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9)
블랙 라벨-28화(29/299)
블랙 라벨 28화
29. 두 번째 첫 만남, 영입 계획
다음 날, 재승은 학교 수업을 마치기 무섭게 곧장 송 사장이 운영 중인 태양사로 향했다.
“아직 앞서 오신 손님분과 이야기 중이셔서요.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접객을 담당하고 있는 듯 보이는 젊은 여직원이, 캔 커피 한 개와 함께 건넨 물음이었다.
“네.”하고 나긋한 투로 답해 보인 재승이, 이내 샘플 공장 내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미테이션 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면서, 운영하던 공장을 정리했다고 했었지….’
참고로 이곳 태양사는 재승 역시 처음 방문해 보는 곳이랄 수 있었다.
재승이 전생에서 송 사장을 처음 만났던 때, 송 사장은 이미 이곳을 정리한 뒤였으니 말이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예전에 꽤 잘나가는 샘플 공장을 운영했었다는 말을 몇 번 전해 들었던 게 전부였다.
공장 안은 꽤 깔끔했다.
널찍한 공장 안, 30·40대 여성 직원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열심히 미싱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노련미가 엿보이는 몇몇 직원들은 이미테이션 의류를 만들고 있었고, 나머지 직원들은 의뢰받은 샘플을 제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곳곳에 *‘드레이핑(*Draping: 입체재단)’용 마네킹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노브랜드 의류 제작도 병행하고 있는 듯 보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멈출 줄 모르고 울려 퍼지고 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소리다.
재승이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미싱 소리를 만끽하고 있던 찰나. 접객 담당 직원이 재차 재승에게 말을 건네왔다.
“사장님. 오래 기다리셨죠?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재승이, 여직원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사장실’이라는 글귀가 각인된 명패가 걸려 있는 문 앞에.
똑똑-.
“사장님. ‘월 플라워’에서 손님 오셨습니다.”
곧바로 문 너머에서 답이 들려왔다.
“들어오시라고 해.”
이윽고.
끼이이익-!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며, 문 틈 사이로 사장실 내부의 전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사이, 재승은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 사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얼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30대의 송 사장의 얼굴이.
“반가워요. 송인혁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재승이라고 합니다.”
송 사장이 여직원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해보이고는 재차 입을 뗐다.
“일단 앉으시죠.”
“아, 네.”
이내 재승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돌연 가슴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아쉬운 마음 탓이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맹렬한 반가움이, 지극히 일방적인 감정이란 사실이 아쉬웠다.
모든 추억이, 혼자만의 것이 되어버렸단 사실이 정말 사무치도록 아쉽게 느껴졌다.
반면 송 사장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영업적으로 그다지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지도 않았고, 친한 형이자 원단 상가 내에 자리한 소점포의 사장인 김민혁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성사되지 않았을 자리였으니 말이다.
‘흠, 대충 끝내고 보내야겠네.’
이내 송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려 보이며, 천연덕스러운 투로 물음을 건네 왔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하도 뚫어져라 보시길래. 혹시 반한 건 아니죠?”
“설마요. 누굴 조금 닮으신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잘 안 나서요.”
“누구? 원빈? 장동건?” 하고 중얼거려 보인 송 사장이, 재승의 앞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자, 그럼 일단 일 이야기부터 합시다.”
재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 사장이 제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 한 자루를 꺼내 들며 나직이 물음을 건넸다.
“어디 보자… 일단 백 디자인은 정해뒀어요? 원단을 일일이 다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구상안부터 들어보고 맞는 원단을 추천해 드릴게요.”
“일단 품종은 ‘플랩 백(Flap Bag)’으로 하려고요.”
“플랩 백이라….”
플랩 백.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했다. 가장 실용적이기도 하고, 보편적이기도 한, 무난한 실루엣의 가방.
이내 재승이 제 가방에서 파일철 한 개를 꺼내어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완성된 도식이에요. 말로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오늘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등의, 남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급하게 완성한 도식이었다.
“오, 도식까지 가져왔어요? 그럼 도식부터 한 번 보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건네받은 도식을 살펴보기 시작한 송 사장의 미간 위로, 점차 짙은 음영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인데…?’
재승을 소개해 준 김민혁의 설명을 따르면, 본래 스트릿 의류를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브랜드의 오너 디자이너라고 했었다.
자연스레 여성용 핸드백에 견문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도식만 살펴보더라도 꽤 괜찮은 디자인의 가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과하지 않고, 깔끔하다’는 느낌을 주는 디자인이다.
