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81)
블랙 라벨-280화(281/299)
블랙 라벨 280화
블랙 라벨 외전 32화
토미가 대동한 촬영 팀이 순식간에 집무실 내부에 빔 프로젝트를 설치했다.
“바로 시작할까요?”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우선 지난번 촬영들과 마찬가지로 24시간 내내 리를 따라다니며 밀착 촬영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보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4시간 내내 출연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모든 상황 및 장면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방식은 사실 장단점이 명확했다.
우선 좋은 장면을 뽑아낼 수 있을 확률이 극도로 증가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촬영자나 출연자의 ‘피로도’가 격상한다.
출연자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지켜볼 카메라 탓에 피로를 느끼기 쉽고, 그 과정은 촬영자에게도 부담이 될 터.
심지어 촬영자 입장에서는 촬영을 모두 마친 이후에도, 방대한 양의 촬영본을 모두 검수해야 하는 노동이 뒤따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토미의 물음에 재승이 답했다.
“저야 괜찮습니다만….”
토미가 득달같이 답했다.
“저희도 괜찮습니다!”
방송국에서 독립해 나온 이후 무작정 설립한 회사, ‘파워 필름’ 사의 경영난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노동의 총량이 많아지건 말건,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나 마찬가지.
다 무너져 가는 회사에 자금이라는 이름의 혈액을 수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보니 조건을 따질 생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초대규모 프로젝트를 잘 마치고 나면 또 다른 일거리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올 게 분명했다.
다큐멘터리를 인상 깊게 시청한 여러 업체는 물론 대형 방송국과도 거래를 틀 수 있을 테니까.
“열정적이시네요?”
“그야 물론이죠!”
토미가 거듭 말을 이었다.
“그다음엔 저희가 염두에 두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색감이나 채도 등을 간략하게 정리해 봤습니다.”
연달아 몇 가지 영상이 재생됐고….
“괜찮네요.”
재생된 영상들은 본래의 색과 비교해도 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와중에, 보는 이로 하여금 일련의 몽환적인 느낌을 야기하는 방식의 편집을 거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이번 프로젝트와 얼추 맞아떨어지는 편집 방식이 아닐까 싶군요.”
그렇게 마치 커스텀 테일러의 제작을 외뢰할 때처럼, 토미가 여러가지 사안에 대한 샘플을 보여주며 재승의 의견을 구하는 식으로 결정을 내려갔고.
“이제 예산에 관한 논의를 해봐야겠습니다만….”
그 말에 재승이 짧게 답했다.
“프리.”
이내 토미가 얼떨떨한 투로 되물었다.
“예…?”
그 말에 재승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꿰차고 앉은 의지의 팔걸이 부분을, 연신 “톡, 톡.” 하고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얼마가 들어도 상관 없으니 그저 퀄리티 높은 작업물을 뽑아내는 데만 주력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예….”
“우선 사업용 카드를 한 장 지급해 드릴 테니 영수증 처리만 꼼꼼히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군요.”
토미가 나직이 답했다.
“예, 새겨듣겠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한도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내 재승이 되물었다.
“예산이 많이 필요하신가요?”
그 말에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예.”
토미가 치밀어 오르는 긴장감을 애써 억눌러 가며 소신 있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영상 매체들이 으레 그렇지만 투입한 자본의 양에 따라 퀄리티가 결정되지 않습니까?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그 밖에도 기타 등등….”
재승이 계속 말해 보라는 양 손짓을 해 보였고….
“만약 정말 얼마가 들어가도 상관없다면,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쓰고 싶은 마음입니다. 예를 들면 인력부터 시작해서, 장비의 질이라든지, 편집 과정에서 투입하게 될 기술력이라든지….”
재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음껏 쓰시죠.”
“그런데 금액이….”
토미가 재차 덧붙였다.
“싼 금액으로 처리하려고 해도 마찬가지로 끝이 없겠지만, 많은 금액을 투자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끝이 없는 지라….”
그러고는 재승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우선 고가의 장비 같은 경우에는 몇몇 현지 업체를 통해 렌트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치고, 핵심 인력은 다큐멘터리의 흥행 결과에 따라서 퍼센테이지로 임금을 지불하면 초기 투자 금액을 대폭 절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그 말에 재승이 생각에 잠겼다.
