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35)
블랙 라벨-34화(35/299)
블랙 라벨 34화
35. Keep Going
한 주라는 시간이 더 흘러갔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한데, 해가 바뀌었다.
2010년에서, 2011년으로.
1월 1일 아침이 밝자마자, 매년 느꼈던 감정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한 살이 더 늘어나 있을 때마다 느끼곤 했던 기묘한 감정이.
해가 바뀌던 순간에는 가족들과 거실 TV 앞에 모여앉아 종소리를 들었다. 1월 1일 아침에는 잠깐 시간을 내서, 신년의 목표를 적어보기도 했다.
전생에서 해가 바뀔 때마다 느끼던, ‘또 한 살을 먹었구나’ 하는 위기감이 줄어든 것 같아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한데, 신년목표를 적을 때면 첫 줄에 늘 적어 넣곤 하던 ‘금연’과, ‘금주’가 없으니 마냥 허전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2010년의 마지막 날.
나는 자퇴서를 제출했다.
학급 친구들이 겨울방학을 맞이하던 날, 나는 더는 학생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 * *
“재승아. 궁금해서 그런데 무슨 기분이냐?”
방학을 맞이한 뒤, 하루의 반 이상을 작업실에서 보내고 있는 영국이 대뜸 건넨 물음이었다.
영국은 여전히 ‘무급’으로, 월 플라워의 소일거리를 돕는 중이었다.
“뭐가?”
“자퇴하면 무슨 기분이야?”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냥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있지 않은 시기에, 앞으로 다시는 해보지 못할 고등학교 생활을 포기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고작 그 정도 아쉬움 때문에 많은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어쨌든 후회는 없다.
“그냥 시원섭섭하네. 방학한 기분이기도 하고.”
“하긴….”
말끝을 흐려 보인 영국이, 제 노트북을 가방 안에 챙겨 넣으며 나직이 말했다.
“재승아. 나 일단 학원 다녀올게.”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영국은 겨울방학을 맞이하며 ‘음악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재승은 영국이 맞이한 변화가, 자신의 고등학교 자퇴보다 훨씬 더 거대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무언가에 제대로 매진해 본 적 없던 누군가가, 어느 한 분야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는 것.
이보다 더 대단한 변화가 무엇이 있을까?
그저 지금의 도전이, 영국의 일생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영국아, 잠깐만.”
이내 재승이 제 작업대 서랍을 열어서는, ‘Wall Flower’의 로고가 새겨진 검정 박스 두 개를 건네주었다.
두 박스 모두 일전에 어머니의 핸드백을 포장했던 박스보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박스였다.
“이게 뭐야?”
“쇼핑백에 넣어서 가져가. 하나는 네 거고, 하나는 어머니 거야.”
“나랑, 우리 엄마?”
“응.”
판매할 핸드백을 모두 완성시킨 뒤. 남아 있는 램스킨 원단들을 이용해 만든 반지갑과, 장지갑이었다.
영국과 영국의 어머니 몫 외에도, 선물용으로 몇 개를 더 만들어둔 상태였고 말이다.
“지갑인데, 그냥 남은 원단으로 만든 거야. 그래도 신경 써서 만든 거니까, 제품 퀄리티는 걱정 말고.”
“아….”
넋이 나간 듯 보이는 표정으로 박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영국이,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재승아, 정말 고맙다.”
이내 재승이 사뭇 퉁명스러운 투로 되물었다.
“영국아. 이거, 내가 선물하는 거 아니다?”
“응? 그게 무슨 말….”
영국이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이 지갑은 네가 용돈 모아서 산 지갑이야. 엄청 좋은 원단인데, 친구 특별 할인가로 싼값에. 알겠지?”
이내 재승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드리면서 꼭 말씀드려. 믿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입을 꾹 다문 채, 떨리는 눈으로 재승을 바라보고 섰던 영국이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그래. 고마워.”
“얼른 가봐. 학원 늦겠다.”
말은 안 했으나, 영국의 지갑 안에 5만 원권 지폐 몇 장을 넣어둔 상태이기도 했다.
