨 거실을 떠나기에 이르렀고….
“아들.”
어머니께서 소곤소곤 나직한 투로 마치 고자질을 하듯 말씀하셨다.
“저 양반이야말로 머나먼 타국에 나가서 일하는 아들 걱정하느라고 매일 밤 잠 설치는 실정이라니까?”
“아버지가요?”
“요즘에는 눈만 뜨면 프랑스 파리 날씨부터 한 번 살펴보고 사건이나 사고는 없었는지 검색해 보느라….”
이내 재승이 그런 어머니의 말씀을 한 귀로 흘려 들어가며, 부엌에서 냉수 몇 모금을 느릿하게 들이켜고 계신 아버지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아버지….’
문득 아버지께서 택시 운전면허를 내밀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택시 몰면 나랑 네 엄마가 먹고사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 없을 테니 너는 그냥 네 걱정만 하며 살아라.”
전생에는 저런 아버지의 무뚝뚝한 면모가 사무치도록 싫게 느껴졌다.
그 무뚝뚝함 너머에….
애써 감추고 계신 일련의 섬세함과 따뜻함을 살필 여유가 없던 거겠지.
“그래서.”
그때 아버지께서 돌연 고개를 휙 돌려서는, 재승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율이는 잘 크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승이 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얼마 전부터 지금 지내고 있는 펜트하우스 인근에 있는 엄마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엄마 학교?”
“한국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랑 엇비슷한 개념의 유아 보육시설이라고 보시면….”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던 재승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가며 되물었다.
“사진이나 동영상 좀 보실래요?”
한차례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킨 아버지께서, 쪼르르 달려와 안경을 고쳐 쓰셨다.
“보자.”
그리스 인근 지중해의 무인도에서 지내던 시절부터 몇 번이고 느꼈던 사실이라지만….
“언제 이리 큰 겐지….”
손녀 바보가 분명했다.
“나한테도 좀 보내봐라.”
“네? 네….”
“방금 그 사진 다시 보자.”
“네? 네….”
정말 확실했다.
* * *
모처럼 고향의 생가(生家)에 들러 휴식을 취하자니, 마치 신선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빨리 좀 둬라.”
아버지의 닦달에 재승이 “것참” 하고 괜히 이죽거리고는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능청스러운 투로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두는 게 바둑이잖아요?”
“바둑 두던 사람 간 줄 알겠다.”
“이따금 돌을 내려놓고 풍경을….”
“것참, 빨리 좀 두래도 그러네!”
부모님과 식사를 한 뒤 후식으로 과일까지 깎아 먹은 이후로는, 아버지와 바둑을 두면서 모처럼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데….
지중해의 무인도에서 지내며 딱히 할 일이 없는 기간에 바둑을 두거나 기보(棋譜)를 손에 쥔 채로 지냈던 까닭인지 청출어람을 해버렸다.
“자, 두겠습니다.”
예전에는 아버지께서 족히 몇 수는 접어주셔야 호각을 이루곤 했는데 이제는 도리어 재승이 몇 수를 더 깔아주게 됐으니까.
재승이 다시금 백돌을 바둑판 위에 내려놓자, 아버지께서 미간을 한껏 좁혀가며 침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내 TV를 한 번 쳐다봤다가 도로 바둑판을 쳐다보기를 연거푸 반복하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되물었다.
“재승아, 좀 봐드리지 않고?”
그 말에 아버지께서 일갈하셨다.
“승부인데 전력을 다 쏟아야지!”
“계속 지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아슬아슬하게 지는 거 안 보여?”
“재승이가 접바둑 해주잖아요?”
“것참, 엎치락뒤치락한다니까.”
“지면서도 계속 두고 싶은가 봐요?”
“TV나 보지 자꾸 왜 구경을 해?”
“보라고 달린 눈인데 뭐 어때서?”
“그 눈으로 TV나 보라니까!”
