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36)
블랙 라벨-35화(36/299)
블랙 라벨 35화
36. 타임 어택?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바닥에 데님 원단 한 마를 잘 깔고, ‘*디자인 자(Spirograph)’를 이용하여 천천히 구역을 나누기 시작했다.
스으윽-.
스으윽-.
본래 옷이란 시접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는, 원단 조각에 불과하다.
조각, 조각을 나누는 과정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곁에 선 채 지켜보던 영국이, 한차례 “오” 하고 탄성을 내뱉어 보였다.
재승이 초크로 선을 하나씩 그어 넣을 때마다, 점차 윤곽이 갖춰져 가는 모습이 꽤나 신기했던 탓이었다.
불과 십 분도 흐르지 않아, *패턴(*Pattern: 시접을 거치기 전, 조각나 있는 원단)을 나누는 작업이 끝났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패브릭 페인트를 개봉했다.
“이제 페인트 묻히는 거야?”
“응. 맞아.”
여러 프리미엄 브랜드가 해외 각지의 컬렉션을 통해 공개한 페인트 진이, 대중들에게 각광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너무 과했기 때문이다.
형형색색 물감이 과하게 칠해진 청바지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을 수 있는 일반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재승이 제작하려는 페인트 진의 핵심은, 절대 과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천천히 해보자.’
한차례 심호흡을 해 보인 재승이, 붓이 아닌 ‘연필’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연필의 심 부분에, 흰색 패브릭 페인트를 살살 묻힌 뒤 바지 곳곳에 점을 찍듯 페인트를 묻히기 시작했다.
연필심 끝에 이슬처럼 떨어질락 말락 아슬하게 맺혀 있던 페인트가, 원단 위에 퍼지며 심의 면적보다 비교적 큼직한 자국들이 생겨났다.
프론트 포켓 인근, 허벅지 부분, 발목 부분까지. 그저 자그마한 점 몇 개가 생긴 게 전부인데도 불구하고, 원단 자체의 느낌이 달라진 듯 보였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들어 올려서는, 영국에게 나직이 물음을 건넸다.
“영국아, 어떤 것 같아?”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네.”
“하긴.”
그간 족히 수천 벌의 샘플을 제작해 봤다 하더라도 전혀 과언이 아닐 재승이었다.
그런 경험 덕에 아직 시접 과정을 거치지 않은 ‘패턴 조각’들만 보더라도, 완성된 옷의 모습을 자연스레 연상시킬 수 있었고 말이다.
하나, 영국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이다. 그런 연상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임이 분명했다.
‘완성하고 나서야 의견을 좀 들어볼 수 있겠네.’
이내 재승이 이번에는 촉이 얇은, ‘라운드 브러쉬(Round Brush)’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수채화를 그릴 때처럼, 바지 곳곳에 얇고 섬세한 선들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다리오금을 비롯하여 앞 허벅지 쪽, 프론트 포켓 아래쪽 등. 재승이 손에 쥔 붓을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얇고 가는 선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길어봐야 4㎝를 넘지 않고, 두께는 0.5㎝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얇은 선들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그저 워싱(Washing) 자국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재승이 브러쉬를 내려놓으며, 나직이 입을 뗐다.
“페인트는 끝.”
“벌써?”
“응, 이 정도면 충분해.”
말을 마친 재승이 이번에는 ‘커터 칼’과 ‘사포지’를 집어 들자, 잠자코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영국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그건 어디에 쓰려고?”
“총알 자국을 낼 거야.”
“총알 자국?”
이내 재승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해 보이고는, 곧장 칼로 원단에 작은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0.5㎝ 정도 남짓한 크기의 작은 구멍이었다. 그러고는 구멍 부위를, 사포지로 박박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와….”
영국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청바지에 구멍이 뚫린 모양새가, 실제 총탄 자국을 방불케 했던 것이다.
이내 재승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되물었다.
“이건 어떤 것 같아?”
“와, 진짜 대박. 완전 쩌는데….”
이제 샘플 제작에 앞서 행해야 하는, ‘기초 작업’은 얼추 끝낸 상황이랄 수 있었다.
재단 가위로 패턴을 잘 잘라내고, 시접 및 재봉, 부자재 부착 등의 마무리 작업만 마치면 샘플이 완성되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재승이 데님 원단을 제 작업대로 옮기며,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허, 벌써 1시네.’
