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42)
블랙 라벨-41화(42/299)
블랙 라벨 41화
42. 뮤즈(Muse) 등장
갑작스러운 칭찬 탓일까?
“네?”
평소와 달리 멍한 표정으로 되물어 보인 이강준이, 차량 앞 유리창과 재승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조금만 더 살펴볼게요.”
무던한 투로 말해 보인, 재승이 제 시선을 다시금 파일철로 돌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일철에 고정되어 있는 A4용지 위로.
이강준이 그린 일러스트는 도합 여섯 장이었다. 매일 야근을 자처하더니, 그 짧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이도 그려냈다.
‘열심히 하긴 했구나….’
어쨌든, 중요한 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잘’ 하는 거다.
그리고 이강준이 그린 일러스트들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듯했다. 열심히, 잘 그려낸 일러스트였으니까.
스륵-.
스륵-.
스륵-.
A4용지를 한 장, 한 장 넘겨낼 때마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공을 거치지 않은 원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완벽한 오산이었다.
이강준이 면접 당시에 제출했던 포트폴리오와 비교해 본다면? 아예 다른 사람이 그린 일러스트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강준 씨, 두 번째 일러스트 말인데….”
“네.”
“이번 주말내로 도식까지 완벽히 해서, 넘겨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디자인이 발탁되었음을 넌지시 알리는 말이었다.
이내 이강준이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차량 앞 유리창과 재승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 바라보며 되물었다.
“네? 그, 그럼….”
“일단 한 벌은, 출시 확정이에요.”
“맙소사….”
이강준이 엷게 떨리는 투로 중얼거려 보이던 찰나.
“이번 S/S시즌 상품 제작 시기까지, 아직도 한 달 가까이 남아 있는 거 알고 계시죠?”
“네? 네.”
“그때까지 더 부지런히 그려봐요. 한 벌만 달랑 출시하면, 아쉽지 않겠어요?”
“가, 감사합니다!”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꽉 들어가 있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이내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인 재승이, 이번 S/S시즌 신상품 대열에 합류하게 된 두 번째 일러스트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디자인 한 번 끝내주게 잘 뽑았네.’
전반적인 디자인이나, *실루엣(*Silhouette: 옷의 전체적인 외형 윤곽)이 훌륭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재승 본인이 요구한 주제를 완벽히 녹여냈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다.
재승이 월 플라워의 디자인 팀 직원들에게 제시한, 이번 S/S시즌의 주제는 간단했다.
– On Wall Flower Way
스트릿 브랜드로서의 월 플라워가, 앞으로 나아가게 될 방향성이 깃들어 있는 옷.
이강준이 디자인한 옷이 딱 그랬다.
우선 그가 디자인한 옷의 종류는 ‘후드 티셔츠’였다.
남녀노소, 누구나 입을 수 있을 법 해 보이는 펑퍼짐한 핏 감의 후드 티셔츠.
일단 핏 선택부터 마음에 들었다. 여태껏 출시된 여타 의류들과 달리, 남·여 공용이란 점이 특히나.
남성 고객이 입는다면 살짝 느슨한 느낌의 핏 감이 나올 것이고, 여성 고객이 입는다면 일명 ‘*보이 프렌드 핏(*Boy Friend Fit: 남자친구의 옷을 입은 것처럼 펑퍼짐한 핏)’이 나올 게 분명했다.
어쨌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후드 티셔츠의 양팔 부분에 강렬하기 그지없는 느낌의 ‘디플로마 필체’로 적어 넣어둔 글귀 한 줄이었다.
‘Different or Die.’
차별화되거나, 아니면 죽거나.
탁-!
재승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한참 동안 살펴보던 파일철을 덮어 보이던 때.
“사장님, 저 지금 꿈꾸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정말 꿈만 같아서….”
이강준이 엷게 떨리는 투로 건네 보인 물음이었다. 이내 재승이 이강준의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애꿎은 제 아랫입술을 괜히 살살 물어뜯어 대는 중이었다. 이내 재승이 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보이며, 나직이 답했다.