이제 막 음악을 시작하는 단계이니만큼, 필요한 물건이 많을 것을 감안해서 넣어둔 것이었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일말의 보상이기도 했고,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줄지도 모르는 도전을 응원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 * *
다시 며칠 뒤, ‘포 더 맘 에디션(For The Mom Edition)’이란 타이틀로 출시한 핸드백의 판매가 시작되었다.
아니, 거의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70만 원이라는 가격에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품절’이란 쾌거를 이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애꿎은 송 사장에게 악성 재고를 떠넘기는 일은 면한 것이다.
“후아.”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재승이, 이내 한차례 기지개를 켜 보였다.
모니터 위에 떠 있는 것은, 매출 현황을 정리해 놓은 엑셀 파일이었다. 현재 월 플라워의 매출은 여전히 5~60만 원대를 기록 중인 상황.
딱 하루, ‘포 더 맘 에디션’ 핸드백이 출시되었던 어제 하루만 제외하고 말이다.
아직 품목을 추가하지 못한 상황이니, 본래대로라면 매출이 떨어졌어야 정상이다.
이렇게 매출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오롯이 쿠바쿠바 온라인 스토어 덕이랄 수 있었다.
잠시 주춤하던 매출이, 입점을 마침과 동시에 자그마한 상승을 맞이했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신제품을 출시해야겠는데.’
이내 재승이 작업대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스와치 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매번 원단을 매입해 오고 있는 단골 점포에서, 택배로 보내준 원단 견본 책자였다.
원단을 매입할 때마다 직접 동대문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거래 방식에 변환을 준 것이다.
“어디 보자….”
이내 재승이 제 노트에, 이번 옷들의 기초 패브릭으로 선정할 원단들의 품목을 적어 내기 시작했다.
이번에 출시할 제품의 품종은 총 세 개였다.
우선 ‘청바지’와, ‘가죽 재질의 라이더 재킷’, 마지막으로 ‘면 티셔츠’까지.
기초 패브릭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계속해서 해왔던 덕일까? 원단을 선정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선 샘플을 육안으로 한 번 확인해 본 뒤, 손으로 몇 번 쓸어내려 보고 마음에 걸면 망설임 없이 적어 넣었다.
선정을 모두 마친 뒤에는, 곧장 원단상가 점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 어어, 그래. 잘 지냈지?
새해 덕담 몇 마디가 오간 뒤, 이번에 주문할 원단들의 제품번호를 일러주었다.
– 종류가 많네? 신상 샘플 만들어보려는 거야?
“네, 맞아요.”
– 어디 보자, 물건은 자정쯤에야 도착할 것 같은데 그건 괜찮고? 오늘 주문이 많이 밀려 있어서.
“오늘 내로만 보내주시면 돼요.”
어차피 원단이 도착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단 이번 의류를 만드는 데 사용할, 간단한 ‘패브릭 페인트(Fabric Paint)’를 사 와야 한다.
이번에 출시할 의류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재료랄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대형마트에 들러, 자잘한 소품 몇 가지를 사 와야 했고 말이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사무실 구석에 비치해 둔 매트리스에서 잠시 눈을 붙이거나, 토플 공부를 하며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 오케이. 알았어. 바쁜 건 아는데, 그래도 한 번 놀러 와. 내가 닭 한 마리 칼국수라도 대접할게.
“감사합니다. 가기 전에 미리 연락 올릴게요.”
– 그래, 그래. 일단 물건 배송 나갈 때, 문자라도 한 통 찍어줄게. 수고하고!
통화를 마친 뒤,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곧장 영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국아. 혹시, 오늘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 * *
영국의 도움을 받아 모든 재료 구매를 마친 재승이, 이내 한차례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하아….”
패브릭 페인트 몇 통과, 이런저런 재료들. 사무실 냉장고 안에 쟁여 둘 음료와 인스턴트식품까지.
영국과 반씩 나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손에 도합 세 개의 쇼핑봉투가 들려 있는 상태였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땅 꺼지겠다.”
영국의 말에,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내저어 보이고는 나직이 답했다.
“차. 차가 필요해.”
“응?”
“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확실히 필요한 것 같았다.