“둘 다 반대입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장비를 렌트하게 되면 자유롭게 진행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가 불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일정을 잘 조율하면….”
“고가의 촬영 장비가 얼마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렌트를 기다려야 하는 일은 사절입니다.”
비록 값은 모른다지만 제 시간 만큼 비싸지는 않으리라 확신했다.
“또 서로 사활을 걸고 제작하는 다큐멘터리의 흥행 수익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는 건 비효율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군요.”
“그럼….”
“차라리 초기에 만족할 만한 임금을 지불하고 향후 발생 수익에 대해서는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시죠.”
토미가 곧장 되물었다.
“예, 하지만 장비 같은 경우에는 그렇다고 단발성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구매하는 게 마냥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만.”
그 말에 재승이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
“제가 파워필름을 인수하겠습니다.”
재승이 재차 덧붙였다.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해야 할 테니 한 번 장비를 인수해 둔다면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많은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좋은 점을 하나 꼽자면, 가성비를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해야 할 필요가 없단 점이겠군요.”
재승이 마지막 말로 쐐기를 박아넣었다.
“금액은 원하는 만큼 맞춰 드릴 테니 내일까지 서류를 준비해서 다시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예….” 하고 얼떨떨한 투로 답한 토미가 뒤늦게 정신을 다잡고는 잡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토미가 설립한 부실한 제작사 파워 필름이 재승의 손에 쥐어졌다.
* * *
그로부터 며칠만에 모든 일이 진행됐다.
우선….
파워 필름 직원들의 거처 문제가 해결됐다.
“리 말이에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끈하고 배포가 큰 느낌이네요. 회사를 아예 인수해 버린 것만 해도 그렇고, 저희 거처 문제 때문에 호텔 한 층을 통째로 빌려버린 점만 놓고 보더라도….”
심지어 촬영 도중 컨디션 관리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모든 직원들의 객실을 스위트 등급 이상으로 잡아준 채였다.
그뿐이랴?
촬영진의 아지트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룻밤 숙박비가 수백만 원에 달하는 펜트하우스를 통째로 임대해 주었다.
“회사를 통째로 사버린 게 더 놀랍지….”
또한 사전에 약속했던 대로 파워 필름 측에 한화로 대략 이십억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51%의 지분을 매입하며, 경영난으로부터 단숨에 구조해주기까지 했다.
“은인이야, 은인….”
나지막이 중얼거린 토미가 박스를 뒤적거렸고….
“장비는 전부 확인했지?”
그의 물음에 제작사 측 직원들이 재승이 구매해 준 고가의 촬영장비 물량을 다시금 꼼꼼히 검수해보기 시작했다.
“네, 완벽하네요.”
재승은 심지어 이번 촬영에는 필요하지 않은 류의 장비들마저 잔뜩 구매해 줬고, 이동 및 운반 문제를 고려해 미국 본사로 배송까지 시켜준 상황이었다.
“왠지 운명이 바뀐 것 같아….”
낮게 중얼거린 토미가 호텔 창 너머를 바라봤다.
첫 촬영날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내 그가 “좋아….” 하고 중얼거리기를 잠시.
“자, 오늘 쓸 장비들 제대로 작동하는지만 한 번씩 확인해 보고 곧장 출발하자고.”
첫 촬영을 위한 준비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이개 모지?”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어난 율이가 집안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 중, 거실에 설치된 카메라를 발견한 듯 기웃거렸다.
“정말 괜찮겠어?”
집 안에도 카메라를 설치하고 싶다는 제작사의 부탁이 있었다.
애슐린이 흔쾌히 수락해 준 덕에 진즉에 설치를 모두 마친 채였으나….
재승은 행여나 자신 때문에 애슐린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문제없어.”
“정말?”
“잊은 거야?”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나는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하던 사람이잖아?”
그 말에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하긴….”
애슐린의 본업은 모델이었다.
빅토리아 시크릿 소속의….
잘나가는 탑급 모델이었지.
“압바, 이개 모애요?”