“글쎄요? 보통은 이런 상황을 ‘꿈’이라고 하지는 않죠.”
“네?”
“제가 알기로는 ‘시작’이라고 하거든요.”
한차례 방긋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이내 나직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열심히 해봅시다. 이 옷이, 디자이너 이강준의 시작이에요.”
재승의 말을 끝으로, 차 안으로 한차례 정적이 몰아쳤다. 차량 엔진이 내보이는 소음만이, 이따금씩 그 정적을 흩트릴 뿐이었다.
이강준도, 재승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 *
시간이란 게 으레 그렇듯, 몇 날 며칠이란 시간이 정말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강준은 맨 처음 디자인 한, ‘*D or D(Different or Die)’ 후드 티셔츠를 시작으로, 추가로 몇 벌을 쏟아내듯 디자인해 냈다.
후드 티셔츠와 같은 디자인의 ‘긴팔 면 티셔츠’나, ‘반팔 티셔츠’ 등. 옷의 형태와, 실루엣에만 변동을 주는 식으로 말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 열리는, 주간 회의 시간. 재승이 사무실 한쪽 벽면에 자리한,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재승은 말끔하게 넘겨 올린 포마드 헤어(Pomade Hair)를 한 채, 안경을 눈이 아닌 이마 위에 걸쳐 둔 상태였다.
이내 재승이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보이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좋은 소식부터 하나 말씀드리고, 회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말에, 협탁 앞 소파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기대감 어린 눈을 해 보였다.
이내 재승이 제 손에 쥐고 있던 A4용지를 화이트보드 위에 자석으로 고정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이강준이 디자인한 옷들의 일러스트였다.
이윽고.
“이미 전해 들으셨을지는 모르겠는데, 강준 씨가 직접 디자인한 옷들입니다. 강준 씨 디자인 3개가, 이번 2011 월 플라워 S/S시즌 신상품 대열에 합류하게 됐어요.”
재승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차례 박수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가 멎어들 무렵에는, 곳곳에서 축하의 말이 들려왔다.
“강준 씨, 축하해”, “와, 축하해요” 등… 직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축하의 말을 건네기 시작한 것이다.
동경, 시기, 질투, 부러움 등. 여러 감정이 담긴 눈빛들이 이강준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내 멋쩍다는 듯 제 뒤통수를 긁적여 대던 이강준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감사합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손뼉을 한 번 쳐 보이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짝-!
“다들 주목! 강준 씨도 마찬가지고, 다른 디자인 팀 직원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S/S시즌 신상품 제작 시작까지, 아직 2주는 더 남았어요. 부지런히 고민하시고, 그려내시면 충분히 추가 발탁되실 수 있습니다.”
재승의 말에, 몇몇 직원들이 “네!” 하고 힘차게 답해 보였다. 그제야 본격적인 주간 회의가 시작되었다.
매출 현황부터 시작하여, 이번 S/S시즌 신상품 발매 일정 및 ‘룩 북’ 제작 일정, 이제 얼추 마무리된 힙스 보드와의 콜라보레이션 건 등.
여러 안건이 차례로 화두에 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흘러, 회의가 얼추 마무리되어 가던 찰나.
재승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겨 보이고는, 재차 입을 뗐다.
타악-!
“아!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직원들이 다시금 귀를 쫑긋 세운 채, 재승의 입에서 흘러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번 S/S시즌 ‘룩 북’ 공개 방식에 변동이 생겼어요. 본래는 제품 출시와 동시에, ‘쿠바쿠바 사이트’에 룩 북을 공개하고, 구매 고객에 한해서 페이퍼 카탈로그를 사은품으로 내보낼 생각이었습니다만….”
재승이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이기 무섭게, 사무실 내부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내 재승이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켜 보이고는 재차 뒷말을 덧붙였다.
“FTV 매거진 다음 발행호를 통해 ‘룩 북’에 수록될 사진 일부를 선 공개하기로 협의를 마친 상황입니다.”
“예?”
“정말요?”