우선 제품의 크기도 적절했을뿐더러, 고급스러운 느낌과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 포인트들도 과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억제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뿐 아니라, 섬세한 디테일 역시 잔뜩 신경 쓴 티가 났다.
이내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송 사장이,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이 디자인 말인데… 혹시 카피는 아니죠?”
“네. 직접 창안한 디자인이에요.”
“다른 뜻이 있던 건 아니고, 디자인이 너무 좋아서 물어본 거예요. 혹시나 해서, 괘념치 마시라고.”
“아, 네. 감사합니다.”
이내 송 사장이 재차 물음을 건넸다.
“숄더 체인은 탈부착 형태인 거 맞죠?”
“네. 맞아요.”
체인을 떼면 ‘토트(Tote: 짧은 핸들을 가진 핸드백)’ 형태가 되어, 손에 들거나 팔에 걸고 다닐 수 있게끔.
또 체인을 연결하면 숄더백 형태로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게끔 할 계획이었다.
디자인보다는 어머니의 편의를 중시하여 내린 결정이었고 말이다.
“주제넘는 질문인 건 아는데, ‘24K 순금 금장 패치’를 대체 왜 가방 안쪽에 부착하려는 겁니까? 보이지도 않으면 금장 패치가 무슨 소용이라고….”
이내 재승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이번에 제작하게 될 가방은, ‘포 더 맘 에디션(For the mom Edition)이란 이름으로 출시될 거예요.”
“For the mom? 어머니를 위한?”
“네, 맞아요. 초판으로 나오는 가방은 저희 어머니께 드릴 거예요. 그리고 이번 제작의 핵심 목표는, 저희 ‘어머니를 위한’ 가방을 만드는 것이고요.”
이내 송 사장이 난해하다는 듯, 미간을 더욱 좁혀 보이며 재차 되물었다.
“금장 패치를 안쪽에 부착하는 거랑,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겁니까? 잘 모르겠는데.”
“프리미엄 브랜드에서 출시되는 ‘*히든 패치(*Hidden Patch)’ 제품들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굉장히 검소하신 분이셔서, 제품 겉면에 금장 패치를 박아두면 들고 다니시기에 부담스러워하실 게 분명해서 안쪽에 부착하려는 거예요. 일단 이번에는 어머니께서 편히 들고 다니실 수 있는 가방을 만드는 게 최우선이니까요.”
재승의 설명을 들은 송 사장의 입가 위로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효자네, 효자야.’
취지는 나쁘지 않은데, 사실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몇몇 프리미엄 브랜드에서 이따금 히든 패치 제품들을 발매하는 이유는, 비밀스러운 사치를 즐기는 고객들을 위함이었다.
‘월 플라워’ 같은 신생 브랜드가 히든 패치 제품을 발매한다면? 사실상 노브랜드 의류와 별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어떤 정신 나간 소비자가 그런 제품을, 비싼 값에 구입하겠는가?
이내 송 사장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히든 패치라… 뭐, 나쁘지는 않은데, 판매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거라면 너무 도전적인 시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계획에 변화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무던하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사실 도전적인 시도가 아니라, 무모한 시도죠. 그런데 말씀드렸다시피, 판매보다는 정말 어머니께 드리는 선물이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서요.”
“흠….”
“어차피 어머니께 드릴 초판 외에, 딱 두 개만 더 만들 생각이거든요. 팔리면 좋고, 설령 안 팔린다더라도… 속은 좀 쓰리겠지만, 포트폴리오 삼아 가지고 있으면 그만이고요.”
“그래요. 두 개 정도면 뭐….”
송 사장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대던 찰나.
재승이 재차 입을 뗐다.
“아, 그리고 일단 기본 패브릭은 쟈넬사에서 사용하는 정품 ‘*램스킨(*lambskin: 양가죽)’ 원단으로 하고 싶네요.”
“어? 원단까지 정해두신 거예요?”
“네. 이래저래 알아봤는데, 정품 램스킨 원단이 제일 적합할 것 같네요.”
꽤 많은 준비를 한 듯 보였다. 효심이 기특하기도 했고, 당당한 면모도, 열정적인 모습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 때문일까? 왠지 도움을 주고 싶단 생각이 드는 듯했다.
“흠. 재승 씨. 자꾸 참견해서 정말 미안한데, 쟈넬사 정품 원단을 찾는 거라면 조금 더 퀄리티 있는 *‘캐비어 원단(*상어 알처럼 작은 알 모양의 엠보싱을 넣은 송아지 가죽)’이 더 낫지 않겠어요? 완제품 가격 차이는 심해도, 원단 자체의 가격 차이가 엄청나게 큰 건 아니니까 재고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뇨. 스크래치 때문에요.”