두 분 부모님의 설전을 귀 기울여 들어가며 배시시 웃음을 흘려 보인 재승이 조심스러운 투로 되물었다.
“승희는요?”
초저녁 무렵이 지났음에도 동생이 귀가하지 않아서 건넨 물음이었다.
“회사 다니잖아.”
“회사요?”
“그래, 중소기업.”
그 쪼그맣던 게 어느새 훌쩍 커서회사에 다닌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러고 보니 졸업해서 취업까지 할 때가 된 것 같기는 한데….”
이내 어머니께서 고개를 좌우로 내저어가며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백화점 본사에서 일하는데 요즘 회사 일이 바빠서 그런지 매일같이 야근이네….”
백화점 본사?
“엥? 백화점에서 일해요?”
“본사 마케팅 팀일 거야.”
“그런데 왜 말도 안 하고….”
굵직한 국내 백화점 브랜드의 경우 대부분 ‘월플라워’에게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월플라워는 매 시즌 상품의 재고가 없어서 못 파는 브랜드 중 하나였고, 그런 이유로 납품 물량을 맞춰달란 부탁을 해왔으니까.
자신의 언질 한 번이면 친동생인 승희의 회사 생활이 순탄해지는 건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말하지 말래.”
“네?”
“도움받기 싫대.”
재승이 얼떨떨한 얼굴을 해 보이던 찰나였다.
“네 덕분에 학교도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훨씬 편하게 다니면서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하고 대학 생활 잘 마쳤는데….”
말끝을 흐린 어머니께서 조심스레 덧붙이셨다.
“어떻게 또 도움을 받냐더라.”
“가족이잖아요?”
“그냥 승희는 그런 게 싫은가 봐.”
이내 재승이 괜히 이죽댔다.
“괜히 철든 척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어도 성실히 회사를 다니고 있는 승희가 한없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당장 자신이 매달 이체해 주고 있는 용돈만 하더라도 한화로 천만 원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범죄자 낙인이 찍힌 채 도피 생활을 하던 자신을 대신해 부모님의 모든 뒷바라지를 하던….
전생의 ‘승희’가 떠올라 죄책감에 매달 제법 큰돈을 용돈 명목으로 이체해 주고 있었다.
딱히 일을 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며 지내기를 바랐건만, 성실히 회사를 다니는 건 물론.
제 힘으로 회사 생활을 해나가고 싶단 이유로 알리지 않았단 사실이 정말 한없이 기특했다.
“어디 보자….”
이내 재승이 스마트폰을 꺼내서는 곧장 여동생의 번호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 오빠, 뭐야?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화기 너머에서 승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잠시.
“야, 언제 끝나냐?”
재승의 물음에 승희가 답했다.
– 오빠, 한국 들어온 거야?
“언제 끝나냐니까?”
– 한두 시간 정도 후에….
이내 재승이 멋쩍은 양 답했다.
“내가 데리러 갈게.”
– 아냐, 그냥….
“됐어, 데리러 갈게.”
그 말에 승희가 완강히 거절했다.
– 당장 봤을 때 한두 시간 정도 더 걸리겠다 싶은 거지, 한참은 더 지나서 퇴근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집에서….
이내 재승이 짧게 말했다.
“기다리면 되지.”
그러고는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간다, 끊는다.”
말을 마친 재승이 아버지를 슬쩍 바라보며 나지막이 되물었다.
“아버지, 차 좀 써도 되죠?”
이내 아버지께서 고개를 끄덕이곤 답하셨다.
“차는 마음대로 하고 두던 바둑 다 두기 전까지는 나갈 생각 마라.”
이내 재승이 고개를 내저으며 짧게 답했다.
“제가 졌습니다.”
“기권이냐?”
“예, 기권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제 외투를 집어 들었고….
“아이고, 이 화상아. 그렇게 이기고 싶었어요?”
“이겼으면 이긴 거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다시금 아버지와 옥신각신하시던 어머니께서 되물었다.