몇몇 직원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며 되묻던 찰나,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뿐 아니라, 월 플라워의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특집 인터뷰도 진행하게 될 예정입니다. 아직 정확한 일정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다음 주 중이 될 것 같네요.”
재승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직원들이 한차례 환호성을 내질러 보이기 시작했다.
“사, 사장님… 그럼 저희 다 잡지에 실리는 거예요?”
“와아아아아아-!”
이번 ‘룩 북’ 공개의 화력을 증가시킬 방법을 물색하다가 불현듯 떠올렸던 아이디어였다.
자신에게 나름 우호적인, ‘FTV 매거진’이라면 화력에 보탬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편집부 권형목 팀장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오케이 사인이 돌아왔다.
심지어 월 플라워의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는, FTV측에서 먼저 제시해 온 안건이었고 말이다.
“인터뷰 일자 잡히면 말씀드릴 테니까, 그날은 출근 복장에 신경 좀 써주세요. 이상입니다.”
이내 직원들이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해 보인 뒤, 하나둘씩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간 회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을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근무 시간이라기엔 영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별다른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재승 역시 제자리로 돌아와서는, 자신이 그린 도식들이 담겨 있는 파일철을 펼쳤다.
‘어디 보자….’
S/S시즌 준비는 몹시 순조롭게 진행되어가고 있는 중이랄 수 있었다.
직원들에게는 밝히지 않았다지만, 이미 일곱 벌의 옷을 디자인하는 데 성공한 재승이었다.
자신이 디자인한 일곱 벌과, 이강준이 디자인한 3벌의 ‘D or D’시리즈를 합치면 본래 목표로 삼았던 열 벌이 된다.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샘플 제작에 착수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좋아….”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재승이, 이내 제 모니터 바탕화면에 띄워둔 캘린더를 살펴보았다.
샘플 제작은 예정대로, 2주 뒤부터 시작할 것이다. 품목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또, 다른 직원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수 있게끔 해주기 위해서였다.
샘플이 완성되고 나면, 곧장 ‘룩 북’에 수록시킬 사진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 보인 재승이, 한차례 기지개를 쭉 켜 보였다.
“끄으으-.”
정말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밤에는 이번 신상 의류들의 도식을 그리거나, ‘룩 북’에 수록시킬 사진들의 이미지를 구상해야 했다.
심지어 이동할 때나, 잠들기 직전에는 어떻게든 짬을 내서 토플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당히 숨 가쁜 일상이었으나 절대 괴롭거나,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바쁜 일정이, 일련의 안도감을 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사, 사장님. 손님 오셨는데요?”
물류·배송 팀 직원 유승우가 사무실 문 앞에 선 채, 건넨 말에 재승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예? 손님이요?”
딱히 내방을 약속한 손님이 없었던 터라, 더욱 의아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애초에 택배기사, 음식점 배달부 외에는 방문한 손님이 없기도 했고.
“일단 안으로 모셔주세요.”
“이,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이윽고, 유승우의 뒤를 따라 한 남성이 들어섰다.
갑작스레 방문한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 직원들이, 하나같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이기 시작했다. 재승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새까만 선글라스와, 덥수룩하게 기른 콧수염,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
익숙하기 그지없는 인물이, 월 플라워의 사무실에 찾아올 일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 것만 같은 인물이, 재승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이내 의문의 손님이, 착용하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보이며 나직이 말을 건넸다.
“이재승 디자이너 맞죠?”
“아….”
“스타일이 상당히 좋네요.”
말을 마친 사내가, 한차례 “하긴, 그래야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는 거겠죠?” 하고 익살스레 되물었다.
잠시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던 재승이, 애써 정신을 다잡아 보이고는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류, 류승호 씨….”
이내 재승의 앞에 선 사내. 류승호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반갑습니다. 류승호입니다.”
영화제, 시상식, 공항 패션, 심지어 일상 속에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을 선보이기로 유명한 ‘배우’이자 국내 톱 급 ‘패셔니스타’.
류승호.
그런 그가, 재승에게 악수를 청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