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75)
블랙 라벨-274화(275/299)
블랙 라벨 274화
블랙 라벨 외전 26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어떻게 된 거야?”
재승의 물음에 승희가 고개를 슬쩍 내저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긴.”
본사 건물 정문 앞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던 찰나, 우연히 지금까지 몇 번이고 공식석상에서 마주했던 임원과 우연히 맞닥뜨렸다.
왜 기다리냐는 물음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고 마냥 우물쭈물거리고 있기를 잠시.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여동생이 정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바깥에서 기다리게 할 수 없다며 생 호들갑을 떨어댔고.
‘올라가서 보니 그런 상황이었지.’
사실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혼나고 있는 여동생을 보니 화가 났을 뿐.
“대체 무슨 일이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지 말고 자세히….”
이내 승희가 말을 끊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덤덤하게 답한 승희가 자초지종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인사 평가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사소한 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
다만 그 수준이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심각하고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본다면 세상 어디에서든지 으레 있음직한 일이 분명했다.
다만 내 가족에겐 있지 않았으면 바라는 일이라는 게 문제지.
“그나저나, 어쩌면 좋지.”
승희가 창 너머를 바라보며 꺼낸 말에 재승이 나지막이 되물었다.
“뭘 어떻게 하면 좋아?”
“그냥 나와 버려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재승이 짧게 덧붙였다.
“아무 문제 없도록 해줄게.”
어쩐지 듬직하게 느껴졌던 까닭에 승희가 피식 미소를 머금던 찰나.
“오빠, 정말 납품 안 할 거야?”
앞서 재승이 회사 안에서 소리쳤던 내용이 거듭 신경 쓰였기에 건넨 물음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지.”
짧게 말한 재승이 덧붙였다.
“한국 시장 매출 점유율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낮은 편도 아니잖아? 더군다나 여러 사람들 생계가 달린 문제기도 하고….”
당장 홧김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감정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 근무할 거야?”
이내 승희가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글쎄,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냥 철판 깔고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계속 출근할 순 없는 노릇이고….”
그 말에 재승이 답했다.
“그래, 이참에 그냥 그만둬.”
말을 마친 재승이 덧붙였다.
“얼마고 푹 쉬다가 다시 일하고 싶어지면 새 일자리 소개시켜 줄게.”
이내 그녀가 되물었다.
“새 일자리?”
“그래”
“어딘데?”
“있어.”
그러고는 덧붙였다.
“일 못할 만한 곳을 소개해 주지는 않을 거 아냐?”
“그래도 어떤 회사인지는 들어봐야 할 거 아냐.”
이내 재승이 답했다.
“월플라워.”
“싫어.”
“대체 왜?”
“그냥.”
재승이 재차 되물었다.
“낙하산이 싫은 거야?”
“응, 더 도움받기 싫어.”
“그럼 면접을 보든가.”
어차피 이미 몇 번이고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앞으로는 재승의 도움을 더 받고 싶지 않단 이유로.
관련사에서 근무 중이라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으니까.
“경력직 채용 기간이던데 정말로 말 안할 테니까 면접 한 번 봐.”
“그래도….”
“알다시피 한국 본사 오는 일도 없거니와 말 안 하면 알 사람도 없어.”
말을 마친 재승이 덧붙였다.
“그리고 동종업계 내에서 근무 조건이라든지 복리후생만큼은 따라올 곳이 없을 만큼 좋은 편이잖아.”
그 말에 승희가 망설이다가 낮게 되물었다.
“내가 무슨 경력직이야?”
이내 재승이 답했다.
“이번 경력직 면접 부서.”
“응?”
“납품 관리 부서거든.”
재승이 재차 덧붙였다.
“합격하면 아까 그 부장인가 뭔가랑 주객이 아예 전도될걸?”
그간 쌓인 게 많았던 까닭일까?
“그래?”
승희의 고민이 길어졌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다 같이 쇼핑이나 갈까요?”
재승이 갑작스럽게 꺼내 든 말에 어머니가 되물었다.
“이 이른 아침에?”
그러고는 승희를 바라보며 다시금 말씀하셨다.
“그리고 승희는 출근해야….”
그 말에 승희가 답했다.
“저 회사 때려 치웠어요.”
“응…?”
“그냥 그렇게 됐어요.”
이내 재승이 재차 화제를 돌렸다.
“다시 프랑스 돌아가기 가기 전에 식구들 옷이라도 몇 벌씩 사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물론 모처럼 한국에 방문한 김에 가족들의 옷장을 꽉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제 느닷없이 사직서를 내버린 꼴이 된, 승희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기도 했다.
“오빠.”
깨작깨작 반찬을 집어먹고 있던 승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근처 H백화점.”
“오늘 문 안 열어.”
말을 마친 승희가 덧붙였다.
“나 어제까지 계열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거 잊었어?”
“그런데?”
“H백화점은 원래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휴점일이야.”
이내 재승이 재차 답했다.
“그날 휴점 아닌데?”
“그럼?”
“VIP 행사 날이야.”
대외적으로는 ‘휴점일’로 알려져 있다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백화점 문을 닫아놓고, 극소수의 우량고객을 위한 행사를 주최할 뿐.
그리고-.
재승은 이제 해당 행사에 초대를 받을 수 있는 우량고객이 된 상황.
“가자.”
재승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짧게 덧붙였다.
“쇼핑하러.”
* * *
그렇게 재승이 모처럼 식구들과 다 함께 집 근처에 자리한 H백화점으로 향했고.
“초대장입니다.”
