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83)
블랙 라벨-282화(283/299)
블랙 라벨 282화
블랙 라벨 외전 34화
율이 또래 아이들은 으레 아름다움에 관심을 보이게 마련이었다.
이를 테면, TV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공주 캐릭터라든지….
유명 팝 스타나, 모델, 배우 등을 동경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지.
“나두 하고 시퍼!”
율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두 티비 할래!”
TV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이토록 강력하게 피력할 줄이야.
애슐린 역시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연신 재승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 따름이었으니까.
“당신, 안 도와줄 거예요?”
반면, 재승의 생각은 확고했다.
“나는 어찌 됐든 율이 의견을 존중해 주고 싶은 입장인데.”
“아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잖아요?”
“그래도 저렇게까지 하고 싶다는데 무작정 반대할 수는….”
논쟁은 밤이 늦도록 이어졌고….
“율이도 TV 나갈 거야! 왜냐면은 애쁜 옷이랑 머리띠랑 보여주고 시퍼!”
율이의 고집은 쉽사리 꺾이지 않을 것처럼만 보였다.
“엄마두 해꼬 아빠도 해짜나! 율이만 한 번도 못했는대요!”
그리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 한국 속담처럼….
“하아….”
애슐린이 백기를 들었다.
“그럼 토미한테 다큐멘터리 장면 사이사이에 율이 영상을 넣어도 된다고 전달한다?”
“그래, 한 번 얼굴을 비췄다가 고생을 해봐야 내 말을 이해하겠지.”
“어쩌겠어? 대중 앞에서 미를 뽐내고 싶어 하는 모계 유전자를 원망해야지.”
그렇게 율이의 다큐멘터리 출연이 결정됐다.
* * *
해당 사실을 전달받은 파워 필름의 CEO이자 메인 디렉터인 토미가 활짝 웃음 지었다.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이미 이번 다큐멘터리가 기록적인 흥행을 거두기라도 한 양 들뜬 모습을 보였다.
“초판을 잔뜩 생산하는 게 좋겠습니다. 보나마나 날개라도 돋친 것처럼 판매될 텐데, 괜히 판매 공급량을 제한해 유통 순환 속도를 늦출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한참을 떠들어 대던 그가 지금 이 순간마저도 모두 카메라에 담기고 있단 사실을 떠올리곤 “아” 하고 침음하고는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정은….”
재승이 짧게 답했다.
“그룹 휘하 브랜드 소속 디자이너들 중 카르도의 런칭을 반대하는 분들과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하는 날입니다.”
그 말에 토미가 자연스럽게 진행을 이어나갔다.
“순탄하지 않은 하루가 예상되는군요.”
재승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곧장 답했다.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사실 그룹 내 브랜드는 서로 경쟁하는 시스템으로 오래도록 유지되어 왔고, 각기 다른 브랜드를 맡고 있는 디자이너들은 화합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정보의 공유는 곧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절하로 이어질 수 있는 민감한 대목이 분명하니까요. 그들이 원하는 건 현재 맡고 있는 브랜드의 독보적인 성공일 테니 반대 의견을 펼치시는 분들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말에 잠시간 생각을 정리해 보던 토미가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막 경영권을 쥐게 된 그룹의 매출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무리한 결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재승이 짧게 답했다.
“예, 어쩌면 도리어 그룹 전체에 타격을 줄 수도 있는 무모한 결정일지 모릅니다. 굳이 많은 브랜드에서 각기 다른 아이덴티티의 제품을 소비하는 대신, 카르도 하나만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니까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다만 설령 카르도가 그룹 매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하더라도 그 여파는 한시적일 겁니다. 카르도는 앞으로 영구히 존속될 브랜드가 아니라 이벤트성으로 짧게 론칭됐다가 사라질, 또 언젠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를 이벤트성 브랜드에 불과하니까요.”
“조금은 무모한 프로젝트로군요? 감당해야 할 리스크는 큰데 정작 리턴은 불확실하고, 심지어 역효과가 발생해 매출에 타격을 입게 될 지도 모를 상황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도 카르도 프로젝트를 굳이 강행하시는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저는 이번 카르도 프로젝트가 패션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좋은 결과를 거둔다면 전례가 없는 위대한 작업으로 기억될 테고,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두고두고 회자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혁신이라 불릴 만한 성과를 낸 디자이너들은 백 년이 넘도록 회자되기 일쑤였다.
쟈넬의 오너 디자이너였던 코코 쟈넬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녀가 제안한 오뜨꾸뛰르와 H라인 치마들은 아직까지도 이따금씩 언급되곤 했으니까.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협력해 역사에 남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재승이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카르도의 핵심입니다.”
