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43)
블랙 라벨-42화(43/299)
블랙 라벨 42화
43. 마음을 움직이는 말
“일단 앉으시죠.”
애써 무던한 투로 말해 보인 재승이, 류승호를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입버릇이 되어버린 말이 한 가지 있었다.
‘아무 연예인이나, 우리 옷 한 번만 입어주면 참 좋을 텐데….’
공항 패션으로든, 시상식이나 영화제를 비롯한 공식 석상에서든, 아니면 방송에서든.
어디서든 상관없으니 유명 셀럽이 한 번만 입어준다면.
또 그로 인해 회자되기 시작한다면.
브랜드에 대한 평가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나 마찬가지다.
물론 아직까지는 현실감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이야기인 터라, 막연한 기대에 그쳤던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재승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의 만남은 ‘기회’라고.
그러니, 잘 붙잡아야 한다고.
“사무실을 잘 꾸며 놓으셨네요. 느낌이 아주 좋아요.”
류승호가 소파에 앉으며 건넨 말에, 재승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보이고는 답했다.
“감사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류승호.
자타공인 ‘*트렌드 세터(TrendSetter: 유행의 선도자)’랄 수 있는 그는, 재승이 전생에서부터 동경하던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
단연 그가 꽤 널리 알려진 ‘패셔니스타’이고, 영향력 있는 ‘셀럽’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패션이 재승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전부터 정말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
“저를요?”
“네. 승호 씨 덕분에 생각이 정말 많이 바뀌었거든요.”
류승호가 의아하다는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재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전에 ‘슈트’에, ‘조단 져지’를 믹스매치 시키신 걸 보고, 충격을 받았었거든요.”
“아, 기억나네요.”
“부끄럽지만 그때 처음으로, ‘스포츠’와 ‘클래식’을 융화시킬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승호 씨가 제 고정관념을 깨주신 거죠.”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 아시죠? 딱 그 상황인 것 같네요. 그냥 그렇게 입으면 꽤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게 입어봤던 것뿐이에요.”
재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언급하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 최대한 주의하며, 신중히 말을 이었다.
“지난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때도 마찬가지고요. 정말 대단한 선견지명이었잖아요.”
“그건 꽤 가슴 아픈 기억이네요.”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아마 ‘류승호’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 중 하나일 것이다. 적어도 재승은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 류승호는 밑단을 접어 올린 슈트 바지 차림에, 낮은 단화를 함께 신은 채로 레드카펫을 밟았었다.
쉽게 말하자면 롤 업 팬츠에, 스니커즈 차림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패션이라지만, 2006년 당시에는 절대 아니었다.
몇몇 전문가들로부터 ‘지나치게 파격적이다’, ‘류승호는 너무 앞서나간다’ 등의 악평을 들었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워스트 드레서(Worst Dresser)’로 뽑히게 되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류승호의 선견지명과 패셔너블함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일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래저래 꼭 한 번은 뵙고 싶었어요.”
“그럼 우리 이재승 디자이너, 소원 성취하신 건가요?”
“그런 셈이죠.”
문득 너무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류승호를 치켜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었던 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탓이었다. 재승에게 있어, 그는 일종의 ‘뮤즈(Muse)’와도 같았으니까.
이내 재승이 생수 한 모금을 들이켜 보이고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정신없이 이야기하느라, 정작 중요한 건 못 여쭤봤네요. 혹시 협찬 때문에 찾아오신 건가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승이 속으로 ‘제발, 제발…’ 하고 연신 되뇌고 있던 찰나. 류승호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아뇨, 협찬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네? 그럼….”
“요즘은 한창 쉬는 중이어서요.”
이내 류승호가 능청스레 눈썹을 한 번 튕겨 보이고는,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제가 옷은 되도록 직접 입어보고 사는 편이거든요. 옷도 볼 겸, 또 이재승 디자이너랑 대화도 나눠볼 겸해서 한 번 들러봤어요.”
“예….”
“아, 혹시 바쁘신 거면 다음에 다시 올게요. 저 요즘 정말 한가하거든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재승이, 저도 모르게 “아!” 하고 나직이 탄성을 흘려 보였다. 전생에서 들었던 일화 한 가지가,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탓이었다.
‘시크릿 클로젯(Secret Closet)’이란 이름의 디자이너 브랜드가, 막 생겨났을 무렵.
옷을 *DP(*Display)할 공간은 물론이고, 피팅룸조차 없는 여섯 평짜리 사무실에 류승호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공간이 워낙 협소했던지라 옷은 모두 박스에 넣어둔 상태였는데, 손수 박스 안에 담긴 옷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고, 심지어 개인 차량에서 옷을 피팅해 보며 구입했다는 일화였다.
적어도 패션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일화랄 수 있었다.
피팅룸 하나 없던 ‘시크릿 클로젯’은 결국 세계 여러 유명 컬렉션을 거치며 인정받게 됐고, 앞서 말한 일화는 류승호의 선견지명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계기로 자리매김하게 됐으니 말이다.
‘뭐, 대충 비슷한 의도로 방문한 건가?’
어떤 이유로 방문한 것이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임은 분명했다.
친분만 다져둔다 하더라도 득이 될 만한 사람이다. 득실을 떠나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고.
만약 옷이라도 한 벌 사 간다면?
언제 어떻게 파급효과를 거두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옷장에 관상용으로 버려둘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개의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시간이 널널한 편이어서요.”
“다행이네요. 마음 편히 대화 나눌 수 있겠어요.”
“승호 씨. 그런데, 저희 브랜드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게 되신 거예요?”