지금처럼 재료나, 비품, 식료품을 살 때마다 고충을 겪어야 하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동대문을 오갈 때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정말 큰 고역이었다.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라지만,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또 스타렉스 같은 차량이라도 한 대 산다면, 적은 물량은 배송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싣고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한 대 있으면 좋긴 하겠다. 너는 왔다 갔다 할 일도 많으니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보인 재승이, 잠시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래, 딱 두 달만 참자.’
두 달만 더 지나고 나면, 자신의 생일이 돌아온다. 만 18세 생일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니,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셈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금세 사무실이 자리한 상가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가고 있던 때, 영국이 의아하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그나저나 페인트랑 붓은 어디에 쓰려고? 사무실 벽 더 칠하려고?”
“옷 만드는 데 써야지.”
“응? 페인트를 옷 만드는 데 쓴다고?”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재승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딛으며 답했다.
“저번에 너랑 페인트칠 할 때, 번뜩 떠오르더라고.”
“뭐가?”
“페인팅 진(Painting Jean).”
페인팅 진.
일전에 영국과 함께 사무실 벽면을 페인트로 칠하던 도중. 군데군데 페인트 자국이 남은 청바지와 티셔츠를 보며 불현듯 떠오른 이름이었다.
아마 아직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몇몇 브랜드에서 페인팅 의류들을 출시했으나, 아직 크게 각광받지는 못한 시점이니까.
이내 재승이 사무실 문 앞에 비닐봉투를 내려놓으며, 확신의 가득 찬 투로 재차 첨언했다.
“이 옷들이 월 플라워의 매출을 몇 배로 늘려줄 거야.”
“그래?”
“응. 내 이름값과, ‘월 플라워’의 이름값도 몇 배로 뛰게끔 만들어줄 거고.”
띠리링-!
사무실 도어록이 해제되며, 한차례 청량한 소리를 내보였다.
이내 재승이 벽면을 더듬어서는, 사무실 형광등 스위치를 켜 보이며 말했다.
“시작해 보자.”
전보다 훨씬 더 뜨겁게, 제대로.
우선 원단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재료들을 정리해 두었다.
신상품 제작에 쓰일 재료들을 정리하고, 식료품들을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쌓아 넣고.
냉장고 정리를 하던 도중, 영국이 돌연 입을 뗐다.
“야, 재승아.”
“응?”
“우리 꼭 신혼부부 같지 않냐?”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재승이 다소 신경질적인 투로 건넨 물음에, 영국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능글맞게 답했다.
“같이 장도 보고, 이렇게 냉장고 정리도 하고. 내가 보기에는 영락없는 신혼부부….”
“시끄러, 인마.”
티격태격하며 정리를 마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 주문을 넣었던 원단들이 도착했다.
배송 받은 데님 원단은 총 세 종류였다.
우선 첫째로, ‘페인트 진(Paint Jean)’ 제작에 사용될 데님 원단 세 종류.
비록 최고급 데님 원단까지는 아니라지만 ‘스와치 북’에 구비되어 있던 데님 원단들 중, 가장 가성 비가 뛰어난 원단 세 종류를 엄선한 것이었다.
일단 이 세 종류의 원단을 모두 샘플로 만들어보고, 장·단점을 꼼꼼히 가려낸 뒤 메인 패브릭을 선정할 생각이었다.
“영국아, 우선 바닥에 비닐 좀 깔아주라.”
“오케이.”
영국이 대형마트에서 사온 ‘김장용 비닐’을 바닥에 까는 사이, 재승은 다른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패브릭 페인트를 꺼내고, 수통에 따뜻한 물을 받아 붓의 솔을 살살 풀어주었다.
‘흠….’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의 ‘퀄리티(Quality)’다. 페인트를 뿌렸다고 잘 팔렸더라면, 이미 반백 년 이전부터 페인트 진이 판을 쳤을 것이다.
원단의 소재, 재봉, 총체적인 디자인까지. 어느 한 부분 빠지는 곳이 없는 바지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그런 바지 위로, 페인트를 사용해 포인트를 준다는 느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뭐 할까?”
“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