심지어 한차례 데빌백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에 판매되는 초고가 의류로 매출을 올려 본 재승은….
“물론 매출 추이도 긍정적일 것이라 예상하고요.”
결과 역시 나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저벅, 저벅-.
그렇게 재승이 집무실을 빠져나와 미팅 장소로 향하기 시작했고….
“움직이자고.”
토미를 필두로 한 카메라맨들도 재승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재승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윽고 재승이 브랜드하우스 바로 앞 대로변에 세워진 롤스로이스 세단 차량의 뒷좌석에 올라탔고….
카메라맨 중 토미가 유일하게 재승의 바로 옆자리에 올라타서는 능청스러운 투로 물음을 건네오기에 이르렀다.
“이 차량이 바로 그 화제의 차량이군요?”
재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빌보드 스타가 되어버린 친구에게 선물 받은 롤스로이스입니다.”
이내 운전기사가 눈치껏 ‘리, 윈, 롤스로이스’를 재생시켰고….
“가시는 길에 혹시 친구분과의 일화를 간략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다큐멘터리의 좋은 소스가 되리라 판단한 토미가 득달같이 건넨 물음이었다.
다름 아니라….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리’라는 디자이너의 삶을 보여볼 계획을 품은 까닭이었다.
‘리를 소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거야….’
세간은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신진 디자이너 ‘리’에 대해 짙은 호기심을 느낌이 분명했다.
다만 공개된 정보라고 해봐야 전부 인터넷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각과 같은 자그마한 정보들에 불과한 실정이었으니….
만약 카르도의 런칭 과정과 더불어 리의 삶을 잘 녹여낸다면 분명 기록적인 흥행을 거둘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따님을 출연시키자고 부탁드린 이유도 이 때문이었으니….’
이내 재승이 답했다.
“예, 뭐….”
그러고는 덤덤한 투로 이제 빌보드 스타가 되어버린 ‘영국’과의 첫만남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게 아마 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그냥 덩치 크고 운동은 잘해도 공부는 못하는 친구였어요. 그러다가 제가 디자이너라는 꿈을 꾸기 시작할 무렵, 거리 노점에서 칸예 이스트와 디자이너의 협업 영상을 보여줬고, 갑자기 네가 디자이너를 하면 본인은 힙합 아티스트를 하겠다고 말하더군요….”
이미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두 사람의 서사가 이어지자….
‘대박이군….’
토미는 행여나 카메라가 흔들리기라도 할세라 숨까지 참아가며 덤덤하게 일화를 풀어놓고 있는 재승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대중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스토리텔링이라고 확신하고 또 확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친분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많지 않을 테지만, 자세한 사연을 아는 이들 역시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가 언젠가 녀석이 대뜸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무너지면서 음악을 배울 기회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때 저는 고교 재학 중이었는데 다행히 월플라워를 한국에 런칭하고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여유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적어도 무리하면 곤란한 친구는 도와줄 수 있는 수준은 됐죠.”
토미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 설마…?”
재승이 어깨를 들썩여가며 덤덤한 투로 말했다.
“녀석이 음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작업실과 작업 장비들을 선물해 줬습니다. 충치처럼 작업실 안에서 썩은 다음에 끝에는 금이 되라고 말해줬죠. 또, 언젠가 음악을 통해 수익을 올리기 시작한다면 천천히 갚으라고 말했고요.”
그가 소름이 돋는다는 양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그의 가사에 자주 등장하는 ‘꿈을 사 준 친구’가 바로 리였군요?”
이미 힙합이란 문화에 몰입해 소비하는 이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마도요.”
이내 토미가 되물었다.
“그래서 그 당시 베푼 호의에 대한 상환이 끝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작에 끝났다고 생각합니다만 계속 갚기 위해 노력하더군요.”
그 말에 재승이 롤스로이스의 고급 가죽 재질 시트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그 노력 위에 우리가 앉아 있네요.”
토미가 “허” 하고 침음을 흘렸다.
‘이번 다큐는 무조건 대박이겠어….’
비단 리라는 디자이너의 저변을 둘러싼 모든 걸 알고 싶어 하는 팬들만이 아니라, 아예 모르는 이들도 다큐를 보면 팬이 되리란 확신이 들었다.
스으으윽-.
그때 부드럽게 나아가고 있던 롤스로이스 세단 차량이 어느 큼직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LVMH.
카르도 런칭에 반대한 디자이너들과 만나기로 한 미팅 장소였다.
“자, 도착했네요.”
재승이 버튼을 눌러 세단 차량의 문을 열었고….
“그럼 이제 결판을 지으러 가볼까요?”
특유의 꼿꼿한 걸음걸이로 건물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토미는 먼발치에서 그런 재승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