“승희 데리러 가려고?”
이내 재승이 곧장 답했다.
“네, 데리러 가려고요.”
* * *
한편.
“이승희 씨.”
중년 남성이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는 이승희를 빤히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회사 일이 장난이야-?”
근래 실적 부진과 인사 평가 발표 시기가 겹친 까닭에 마냥 예민해진 ‘부장’이 괜한 화풀이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씨발, 이게 보고서야?”
“시정하겠습니다….”
“이게 보고서냐고 묻잖아?”
“정말 죄송합니다….”
이내 그가 재차 이죽거렸다.
“이승희 씨, 회사가 우스워요?”
“아뇨, 제가 금방 다시….”
“그런데 이딴 걸 보고서랍시고.”
말을 마친 그가 서류철을 바닥에 휙 내던졌다.
“뻔뻔하게 제출을 해?”
그가 단단히 화가 난 이유는 몹시 간단하기 그지없었는데.
“씨발, 내가 진짜….”
다음 시즌 의류 마케팅 주요 안건인 물량 확보 때문이었다.
특히 몇몇 프리미엄 브랜드 측의 물량에 락이 걸렸다.
해외 여러 유통 플랫폼이 국내에 입점을 해버렸고….
그 여파로 국내 백화점 브랜드에 주어지던 물량이 씨가 말랐다.
물론 일개 평사원에 불과한 승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인사 고과에 가장 크게 반영되는 매출의 낙폭이 심해지고, 앞으로는 더 떨어지리란 예측이 불거지면서 같은 팀 직원들을 쏘아붙여 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떻게 해결할지 해결 방안까지 담아낸 게 보고서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고! 내가 한 말이 뭐 얼마나 어려운데?
“예….”
“오늘 집에 갈 생각하지 말고 다시 써서 제출해요. 이승희 씨 말고도 의류 마케팅 팀 직원들 모조리 다 야근이야!”
그때였다.
“당신 뭐야?”
재승이 물었고….
“지금 대체 뭐 하는 겁니까?”
재승의 곁에 서 있던 S백화점 본사 임원이 경악을 금치 못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이냐니까!”
그 말에 부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본사 임원을 들여다보며 되물었다.
“보고서가 미흡해서….”
그러고는 임원 곁에 서 있는 재승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고….
“어라….”
TV에서 몇 번이고 본 기억이 있단 사실을 떠올린 그가 중얼거렸다.
“이재승 디자이너….”
그때였다.
“오빠…?”
이승희가 입을 뗐고….
“아저씨.”
재승이 부장에게 으르렁대듯 낮은 목소리로 스산하게 되물었다.
“당신이 뭔데 내 동생한테 그렇게 화를 내냐니까?”
“동생이요…?”
“뭔데 욕지거리까지 섞어가며 귀한 동생한테 화를 내냐고!”
재승의 고함에 층 전체가 한없이 고요해지기를 잠시.
“월플라워 지점 전부 철수합니다.”
재승의 말에 임원이 사색이 된 채 굽실거렸고….
“정말 죄송합니다….”
반면 재승은 단호했다.
“죄송해하실 거 없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LVMH 그룹 휘하의 모든 브랜드들이 전부 철수할 테니 그리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입점 계약이 이루어져 있는데….”
“그럼 계약 기간 내내 속옷 한 장 납품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알고 계시면 편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부장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 모든 연줄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다른 브랜드들 역시 전부 철수하도록 만들 테니 그렇게 알고 계시죠.”
이내 임원이 지문이 닳도록 양손을 문질러댔고….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해!”
그의 일갈에 부장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손바닥을 비비기 시작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이내 재승이 승희를 바라봤고.
“야, 집에 가자.”
짤막하게 덧붙였다.
“엄마가 갈비찜 해놓으셨더라.”
그 말에 승희가 설움이 복받친 양 고개를 끄덕이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을 휙 훔쳐내며 낮게 답했다.
“응, 맛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