율이가 건넨 물음에 재승이 짧게 답했다.
“카메라가 뭔지 알지?”
“웅, 사진 찍는 고야.”
“그래, 이것도 카메라야.”
한차례 “글쿠나” 하고 답한 율이가 카메라에 대고 말을 이어나갔다.
“안녕하새요. 저는 율이임미다. 내 사리고 편식을 절때 하지 안는 착한 어린임미다. 반가씀미다.”
이내 재승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카메라를 어색해하지 않는 게 엄마를 훨씬 더 많이 닮은 모양인데?”
“당신이라고 해서 카메라를 어려워하거나 하지는 않잖아?”
그 말에 재승이 재차 답했다.
“그럼 서로를 적당히 닮았나 보네.”
이내 재승이 현관으로 향했고…
“이제 슬슬 가봐야겠어.”
“응, 첫 촬영 잘하고 와.”
곧장 출근길에 올랐으나….
“이건 율이가 잴 조와하는 인형임미다.”
율은 여전히 거실 카메라와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어 보일 따름이었다.
“내가 못살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애슐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 * *
그날 저녁, 첫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
사실 촬영이라고 해봐야….
몇 분짜리 짧은 인터뷰가 전부였다.
신규 브랜드 카르도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는 개인 인터뷰 장면을 하나 따낸 이후로는, 그저 재승의 하루 일과를 고스란히 담아낸 게 고작이었으니까.
“이제 퇴근하시는 거죠?”
자정이 가까운 시간.
“네, 내일은 오전 일찍 움직여야 해서요.”
그 말에 토미가 답했다.
“그럼 잠시 함께 댁에 들러도 되겠습니까?”
“집에요?”
“설치해 둔 카메라들의 테이프 교체 때문에요.”
아무래도 24시간 주기로 테이프를 교체하고 매일 촬영된 분량 중 쓸 만한 장면을 골라내려는 것이었다.
“네, 그러시죠.”
그렇게 재승과 토미가 함께 퇴근길에 올랐고…
“테이프만 회수해서 곧장 돌아가겠습니다.”
재승과 식구들이 기거 중인 펜트하우스에 발을 들인 토미가, 곧장 테이프를 모두 회수하고는 새로운 테이프를 끼워 넣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첫 촬영 날이 무사히 흘러갔다.
아니….
재승의 하루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 모니터링을 해봐야겠군….”
반면, 토미에게는 오늘 촬영한 모든 분량의 모니터링이라는 중요한 일과가 남아 있는 채였다.
* * *
촬영 팀 아지트로 돌아온 토미가 에너지드링크를 홀짝이며, 오늘 촬영한 장면들을 쭉 살펴보기 시작했다.
“좋아….”
재승을 따라다니며 촬영한 분량의 경우에는, 중요한 사건이나 쓸 만한 장면을 건졌을 때마다 시간을 기록해 둔 덕분에 금세 모니터링을 마칠 수 있었다.
다만 재승과 식구들의 거처 내에 설치해 둔 카메라에 촬영된 영상들은, 1.5배속을 해두고 5초 단위로 스킵해 가며 일일이 모두 살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동 트기 전에는 끝이 나려나….”
그렇게 모든 카메라에 담긴 장면들을 동시에 화면에 띄워둔 채로 모니터링을 이어나가던 토미가 별안간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왜 그러세요?”
제작사 직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니, 리의 딸인가 본데….”
토미가 재차 중얼댔다.
“엄청 귀여운데?”
율이가 거실 카메라 앞에 주저앉아 연신 무어라 말을 붙여오는 중이었다.
– 이건 제 친구 곰인형임미다.
– 아빠가 사조써요.
– 맨날 율이랑 가치 자고 있슴미다.
이내 직원들이 동조한다는 양 답했다.
“그러게요,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미인인데요?”
“그러고 보면, 리도 인물이 훤칠한 편이잖아?”
그때였다.
“어라?”
토미가 재차 중얼댔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예? 갑자기요?”
“아니, 오히려 다들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지?”
“아마 그렇겠죠?”
토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이거야….”
그러고는 소리쳤다.
“이거라고!”
흥행의 보조 수단이 될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