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299)
블랙 라벨-298화 (외전 완결)(299/299)
블랙 라벨 298화
블랙 라벨 외전 50화
그렇게 휴가 마지막 날이 지나고 전쟁 같은 일상으로 돌아온 지도 어언 며칠이란 시간이 흘렀다.
“리, 다음 일정이에요.”
인터뷰 일정을 하나 마치고 나서 세단의 뒷자리에 앉자마자, 재승의 수행비서가 손에 쥔 서류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다음
일정은 오후 2시부터 딱 한 시간동안, Q매거진과 인터뷰. 그 다음에는 3시 30분부터 그룹 이사회 임원회의 일정….”
재승이 창 너머를 바라보며 연신 “예, 예” 하며 상투적으로 답하기를 반복했다.
일, 일, 일….
심지어 다음 주부터는 전용기를 타고 여러 국가를 순회하며 여러 일정을 소화해 야했다.
그토록 바쁜 와중에 월플라워의 다음 시즌을 구상하고 그룹 경영 업무를 살펴야 했으며….
자신이 최대주주로 있는 쟈넬의 다음 디렉터 선정을 위해 매일 밤 포트폴리오를 살폈다.
이렇게 바쁠 때면 편하게 침대에 누워 숙면을 취하기를 갈망하게 되게 마련이었다.
“리, 듣고 계세요?”
“물론이죠.”
“지쳐 보이시네요.”
그 말에 재승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태어난 기분이에요.”
다행히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을 따름이었다.
마지막 날.
우울한 하루 끝에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던 순간.
“압바!”
제 한쪽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안아 달라며 성화를 부리던 딸의 얼굴을 마주하던 때.
매 시즌 대중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 제 직업에 대한 염증 따위가 눈 녹듯 사라졌다.
사무치도록 아름답게 살고 싶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
죽을힘을 다해서 싸우고자 했다.
스으윽-.
이내 재승이 뒷좌석 창문을 살짝 내리자 선선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려댔다.
재승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며 흘러간 시간들을 복기해 봤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시간을 거스르기 이전.
두 눈이 점차 멀어가는 와중에 석면 가루를 들이마시며 모작을 만들었던 때를 생생히 기억했다.
난 왜 평가받는 걸 두려워했지?
그 시절에는….
평가받을 수 없음이 힘겨웠는데.
이따금 송 사장이 검은 비닐에 쟁여 온 소주 몇 병과 안주거리를 기다리며 재봉틀 페달을 밟던 때.
돈에 눈이 멀어….
제 이름을 건 브랜드를 런칭하지 않고 이미테이션을 만들어 판 걸 두고두고 후회하던 시절이었지.
반면, 지금은?
이제 수십억, 수백억이라는 돈이 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사치를 부리지는 않았으나 이는 그저 돈을 쓸 시간이 없어서였다.
그리스 지중해에 보유하고 있는 섬이라든지 초호화 요트들….
한국, 미국, 일본, 프랑스, 세계 각지에 위치해 있는 고급 주택들.
적어도 평생 끼니를 걱정하지는 않을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세상의 전부가 돈은 아니라지만 거의 전부는 돈이다.
그게 재승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벌며 내린 정의였다.
어디, 돈뿐일까?
이제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려주는 상황이 아니던가?
단순히….
남의 작품을 베끼고 이를 헐값에 팔아넘겨 생계를 영위해야 하는 삶에서 벗어난 게 다가 아니었다.
선구자.
단순히 메인스트림 마켓에 발을 들이는 게 꿈이었건만….
거대한 판돈이 움직이는 업계를 주도하는 인물이 돼버렸다.
이제 더는 세간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로 했다.
누릴 수 있을 때.
바로 지금.
원 없이 누려야겠지.
“안 되겠어요.”
재승이 낮게 덧붙였다.
“못 내려가겠어요….”
모두가 입을 모아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말하지 않던가?
이제 리가 ‘패션계’라는 이름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섰노라고….
숱한 이들이 황제라는 간지러운 수식어를 붙여주지 않았던가?
“죽어도 못 내려가겠어요….”
그 말에 비서가 “예?” 하고 낮게 되묻던 찰나.
“펜 좀 빌려줄래요?”
“여기….”
“노트도 몇 장만 빌려줘요.”
이내 그녀가 곧장 노트를 몇 장 찢어서는 재승에게 건네주었고….