“영국아. 오늘은 먼저 들어가.”
“너는 언제 들어가려고?”
“글쎄? 일단 꼬박 아침까지는 있어야 할 것 같네.”
일단 원단에 묻힌 ‘패브릭 페인트’가 어느 정도 마르고 나면, 다림질을 한 번 해줘야 한다.
세 종류의 샘플들 중, 한 개 정도는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이내 재승이 영국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나긋한 투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아침에 작업실 올 거면, 와서 나 좀 깨워주고.”
“오케이. 알았어. 그럼 먼저 갈게.”
“그래. 내일 보자.”
영국이 작업실을 나선 뒤,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냉장고에 에너지드링크 한 캔을 꺼내 들었다. 갓 꺼내 든 캔이, 일월 초의 밤공기처럼 차갑다.
치익-!
캔을 딴 뒤, 곧장 몇 모금을 들이켰다. 별말 않고 서 있던 영국이 돌아간 것뿐인데, 정말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이내 재승이 시선을 돌려서는, 한차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널찍한 대로, 주황색 가로등 불빛들, 어딘가 침착해 보이는 새까만 밤하늘.
“후….”
숨을 길게 내쉬어 보인 뒤, 다시금 작업대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보낸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야지만 역사가 완성될 것이다.
자신의 역사가.
또, 월 플라워의 역사가.
한차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 재단가위를 집어 들었다.
조용하고 외로운 새벽이, 더는 낯설지 않다.
이 외로움과 더 친밀해질 무렵엔, 훨씬 높은 곳에 서 있겠지.
서걱. 서걱.
가위 날이 맞물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 * *
다음 날 아침. 재승은 영국이 아닌, 휴대폰의 진동 덕분에 잠에서 깨어났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잉-.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맹렬히 진동하고 있었다.
이내 재승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매트리스 아래 바닥을 손으로 더듬거려 대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니, 아직 아침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다.
매트리스 위에 몸을 뉘였던 게 아침 여덟 시 반 정도였으니, 고작 삼십 분 정도밖에 잠들지 못한 것이다.
“하아….”
숨을 토해내듯 뱉어내고는, 막 집어 든 핸드폰의 액정을 확인해 보았다.
[ 쿠바쿠바 김민혁 ]발신자는 다름 아닌, 쿠바쿠바 온라인 셀렉트 샵의 총담당자 김민혁이었다.
이내 재승이 곧장 수신 버튼을 누른 뒤, 잔뜩 잠겨 있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여보세요?”
– 주무시고 계셨나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 아! 인터뷰 잘 봤습니다. 이번 FTV 매거진 인터뷰.
“감사합니다.”
– 인터넷 반응도 좋던데요?
FTV 매거진 측에서 워낙 잘 포장을 해준 덕에, 나름의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상태였다.
소수 네티즌들에게, 어리지만 소신 있고 철학이 뚜렷한 디자이너라는 평을 받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FTV 측에서 워낙 편집을 잘해주신 덕인 것 같아요.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 주신 건가요?”
– 다름 아니라, 신상품 입고 일정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이내 재승이 “아…” 하고 한차례 침음을 흘려보였다.
돌려 말했다지만, 이는 일종의 독촉 전화랄 수 있었다.
하기야, 당장 신상품을 이어 붙여 출시해도 모자를 판국에 별도의 언질조차 없이 출시를 미루고 있는 실정이니 의문이 들 수밖에.
이내 재승이 아직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제 눈을 벅벅 문질러 대며, 나긋한 투로 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전화드리려고 했어요. 조만간 세 종류를 한 번에 출시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세 종류요?
“네. 이번 신상품은 청바지, 라이더 재킷, 면 티셔츠까지 도합 세 종류예요. 청바지 샘플은 새벽에 막 완성시켰고요.”
– 흠….
침묵이 흐르기를 잠시. 이내 김민혁이 사글사글한 어투로 입을 뗐다.
– 혹시 지금 방문드려도 될까요?
“지금요?”
– 오늘 마침 덕이동 쪽에서 미팅이 있어서요. 재승 씨 사무실도 일산 맞죠?
덕이동이라면 사무실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
“아, 네. 맞아요. 마두역 쪽이에요.”
