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98)
블랙 라벨-297화(298/299)
블랙 라벨 297화
블랙 라벨 외전 49화
다음 날 아침.
“압바.”
재승은 모처럼 늦잠을 잤다.
“압바아, 압바아!”
물론 율이가 늦잠을 자고 있는 아빠를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인나! 인나여!”
이내 재승이 좀처럼 떠지지 않는 두 눈을 게슴츠레 떴고….
“응….”
율이가 재승의 얼굴에 제 뺨을 부비적대며 물었다.
“이짜나, 오늘 회사애 안 가요?”
“응, 맞아.”
“그러면은 율이랑 노는 거애요?”
“그래야지.”
본래대로라면 대규모 프로젝트를 마친 건 물론이고 마냥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으니 힘차게 노를 저어야겠지만….
그간 겹겹이 쌓인 피로를 풀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월플라워의 브랜드하우스는 물론 이사회에도 휴무를 요청했다.
7일.
모처럼의 휴가 동안은 사랑하는 이들과, 일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드르륵-.
재승이 서랍을 열었고….
“7일 뒤에 보자.”
휴대폰의 전원을 끈 채 서랍에 잘 집어넣었다.
* * *
그날.
“다 됐다!”
애슐린이 오븐에서 막 꺼낸 애플파이를 식탁 위로 옮겨왔고….
“아! 진쟈 마시깨따!”
율이가 군침을 마구 삼켜댔다.
“압바, 근대 사과는 율이가 직접 넣었다요? 진쟈다요?”
“정말?”
“웅웅, 엄마가 만드 때요. 율이가 개속 도와줬는대요?”
이내 재승이 그런 딸아이를 살짝 쓰다듬고는, 곧장 먹기 좋게끔 잘 잘라낸 파이를 포크로 콕 찝어서 입에 넣어주었다.
“마시써!”
그렇게 함께 만든 파이를 먹고 난 뒤에는 율이와 나란히 누워서 뒹굴거리며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잠들었다.
낮잠이었다.
그다음에는 초저녁 무렵에 눈을 떠서 센강을 따라 한참이나 산책을 즐겼고 밤에는 소소한 불꽃놀이를 즐겼다.
‘빠르네….’
역시 시간이란 마냥 상대적이다.
일을 할 때는 마냥 더디더니….
쉴 때는 이토록 빨리도 흐르네.
“후….”
집으로 돌아온 재승이 버릇처럼 서랍을 열어 아침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원을 켰다.
부재중전화만 수십 통.
중요한 내용의 문자메시지 역시 가득 쌓인 채였다.
내용을 확인해 볼까 싶은 마음에 손가락을 움직이던 찰나.
“압바!”
설이가 재승의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고….
“율아, 아빠 일하신다니까!”
애슐린이 뒤따라 들어와서 그런 율이를 안아 들었다.
“미안해요.”
“미안하긴.”
이내 재승이 휴대폰을 도로 서랍 안에 집어넣고는 닫았다.
아무래도 일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연습과 학습이 필요한 일인가….
재승이 피식 웃음을 흘려 보이곤 나지막한 투로 되물었다.
“아빠 왜 불렀어?”
“가치 치카해요.”
“그래, 그럴까?”
“그리구 동화책 일거.”
“그래, 그러자.”
“그러다가 코 자요.”
“좋은 생각이야.”
당분간은 푹 쉴 셈이었다.
* * *
그렇게 7일짜리 휴가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국까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에….
재승은 지난 7일을 모두 가족과 보낸 채였다.
휴가 7일째.
어느덧 휴가 마지막 날에 접어든 채였고….
“후우-.”
잠에서 막 깨어난 재승이 한없이 싱숭생숭한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답답하네….”
거실에 켜진 TV속 패션 채널의 앵커는, 오늘도 어김없이 카르도의 성공에 대해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 이는 사례가 없는 브랜드로….
–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이내 재승이 잠든 딸아이를 슬쩍 내려다보고는 곧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뭘 입어야 좋으려나….”