슥, 슥, 슥-.
재승은 손이 가는 대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도식을 그려냈다.
아름다운 삶.
눈 닿는 모든 곳에 소위 말하는 영감이 널브러져 있는 삶이다.
아름답게 살고자 그린다.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
디자인은 재승의 싸움이었다.
슥, 슥, 슥-.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키고 있는 싸움에 불과할 뿐.
* * *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저벅, 저벅-.
브랜드 하우스 건물 바깥에 발을 내딛은 재승이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봤다.
“늦을 수도 있겠는데….”
얼마 전 다시 한 번 월플라워의 쇼를 끝냈다.
으레 그래왔듯 유행은 돌고 돌아 과거를 답습했다.
올해의 트렌드는 리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해준….
미니멀리즘.
얼마 전 「미니멀리즘」을 메인 컨셉으로 삼은 월플라워의 쇼를 성황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고.
–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위 발표, 1위는 ‘월플라워’의 오너 디자이너이자 최대 규모의 패션 그룹 LVMH의 실 경영자인 리….
해마다 이름을 실어왔던 포브스지에서, 자신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선정되는 영예를 거머쥐었다.
– 타임지 전 세계 최고의 패션 부호 발표, 1위는 7년째 월플라워 오너 디자이너이자 LVMH 그룹 경영자인 리의 차지….
올해로 벌써 7년째 타임지에서 선정한, 패션계 최고 부호 1위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중이었고.
– 리,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수여.
또한 얼마 전 프랑스 정부로부터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 전반에 걸쳐 공로가 인정되는 인물이 수여받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까요?”
재승의 물음에 운전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 운이 따라준다면 늦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다음 스케줄은 꽤 오랫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밥 한 끼조차 하지 못했던 친구이자….
이제 미국 내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음반사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CEO.
“늦으면 화를 낼 텐데요….”
영국과의 라디오 출연이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내 운전기사가 엑셀 페달을 밟자 이제는 구형이라는 딱지가 붙어 버린 롤스로이스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영국의 선물이었다.
재승이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뒷좌석에 몸을 뉘이자, 운전기사가 자연스럽게 재승이 이동할 때면 듣는 곡을 틀어주었다.
– Look, rolls royce, lee, wins.
– Look, rolls royce, lee, wins.
– Look, rolls royce, lee, wins.
이제 손영국이라는 이름 세 글자보다는, ‘JEUS.KUS’라는 예명이 더 잘 어울리는 친구의 선물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재승은 몇 년이 흘러 이제 구형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 차량을 타고서 옛날 노래가 된 이 곡을 들으며 출근했다.
여전히.
* * *
“그래서 아직도 너만 바빠?”
라디오의 녹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영국이 건넨 물음이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이내 진행자가 영문도 모른 채로 두 사람의 설전을 듣고 있을 청취자들을 위해 상황을 설명했다.
“실은 오늘 녹화가 7시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리가 무려 30분이나 지각했거든요.”
그 말에 영국이 재차 말했다.
“아마 70살이 돼서도 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제 나도 제법 그럴싸한 레코즈의 CEO가 됐는데 아직도 백수인 줄 아는 것 같다니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잖아? 일을 다 정리하고 슬슬 움직이려는데 율이가 영상통화를 걸어와서 오늘 하루 일과를 줄줄 읊어줬다고!”
“보면 아시겠지만 정말이지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예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딸 핑계를 대는 파렴치함을 배우고 있거든요!”
이내 “그만, 그만….” 하고 만류한 진행자가 덤덤히 상황을 정리하던 찰나였다.
“야.”
영국이 자동차 키를 내밀었다.
“뭐야?”
롤스로이스 사단의 차량 키였다.
“차를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아직도 그 ‘구닥다리 세단’을 타고 다니는 거야?”
“십 년은 더 탈걸?”
“딱 보니까 내가 바꿔줄 때까지 아득바득 버티면서 끌고 다니려고 했나 본데….”
영국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평생 바꿔줄 수밖에.”
그 말에 재승이 웃으며 답했다.
“사양 안 하지.”
수만 달러에 육박하는 최고급 세단을 선뜻 선물하는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던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우선 JEUS.KUS에게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제 작년에 설립한 ‘RE 레코즈’가 올해 최고의 레코즈 자리에 올랐는데 소감 한마디만 부탁드려봐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영국이 답했다.