“지난번에 FTV 매거진 인터뷰 하셨잖아요.”
“아, 네.”
“12월 발행호였나, 1월 발행호였나, 가물가물한데… 어쨌든, 거기서 처음 뵀었고, 그 뒤로 쭉 관심 있게 지켜봤었어요. 감각적인 분이신 것 같아서.”
“아….”
FTV 매거진과의 인터뷰가 좋은 커리어가 되어주리란 막연한 믿음이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곤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재승이 잠시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찰나. 류승호가 한 차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겨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네? 어떤 부분이요?”
“기억하실지는 모르겠는데… 나이는 금세 사라질 장점이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대답하셨던 부분이요.”
“아….”
류승호의 말을 듣기 무섭게, 당시 리포터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한차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신조차 가물가물한 대화 내용을, 류승호가 외우고 있는 것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벅차오르는 듯했다.
“정말 큰 힘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에이… 기억에 남을 말이니까 기억하고 있는 것뿐인데요, 뭐. 감사할 일까지는 아니죠.”
한차례 손사래를 쳐 보이며 답해 보인 류승호가, 곧장 질문을 건넸다.
“그나저나 다음 신상품 발매 예정일은 언제예요?”
“글쎄요, 일단 빠르면 2월 말. 지연되면 3월 중순 정도로 생각해 두고 있긴 한데, 확답을 해 드리기에는 조금 모호하네요. 아직 샘플 제작은커녕, 디자인도 다 안 나온 상태여서요.”
“음? 발매 틈이 꽤 긴 편인 거 아닌가요?”
“네?”
“보통 한 번에 두세 벌씩 출시하는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한 달 간격으로 출시하잖아요. 아닌가?”
이내 재승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맞아요. 그런데 사실 저희가 이번부터 제작 방식에 변동을 주려고 하거든요.”
“제작 방식에 변동을요?”
“네, 이제부터는 구색을 갖춰서 해보려고요.”
류승호가 재미있다는 듯 “오?” 하고 소리 내어 말해 보이자, 재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S/S시즌 의류들을 한 번에 출시할 생각이에요. ‘룩 북’도 제작해서 발매할 거고, 종이 카탈로그도 시험 삼아 배부해 볼 예정이고요.”
잠자코 재승의 설명을 듣고 있던 류승호가, 사뭇 진중한 투로 되물었다.
“제법 큰 도전인 셈이네요?”
착각일까? ‘도전’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이 실려 있는 듯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슬며시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네. 저희 월 플라워 기준에서는 꽤 큰 도전인 셈이죠.”
“이재승 디자이너.”
“네.”
“다름 아니라 ‘룩 북’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지금까지 몇 개나 뽑으셨어요?”
“네?”
“디자인 말이에요.”
“아, 일단 완성한 디자인은 딱 열 개예요.”
“흠, 민감한 사항인 건 아는데….”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류승호가, 조심스레 뒷말을 덧붙였다.
“혹시 저한테 좀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예? 디자인을요?”
“네.”
그의 말대로 확실히 민감한 사항이었기에, ‘왜?’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재승이 마냥 아리송하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류승호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
“제 생각에는 제가 도울 수 있을 만한 일이 꽤 있을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류승호가 미소와 함께, “큰 도전이니까요” 하고 덧붙였다.
“승호 씨가 도와주실 수 있는 일이요?”
“룩 북에 수록될 사진들, 모델 컷 맞죠?”
“네.”
“모델 발탁은 다 끝내신 거예요?”
그가 넌지시 건넨 물음을 듣기 무섭게, 머릿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길 잠시. 류승호가 재차 뒷말을 덧붙였다.
“디자인을 보기 전까지는 확답을 할 수 없지만, 옷이 괜찮으면 얼마든 도와드릴 의향이 있어요. 모델로서요.”
“승호 씨.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희 자금 상황으로는 승호 씨 페이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저 돈 받을 생각 없어요.”
“네…?”
“그럴 생각이었더라면 도와드릴 의향이 있다고 말씀드릴 게 아니라, 함께 일할 의향이 있다고 말씀드렸겠죠.”
말을 마친 류승호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나직이 첨언했다.
“일단 옷부터 먼저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입어야 하는 옷이 영 아니다 싶으면, ‘월 플라워’가 아니라 ‘베르사체(Versace)’여도 안 되거든요.”
트렌드 세터로서의 신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내 잠시 고민에 젖어들어 있던 재승이 짤막하게 답해 보였다.
“좋습니다. 일단 한 번 보시죠.”
어떤 동기로 자신을 돕겠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나, 적어도 류승호가 굳이 자신의 디자인을 도둑질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이내 재승이 제 집무용 탁상 위에 놓여 있는 파일철을 집어 들어서는, 류승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천천히 살펴보세요.”
“네, 잠시만요.”
류승호가 보인 적 없던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파일철 안에 꽂혀 있는 A4용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스륵-.
스륵-.
스륵-.
이윽고. 류승호가 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 가며 입을 뗐다.
“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데요?”
“아, 감사합니다.”
“할게요. 모델. 페이는 이번 S/S시즌 신상 샘플 한 벌씩. 어때요?”
“물론이죠! 아니, 매 시즌마다 한 벌씩 꼭 드릴게요!”
마냥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갑작스레 사무실에 찾아온 셀럽이, 룩 북 모델까지 자처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내 류승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보니까 든 생각인데, 모델로서 외에도 도울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네요.”
말을 마친 그가, 한차례 고개를 내저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아니, 도와야 할 것 같네요. 어떻게든.”
그런 그의 두 눈 위로, 진득한 이채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