재승이 모바일로 전송받았던 VIP 경매 행사 초대장을 주차장 입구에 서있던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확인을 마친 직원이 ‘발렛파킹’을 해주었다.
“들어갈까요?”
재승이 말한 대로,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로 알려진 휴점일은 영업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닌 우량고객만을 위한 행사날이었고.
“와, 이게 뭐야….”
승희가 놀라 중얼대자 재승이 재차 말을 이었다.
“타 부서 업무여서 전해 들을 일이 없었나 본데 원래 이런 식이야.”
그 말에 어머니가 되물었다.
“재승아, 그런데 한국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일도 많이 없었을 텐데 고객 등급은 어떻게 높인 거야?”
이내 재승이 곧장 답헀다.
“원래 구매 금액 기준만 따지는 게 아니라 계열사 임원이라든지, 관련 업계 내에서 입지가 있거나 친분이 있으면 VIP 등급 적용을 해주기도 하거든요.”
승희가 곧장 끼어들었다.
“와, 그럼 돈이 아니라 권력으로 받아낸 초대장이라는 거네.”
그때였다.
“이재승 고객님 맞으시죠?”
전담 큐레이터가 다가왔다.
“오늘 쇼핑은 제가 안내를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매 행사는 우량고객이 정처 없이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박물관처럼 전담 큐레이터가 붙어 에스코트를 해주는 형식이었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쇼핑이 시작되자 재승은 제 식구들과 함께 입점해 있는 프리미엄 브랜드 매장을 하나씩 둘러보기에 이르렀다.
‘DP 방식이 다 다르네….’
그런 와중에도 직업 정신을 미처 내려놓지 못한 채, 매장 내부 디스플레이나 진열 현황 따위를 낱낱이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상황.
“다음 매장은….”
이내 큐레이터가 망설였다.
“월플라워네요?”
“네, 그렇습니다.”
“여긴 건너뛰죠.”
만약 느닷없이 자신이 나타나 얼굴을 비춘다면 분명 직원들도 한없이 불편해할 터였다.
“다음은….”
그때 승희가 말했다.
“헐, 쟈넬이네?”
일전에 재승이 한 시즌간 객원 디자이너로서 일했던 프리미엄 브랜드 쟈넬이었다.
“갖고 싶은 거 있어?”
“여기에는 있을 것 같아.”
“그럼 한 번 둘러보자.”
그렇게 재승이 쟈넬 매장 안으로 들어섰고….
얼마 전 파리 패션위크에서 공개된 신상들이 보였다.
“헐, 대박. 벌써 신상 들어왔네….”
본래 이처럼 구하기 힘들고 인기가 많은 신제품들은, 일반 고객들에게 구매 순서가 돌아가기에 앞서 VIP 고객에게 먼저 판매되는 식이었다.
“이번 시즌 가방들이네.”
짧게 답한 재승이 내부를 지그시 둘러보기 시작했고.
승희와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매장 내부를 탐방했다.
“에이, 귀찮아.”
그때 아버지께서 매장 내에 비치된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대충 네가 보기에 좋은 옷으로 사다 주면 되지, 얼마나 걸릴 줄 알고 나까지 달고 와가지고….”
“금방 끝날 거예요.”
“지금도 옷 한 벌, 가방 하나를 못 고르고 계속 망설이기만 하는데 금방 끝나기는 뭘 금방 끝나?”
그런가?
“엄마, 이거 어때?”
“어머, 예쁘다.”
“엄마, 그럼 이건?”
“그것도 예쁘네.”
이내 재승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낮게 답했다.
“이대로라면 한참은 더 걸릴 것 같긴 하네요.”
“거 봐라.”
“이거 수를 쓰지 않으면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요.”
말을 마친 재승이 곧장 승희를 불러 세웠고.
“승희야.”
“응?”
본론을 꺼내 들었다.
“마음에 드는 것 좀 골라봐.”
“전부 다 마음에 들어서….”
“전부 다 마음에 든다고?”
그 말에 승희가 고개를 몇 번이나 연달아서 끄덕이고는, 신이 잔뜩 난 것 같은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이번 시즌 쟈넬 가방들 완전 대박 아니야? 어쩜 이렇게 예쁘게 잘 뽑았지.”
“우리 가방은?”
“물론 월플라워 핸드백도 끝내주게 예쁘긴 하지. 그런데 그건 종류별로 다 보내줬잖아.”
데빌 백을 제외한 모든 상품은 진즉 모델별로 하나씩 보내준 바 있었다.
“그래서 전부 다 갖고 싶다고?”
“그건 말도 안 되고.”
“말이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말을 마친 재승이 직원을 정중히 호출했고.
“네, 고객님.”
재승이 턱짓으로 진열대 처음부터 끝까지 놓인 가방을 턱짓으로 쭈욱 가리켜며 덧붙였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네?”
“전부 다 주시겠어요?”
“네?”
“네, 전부 다 주세요.”
그 말에 승희가 경악했다.
“오빠?”
연달아 어머니가….
“재승아?”
또, 아버지가….
“허, 이렇게 쇼핑하면 금방 끝날 것 같기야 하다만은….”
마지막으로 직원이 경악했다.
“저, 전부 다 말씀이시죠?”
다음 순간.
“자, 이제 다음 매장으로 가죠.”
재승이 무덤덤한 투로 말하고는 가장 먼저 매장 바깥으로 나서며 짧게 덧붙였다.
“빨리 쇼핑 마치고 아침 먹어야죠.”
속전속결로 쇼핑을 마친 뒤 늦지 않게 아침을 먹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