“아직 보여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이 남아있습니다. 레코즈가 거둔 성공은 저보다는 열심히 작업한 소속 아티스트들….”
말끝을 흐렸고….
“그리고 이 녀석 덕일 겁니다.”
그 말에 재승이 피식 웃음 지었다.
“아, 그리고 음반사의 상호명을 ‘RE 레코즈’라 붙인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내 영국이 곧장 답했다.
“만약 Lee 레코즈란 이름을 붙였더라면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그럼….”
“제 꿈을 사줬던 리(Lee)에 대한 경의와 존경을 담은 이름이에요.”
영국이 멋쩍게 덧붙였다.
“녀석이 70살이 돼서도 지각하는 버릇을 못 고쳤다고 하더라도 전 무조건 이 녀석의 곁을 지켜주고 있을 겁니다.”
이내 재승이 이죽거렸다.
“내 의사는?”
“닥쳐.”
“방송입니다!”
진행자가 이번에는 재승을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리에게 여쭤보죠.”
고된 하루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최후의 질문이었다.
“뭐든지요.”
퇴근이 가까워져서인지 가벼운 마음으로 답했고….
“올해에도 타임지에서 선정한 패션계 최고 부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내셨더군요?”
“예, 보셨다시피.”
“또 포브스지에서 선장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오르셨고….”
“네, 어쩌다 보니.”
“마지막으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는 영예를 누리셨죠.”
“조금 늦었죠.”
재승이 익살스레 덧붙였다.
“지반시, 발뭉, 란방, 웅가로 등. 이전 세대의 디자이너들 중에서도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받은 분들이 계시니까요.”
그 말에 진행자가 재승의 뻔뻔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려 보이며 되물었다.
“앞으로의 각오나 다짐 내지는, 많은 분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때 재승의 바지주머니 쯤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고….
“혹시 이번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언젠가 먼 미래에 출연하게 됐을 때 해도 될까요?”
재승이 휴대폰 액정 화면 위에 떠있는 이름을 보여주었다.
– Yul.
딸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일보다 중요한 용무가 생겨서.”
“아뇨, 잠깐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전화를 받아서는 “응, 곧 집에 갈 거야” 하고 말하며 스튜디오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생방송 도중 패널이 스튜디오를 벗어나는 초유의 사태였으나, 다들 어째서인지 마냥 익숙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다들 재승이 일보다 우선시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나쁘게 말하자면 멋대로 굴어댔던 까닭이었다.
“그럼, 아빠도 사랑하지….”
한참이 지나 통화를 마친 재승이 자리로 돌아왔다.
“어디까지 했죠?”
“하고 싶은 말씀….”
“아, 네. 그랬죠.”
이내 재승이 답했다.
“못 내려가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영원히 이 자리에 있을 거예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최고의 자리에서요.”
그 말에 영국이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잘 어울리는 대답이네.”
허무맹랑한 말이라지만 진심이 한가득 담긴 말이었다.
정상에 오르고 나니….
다시는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생겨버렸다.
또….
그 욕심이 동력이 되어 준 덕에 여전히 최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리라고 굳게 믿었다.
“어쨌든, 그럴 겁니다.”
이미 모두가 최고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계속해서 움직이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 투쟁한다.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거머쥔 것들을.
최고의 자리를.
모두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걸 지켜내기 위한 싸움.
이는 절대 지치지 않을 수 있는 싸움이었고….
그런 동시에 영원히 이어나갈 수 있는 싸움이었다.
“멋대로 굴어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삶을 사랑합니다.”
재승이 재차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다들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한 엄청난 제품들을 준비하고 있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대해도 좋아요.”
지이이이잉-.
그때 다시금 휴대폰이 울렸고.
“이제 슬슬 클로징할까요?”
“아, 예….”
“클로징은 두 분이서 하실래요?”
재승이 재차 스튜디오 바깥으로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피곤하면 먼저 자라니까. 그래, 지금 출발했으니까 아마 30분이면 도착할 거야. 그럼, 아빠도 많이 사랑하지….”
열렬히 사랑한다.
많은 것을.
정말 사무치도록.
블랙라벨 완(完).
부족한 글을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봐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에는 더 즐거운 이야기를 준비해 인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행복하시기를.
전남규 올림. 블랙 라벨 29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