– 재승 씨, 괜찮으시면 가는 길에 잠시 들를게요. 입주 선물도 드릴 겸, 샘플도 구경할 겸해서, 겸사겸사.
“그러세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네, 문자로 주소만 찍어주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뒤, 통화가 끝났다. 김민혁의 번호로 사무실 주소를 보내준 뒤,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세수라도 좀 해야지.’
* * *
통화를 마친 뒤로부터, 채 20분이나 지났을까?
김민혁이 입주 선물을 손에 든 채, 사무실에 발을 들였다.
“금방 오셨네요?”
“네. 자유로 들어설 무렵에 전화드렸었거든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재승이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는 사이, 김민혁이 챙겨 온 박스를 협탁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입주 선물이에요. 대단한 건 아니고, 공기청정기에요. 작업실에 계시는 시간이 길 것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혹시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이내 재승이 멋쩍은 듯 제 뒤통수를 긁적거려 대며 나직이 답했다.
“네. 어쩌다 보니….”
“샘플은 어디에 있어요?”
“아, 잠시만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작업대 위에 대충 올려두었던 신상 청바지 샘플을 김민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첫 번째 샘플이에요.”
“네? 첫 번째요?”
김민혁이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재승이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기초 패브릭 선정이 망설여져서, 원단 세 종류를 주문했거든요.”
“일단 하나씩 다 만들어보시려고요?”
“네.”
“와, 정말 지극정성이시네요.”
감탄한 듯 말해 보인 김민혁이 건네받은 샘플 청바지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양손으로 바지를 쫙 펼친 채 살펴보다가, 끝내 협탁 위에 잘 늘어놓은 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앞면도, 뒷면도, 심지어는 안감까지 꼼꼼히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되물었다.
“재승 씨. 혹시 제품 단가는 얼마 정도 생각하세요?”
“손이 많이 가는 바지라서요.”
“편히 말씀해 주세요.”
“장당 20만 원대 생각하고 있어요. 원단도 값이 조금 나가는 편이고, 공장 공임비도 꽤 붙을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재승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물었다.
“바지는 어떤 것 같으세요? 괜찮은가요?”
“이건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김민혁이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이고는,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나, 머릿속 계산기가 빠른 속도로 두드려지는 중이었다.
이내 김민혁이 재승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분명한 경외(敬畏)의 시선이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디자이너가 불쑥 나타난 것일까?
이윽고.
“재승 씨. 이 청바지, 언제까지 출시해 주실 수 있으세요?”
“네? 글쎄요? 이제 막 샘플이 나온 단계라….”
“정말 죄송한데, 일정 타이트하게 조여서 다음 주까지 출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김민혁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재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되물었다.
“…네? 다음 주요?”
셀렉트 샵에서, 입점해 있는 브랜드에 신상품 발매를 독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옷이란 게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을뿐더러, 독촉할 권한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매출 상승을 원한다면, 빠른 발매가 좋다고 권유하는 정도에 그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랄 수 있었다.
재승이 두 눈을 끔뻑거리고 있던 찰나. 김민혁이 제 수첩을 꺼내 들며, 나직이 답했다.
“다음 주에, 사이트 대배너 한 칸이 비어요.”
“네? 대배너요?”
“쿠바쿠바 스토어 온라인 사이트 중앙에 있는, 대배너 말이에요.”
이내 재승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한차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대배너.
쿠바쿠바 스토어의 메인 화면 중, 거의 4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배너다.
매출액이 최상위권에 이르는 몇몇 브랜드들에게만 차례로 지급되는 광고 공간.
촉이 말한다. 이건 단순한 독촉이 아니다. 엄청난 ‘빅 딜(Big Deal)’을 제안하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재승이 은근한 기대가 담긴 눈빛으로, 김민혁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큼, 흠….”
김민혁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해 보이고는, 진중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이었다.
“청바지만이라도 좋습니다. 제품이 샘플 정도 퀄리티로 나와주기만 한다면, 대배너 받기에 일절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네…?”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김민혁이 재차 뒷말을 덧붙였다.
“다음 주 초까지 물량 맞춰주시면, 사이트 메인 대배너에 넣어 드릴게요. ‘월 플라워’ 단독으로.”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기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