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4)
블랙 라벨-3화(4/299)
블랙 라벨 3화
4. 돌아왔어도 돈이 문제야
“이상-!”
탁-!
교탁에 서 있던 남자 선생이, 손에 쥔 출석부로 교탁을 한 번 내리쳤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조용하기 그지없던 교실 안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부산을 떨어대고 있는 와중에, 4분단 끄트머리에 앉은 한 무리의 학생들은 좀처럼 교실을 떠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야, 이재승. 너 진심이야?”
나직이 물어 보인 학생의 가슴팍 위로, ‘손영국’이란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영국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부진 몸을 하고 있었다.
영국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바로 곁에서 제 책들을 주섬주섬 책가방 안에 담아내고 있던 재승이 답했다.
“영국아. 우리 이제 몇 달만 있으면 고삼이야.”
“아니, 그래서 진심이냐니까…?”
“수능도 봐야 하고, 대학도 가야지. 쭉 열심히 공부해 왔을 다른 친구들하고 비교해 보면, 지금 시작해도 한참 늦게 시작하는 거야.”
“하, 그래. 맞는 말이긴 한데, 왜 갑자기….”
영국이 말끝을 흐려 보이자, 재승이 가방을 매며 사뭇 스산한 어투로 답했다.
“영국아.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야, 이재승-!”
이내 영국이 답답하다는 듯, 탄탄해 보이는 제 가슴을 쾅쾅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재승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함께 온갖 악행을 일삼던 친구였다. 한데, 대체 무슨 바람이든 것인지 돌연 공부를 하겠다는 선언을 해온 것이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국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재승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재승이 제 의자를 책상 아래로 밀어 넣으며, 짤막하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영국아. 분명히 말해두는데, 아무리 너라도 내 미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멀리할 거다.”
“뭐?”
“진심이야. 너도 현명한 선택 했으면 좋겠다.”
말을 마친 재승이 곧장 교실을 빠져나갔고, 영국은 멍하니 그런 재승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하, 씨. 진짜… 저 새끼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영국이, 답답함을 추스르지 못하고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려 보였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나이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재승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제 방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 며칠 사이, 재승은 그 누구에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한 가지 지니게 되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기현상을 겪은 스스로조차, 현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별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며칠 전.
자신은 놀랍게도 13년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땠냐고? 그냥 깊은 잠에 빠졌다가, 다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그게 전부였다.
한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루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던 서른한 살의 자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거울 속에 서 있는 것은, 마냥 앳되어 보이는 고등학교 2학년의 자신이었던 것이다.
“후우-.”
이내 재승이 손을 뻗어서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캘린더를 집어 들었다.
이제 딱 7일째다.
어느덧 과거로 돌아온 지도, 일주일이란 시간이 흐른 것이다.
재승은 이제 자신이 겪은 기현상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래,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꿈 따위가 아닌, 명백한 현실이다.
자신이 늘상 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류의 망상이 실현된 것이다.
어떤 원리에 의거하여 발발한 현상인지는 모른다.
하나, 자신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움직여야 한다.
더 이상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다. 동대문에서 이미테이션을 만들며 보낸 시간과 경험이 있으니, 또래의 경쟁자들과 비교한다면 조금 유리한 고지에 서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나,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그게 전부다.
‘내 경쟁자들은 또래가 아니야….’
재승의 목표는 명확했다.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브랜드, ‘월 플라워(Wall Flower)를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만드는 것.
그렇게 생각한다면, 재승의 경쟁자들은 또래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아니랄 수 있었다.
세계적인 브랜드들.
그리고 그런 브랜드를 이끌어가고 있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야말로 재승의 경쟁자들인 것이다.
“하아….”
유명 디자이너들 몇몇의 이름을 뇌까리다 보니, 괜스레 위축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갈 길이 멀다. 그들이 경쟁자란 사실을 상기시키고 나니, 허투루 쓸 시간은 1초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승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재승은 향후 13년간의 패션 트렌드를 알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유독 유행에 민감한 업계가, 패션업계다.
미래에 대한 지식은, 재승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 중 가장 강력한 무기랄 수 있었다.
“그래. 충분히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세뇌하듯 소리 내어 중얼거려 보인 재승이, 이내 책상 책장 수납공간에 넣어두었던 택배박스를 꺼내 들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의문의 발신자로부터 전달받았던 택배였다.