제 스승이었던 동시에 친구였던 칼 라거펠트의 묘비에 들러, 짧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고민들을 털어놓고자 했다.
“어디 가려고?”
재승이 한창 집을 나설 채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찰나, 기척에 눈을 뜬 애슐린이 드레스룸으로 들어와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냥 잠깐….”
말을 마친 재승이 씁쓸한 투로 덧붙였다.
“스승님 좀 뵙고 오게.”
“칼?”
“응,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이내 그녀가 재승을 꼭 끌어안아주며 되물었다.
“다 잘 풀리고 있잖아?”
“응, 그래서 그런가….”
그 말에 애슐린이 “아” 하고 짧게 침음하고는 말을 이었다.
재승과 결혼을 하기 이전까지는 탑급 모델이었기에….
자리를 지켜야 하는 스트레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도움이 될 방법은 없겠지?”
누군가의 말 몇 마디로 해소될 수 있는 부류의 힘듦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입장이었다.
“응, 당장은 나도 모르겠네.”
카르도의 성공 덕분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대중은 더욱 대단한 걸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을 테고….
기어이 매년 사형대 위에 오르는 심정으로 살아가겠지.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아직 아니었던 걸까?
돈은 무의미했다.
이미 평생을 쓰더라도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은 액수를 벌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당초에 아주 오래전부터 수입액보다는 지출을 더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던가?
“돈을 더 쓰셔야 합니다!”
매번 세무사와 통화를 할 때마다 지출을 늘려야 세금 처리에 훨씬 용이하리란 잔소리를 꾸준히 듣는 입장이었으니까.
‘만약….’
칼이 살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이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수십 년이나 싸워왔던 칼은….
‘어떤 답변을 해줬으려나….’
이내 재승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다녀올게.”
휴가 마지막 날의 행선지는 칼의 묘비였다.
* * *
“오랜만이네요.”
칼 라거벨트의 묘비 앞에 도착한 재승이 곧장 바닥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잘 지냈어요?”
이따금 들러야지 생각을 하면서 바쁘다는 말을 핑계 삼아 몇 번을 찾아오지 못했다.
“고작 해봐야 2M나 될까요?”
조금만 땅을 파보면 그가 잠든 관을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도 정말 딱 그 정도에 불과했더라면, 정말 얼마나 좋을지….”
칼은 잠들었다.
1925년 독일에서 태어나 오로지 디자이너가 되겠노라는 꿈을 품고 파리에 입성했던 청년이었다.
1952년.
그는 처음으로 국제양모사무국(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 콘테스트에서 1등을 수상했다.
디자이너로서의 시발점.
그는 발뭉, 장 파토, 발렌티온, 프리지아, 주르댕, 모노크롬 등의 브랜드를 지휘하며 모든 시즌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기간만 하더라도 30년.
이제 불과 메인스트림 마켓 안에 발을 들인 지 10년조차 되지 않은 자신은 사실상 햇병아리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뿐이던가?
1982년 9월 칼 라거펠트의 쟈넬 영입이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독일인, 기성복 디자이너인 칼의 영입은 논란거리였다.
누구도 그가 쟈넬 오뜨 꾸뛰르를 이끌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어떠셨어요?”
애써 단단한 척을 하더라도 가끔 무너지게 되던데.
그 긴 시간 대중의 의심과 반대에 시달렸던 당신은….
“어떤 심정으로 매 시즌을 버틸 수 있었던 겁니까?”
1983년, 칼은 결국 ‘쟈넬’의 새 시즌을 성공리에 선보이며….
죽은 쟈넬을 완벽히 환생시켰단 평가를 받지 않았던가?
“어떻게 매번 해내셨습니까?”
그 뒤로 다시 수십 년의 세월을 쟈넬에서만 보내왔다.
반백년 이상의 시간을 유명한 디자이너로 살며….
무수한 가십과 이슈, 논란거리로 소비되어 왔다.
만약 말이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거라면 그는 넝마가 되었겠지.