재승의 짤막한 답 덕에, 송 사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스크래치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캐비어 원단을 사용해야 한다.
이내 재승이 이해를 돕기 위해 재차 설명을 첨언했다.
“저는 시간을 담아낼 수 있는 옷들을 좋아하거든요.”
송 사장이 그제야 “아….” 하고 탄성을 뱉어 보였다. 굳이 램스킨 원단을 고수하는 저의를 깨달은 탓이었다.
‘많아 봐야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데….’
좋은 영업파트너는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좋은 디자이너가 될 여지는 확실한 듯했다. 일단 철학 자체가 확고하고, 아집이 아닌 신념이 있다.
램스킨 원단에 마모가 생김으로 인해 추가될 빈티지(Vintage) 감성을 노리는 듯 보였다.
할아버지의 시계함 속에 들어 있는 롤렉스시계처럼, 중후한 멋과 빈티지스러운 감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핸드백을 만들려는 것이 분명했다.
한차례 “잠시만요.” 하고 말해 보인 송 사장이 제 집무용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수화기를 집어 들어서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원단의 모델명을 하나씩 일러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쟈넬사의 정품 램스킨 원단 샘플 몇 종이 사장실에 도착했다.
원단을 하나씩 하나씩 유심히 살펴본 재승이, 그중 한 종을 골라 집으며 말했다.
“이걸로 할게요. 서른 마 주세요.”
“물건은 지금 바로 배송해 드릴게요. 거래대금은 명함에 찍혀 있는 계좌번호로 입금해 주시면 돼요.”
“아, 네. 알겠습니다.”
한차례 묵례를 해 보인 재승이,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던 찰나.
송 사장이 재차 입을 뗐다.
“저, 재승 씨.”
“네?”
“초판은 어머니께 선물로 드릴 거고, 추가로 두 개 더 제작하실 거라고 하셨죠?”
“네.”
두 사람 사이로 침묵만이 맴돌기를 잠시. 이내 송 사장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 두 개. 안 팔리면 제가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열과 성을 다해서 한 번 만들어 봐요.”
말을 마친 송 사장이 “어차피 디자인이 좋아서, 팔리긴 할 겁니다.” 하고 응원의 말까지 덧붙여 주던 찰나. 재승이 저도 모르게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쁨과 안도가 공존하는, 그런 미소였다.
송 사장.
예나 지금이나, 참 일관성 있는 사람이다.
매번 잔정이 많아 탈이라며 나무랐었지만, 실은 그런 면을 가장 좋아했었던 것 같다.
동업자라는 말보다는 ‘친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던 사람이었다.
조금 전 그가 건네준, 몇 마디 말이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일까?
“송 사장님.”
“네?”
이내 재승이 조심스레 입을 떼서는, 준비할 새도 없이 급하게 과거로 돌아오게 된 탓에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 들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 사연과 복합적인 감정들이 얽혀 있는 말이었으나, 송 사장이 듣기에는 그저 작은 호의에 크게 탄복한 청년의 감사 인사로밖에 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멋쩍은 마음에 괜히 손사래를 몇 번 쳐 보인 송 사장이, 사뭇 무던한 투로 답했다.
“됐어요, 됐어. 정 고마우면 자주 놀러 와요. 오기 전에 꼭 말하고. 올 때마다 뭐 하나씩은 꼭 사 가고. 오케이?”
이내 재승이 이채(異彩)가 잔뜩 서린 눈으로, 송 사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송 사장이 전생의 자신에게 그래 주었던 것처럼,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되어주고야 말 것이라고 결심했다.
아니, 자신의 삶뿐 아니라 그의 삶 역시 전생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도록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영입한다.’
‘바이어’로든, ‘MD’로든. 어떤 구실로든 그를 영입하고야 말 것이다.
평생을 위법 위에서 전과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암경매장을 전전하지 않을 수 있도록,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별다른 제한 없이 자신의 재능을 만개시킬 수 있도록.
그를 영입하여, 곁에 두고야 말 것이다.
기필코.
물론 관계는 차근차근 쌓아나갈 생각이었다.
탑을 쌓듯, 공을 들여서.
이로써 목표가 명확해졌다.
송 사장이 이미테이션 제작에 제대로 착수하기 이전에, 월 플라워의 규모를 키운다.
그리고, 그가 먼저 영입을 제안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영입한다.
‘좋아.’
이제 남은 일은 딱 하나, 어머니의 가방을 만드는 데 매진하는 것뿐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