재승은 곧장 택배박스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물건들을 차례로 꺼내 들기 시작했다.
연필 한 자루와, 뿔테 안경. 내용이 없는 잡지와,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시계가 담겨 있는 시계 케이스까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이 물건들 역시 재승과 함께 과거로 딸려왔다.
재승은 이 물건들이, 자신이 겪은 기현상에 대한 실마리를 간직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서의 마지막 기억도, 시계의 태엽을 감던 때였지….’
재승은 물건들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채, 팔짱을 끼고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책상 책장의 수납공간에 방치해 두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사 물건들이 아닌 것 같다.
이 물건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선 재승은 뿔테 안경을 집어 들어 한 번 착용해 보았다.
“딱 맞네.”
디자인만큼, 착용감도 훌륭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방 안 이곳저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흠, 확실히 허황된 짐작이었던 건가…?’
재승은 종종 ‘혹시 이 물건들에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지는 않을까?’하는 짐작을 했었다.
적어도 정황상은, 예사 물건이 아니란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으니 말이다.
한데 착용 전·후로 아무런 변화도 없다.
자신이 아직 활용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평범한 물품들일 뿐인 것일까?
정답은 모른다.
어쨌든 확실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지금 이 안경은 평범한 액세서리(Accessory)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재승은 안경을 도로 벗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쓰고 지내기로 했다.
과거로 돌아오며 시력이 회복된 덕에 딱히 안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지만, 안경의 디자인 자체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던 탓이었다.
이번에는 한쪽 면에 ‘Wall Flower’라는 글귀가 각인되어 있는 연필을 집어 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정한 상호명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딱히 특별한 부분이 엿보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안경이 기대감을 걷어내 준 덕분일까? 재승은 별 미련 없이 연필을 제 필통 안에 집어넣었다.
‘비록 특별한 힘은 없어도, 의미는 있는 물건이니까… 되도록 아껴 써야겠다.’
연필 옆면에 쓰인 ‘월 플라워’라는 로고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듯했다.
재승은 자신이 언젠가 정식적으로 브랜드를 런칭하고, 회사를 운영하게 된다면 사무직원들에게 월 플라워의 로고가 각인된 사무용품들을 배급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하며 필통의 지퍼를 닫았다.
지이익-!
그다음에는 곧장 잡지책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백지 상태인지라 잡지라 칭하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굳이 마땅한 명칭을 떠올려보자면, ‘폐지’ 정도랄까?
“흠.”
잠시 고민하던 재승이 잡지와, 시계박스를 도로 택배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잡지는 딱 봐도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고, 시계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디자인을 하고 있어 착용하고 다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저런 시계를 손목에 두르고 다녔다간, 만나는 사람마다 시계의 출처를 물어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얼추 정리를 마친 재승이, 택배 박스를 다시금 책장 수납공간 안에 잘 두었다.
당장은 그 어떤 특이점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절대 평범한 물건들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함께 과거로 돌아온 물건들이야. 절대 평범한 물건들일 리 없지.’
이내 재승이 다시금 상념에 젖어들었다.
어떤 방식이 가장 효율적일까?
과연 어떤 방식이 디자이너로서의 입지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굳혀나갈 수 있는 방법일까?
영국의 세인트 마틴스, 벨기에의 앤트워프 왕립학교, 미국의 파슨스 스쿨. 혹은 일본의 유명 복장학원들 등.
고교 졸업 후, 해외의 명문 패션스쿨이나 교육 기관에 진학하는 것?
이내 재승이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좋은 방법들이긴 하다. 하나, 현실성이 다소 떨어지는 계획인 듯했다.
해외 명문 패션 스쿨들의 학비는 고사하고, 고등생활조차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는 것은 도움이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학교생활을 이어나가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래서야 제대로 된 배움을 얻기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재승은 더욱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하여튼 그놈의 돈이 문제라니까….’
돈, 돈, 돈, 하고 나직이 뇌까려대던 재승이 일순 두 눈을 번쩍 떠보였다.
“어라? 내가 벌면 되잖아?”
재승이 마치 큰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던 찰나.
띠리릭- 띠익-!
방문 너머에서, 현관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돌려서는, 벽면에 거치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가구 공장에서 근무하는, 재승의 어머니. 김은형이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