그런 와중에도 제자리를 지킬 수 있던 비결이 무엇이란 말인가?
“열정입니까?”
열정은 금세 고갈된다.
“일이 정말 그렇게 좋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대체 비결이 뭐였습니까?”
재승이 낮게 읊조렸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빨리 풀어버린 느낌입니다.”
자신이 대중에게 더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는가?
영감의 땔감이 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고갈되진 않았는가?
누군가는 자신의 빠른 성공을 부러워할지 모른다지만….
“언젠가 칼을 다시 만나게 되면 털어놓을 생각이었어요. 난 사실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이제 모든 게 부담스러워졌다.
과연 자신은….
세상의 기대처럼 대단한가?
“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중의 기대치가 지나치리만큼 높아져 버렸다.
“이제 나는….”
과연 앞으로 몇 년이나….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최상층에 올라서서 보니 앞으로 내려갈 길밖에 보이지 않는 기이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처럼 모든 걸 뒤로 내팽개친 채로 어디 먼 곳에 숨고 싶지는 않았다.
“칼, 답 좀 들려줘요.”
재승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평가받는 일에 정말이지 염증이 난단 말이에요….”
과연 자신에게 두 번째 삶을 부여해준 이는 누구일까?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하필이면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는가?
아주 잠깐 회귀라는 ‘기현상’을 꿈으로 치부했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꿈같은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아챘고….
“열심히 했어요.”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쉼 없이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열심히 했는데….”
그렇다면 제 삶은 과연 절대적인 존재의 기대에 부응했는가?
덕분에 주류 디자이너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고….
이제 업계를 이끌어 나간단 평을 받고 있으므로.
자신에게 기회를 준 이는 성과에 만족하고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재승이 재차 중얼댔다.
“다 모르겠어요….”
재승이 흐느꼈다.
“사실 길을 잃은 기분이에요.”
제법 오래도록….
* * *
초저녁 무렵, 때아닌 고해성사를 마친 재승이 집으로 돌아왔다.
삑, 삑, 삐빅-.
도어록을 해제하고 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압바! 압바아아아!”
율이가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왜 아치매 나는 안아주지도 안코 나가써요!”
“응?”
“엄마가 다 말해조써요! 엄마만 안아줘짜나!”
그러고는 곧바로 재승의 한쪽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 순간.
재승은 세상이 무너졌다가 도로 건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
언제 어디서였더라?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하리라는….
아름답게 살고 싶다.
영원토록 사랑하는 이들의 곁에 머무르며, 그들의 모든 고충과 고민 따위를 들어주고 해결해 주면서 살아가고 싶다.
많이 웃고, 가급적 덜 울면서.
좋은 걸 먹고, 입고, 쓰며….
또 나누면서 살고 싶었다.
그게 전부다.
대중의 평가야 어찌 됐든 아무렴 상관없으니….
가족들의, 아내의, 아이의, 친구들의 행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가면 그만인 게 아니려나?
“율아.”
이내 재승이 율이를 끌어안았다.
“응?”
조막만한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
이 온기가….
자꾸만 열정을 불어넣는다.
“아빠가 대신 싸워줄게.”
아름답게 살려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세상이므로.
이 아이의 몫까지 자신이 대신해 싸워줄 요량이었다.
그러니 너는 그냥 지금처럼 웃고 떠들며 아름답게 자라면 된다.
“아빠가 다 대신 싸워줄게.”
이 어린아이를 보며 무언가를 느낀다.
사고가 변하며 두려워하던 것의 형체가 불명확해진다.
배운다.
부모는 무언가를 가르치기만 하는 입장인 줄 알았더니….
결국 기어이 무언가를 배우고야 마는구나.
“아빠가 약속할게.”
정의내릴 순 없지만….
“대신 싸우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꼭 이겨줄게….”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알겠지?”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디 이 생활이 앞으로도 영원히 존속되기를.
사랑하는 이들과 웃고 떠들 수 있는 삶이….
모두가 자신을 ‘선망’과 ‘동경’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제 삶이 영원히 존속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