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48)
블랙 라벨-47화(48/299)
블랙 라벨 47화
48. 과연 득일까? 실일까?
오디션에 참가한 모델들의 복장은 일관되어 있었다.
타이트한 핏의 청바지와, 마찬가지로 상체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딱 달라붙는 흰색 면 티셔츠 차림.
다들 같은 종류의 옷을 입고 있다지만, 미묘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평범한 디자인의 흰색 면 티셔츠를 입은 모델이 있는 반면, 배꼽이 훤히 드러나게끔 기장을 짧게 잘라낸 ‘크롭 티(Crop T Shirt)’ 차림의 모델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재승에게 중요한 것은 모델들의 복장이 아니었다.
어차피 잠깐 지그시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 사라져 버릴 천 쪼가리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맙소사….’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런웨이를 거닐고 있는 모델의 옷이 점차 투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성인만화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하는 ‘투시안경’은 아닌 듯했다.
모델들의 나신(裸身)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아한 곡선이 보였다.
철저한 식단 관리와, 트레이닝, 자기 관리의 산물이랄 수 있는 우아한 곡선이.
일말의 위화감조차 없이, 마냥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전신 마네킹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물론 이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을 뿐.
“허….”
재승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려 보이자, 강형록 교수가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물음을 건네 왔다.
“왜 그러나?”
“아닙니다.”
아니라고 답해 보였다지만, 재승은 현재 쉽사리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자신이 디자인한 옷들로 변형되었으니 말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아니, 사실상 방법이랄 것도 없었다.
모델들의 몸이 흡사 마네킹처럼 보이기 시작할 무렵. ‘그 옷을 입혀보면 어떨까?’ 하고, 자신이 만들었던 옷 중 한 가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마치 온라인 게임 속 캐릭터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처럼 모델들의 의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도 심지어 한 치의 끊임조차 없이, 순식간에.
안경에도 분명 특별한 힘이 숨겨져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선례가 되어준 물건들도 있었고, 자신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설마 이런 힘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월 플라워 연필이나, 미래 잡지 덕에 내성이 생긴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큰 어려움 없이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어느새 손 안 가득 고여 버린 식은땀을 바지춤에 몇 번 문질러 닦아내고는, 한차례 심호흡을 해 보였다.
“후….”
일단은 런웨이 워킹을 지켜보는 것이 우선이다.
안경이라면 언제고 살펴볼 수 있겠지만, 런웨이 워킹은 지금이 아니면 지켜볼 기회가 없으니까.
이내 다음 지원자가 커튼 사이를 막 비집고 나와서는, 런웨이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 9번 참가자 이소명
잠깐 정신을 파는 사이, 벌써 몇 명이 지나간 듯 보였다.
모델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한 번 훑어본 뒤, 곧장 모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눈에 띄게 옅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눈은 작지만, 콧날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자고로 지나치게 아름다운 모델은, 옷의 ‘디자인’을 잡아먹을 우려가 있다. 모델의 과한 아름다움이 객관성을 저해하는 것이다.
반면 9번 지원자 이소명은 매혹적이되, 그 정도로 아름답지는 않았다.
바라던 바였다.
대중들로 하여금 ‘동경심’을 유발해 내는 대신, ‘공감’과 ‘희망’을 이끌어낼 수 있는 외모.
‘일단 외모는 합격인데….’
쿵. 쿵. 쿵. 쿵.
그녀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고 있는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춰,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던 찰나. 재승이 다시금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자신이 고안해 낸 디자인의 옷들부터 시작하여, 종지에는 이강준이 만들어낸 옷들에 이르기까지.
마치 ‘아바타(Avatar)’에 한 벌, 한 벌 옷을 입혀 보듯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찾았다.”
중얼거리듯 작게 말해 보인 재승이, 이내 한차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런웨이 워킹을 모두 지켜본 뒤, 건물 지하 1층 내에 자리한 회의실에서 지원자들과의 개별 면담이 진행되었다.
사실 이미 내정해 둔 지원자가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개별 면담을 생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른 명에 이르는 지원자들과의 면담을 모두 끝마친 뒤.
“디자이너 님, 결정은 내리셨어요?”
더블에스 팀 모델 아카데미 강사, 박민영이 제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 보이며 건네온 물음이었다.
이내 재승이 입안 가득 머금고 있던 생수를 황급히 삼켜내고는 답했다.
“네. 9번 이소명 지원자가 제일 적합한 것 같네요.”
재승이 확신이 가득 서려 있는 투로 답해 보이기 무섭게, 박민영이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되물었다.
“이소명 지원자요?”
강형록 교수 역시 마찬가지.
그에게는 그리 인상 깊은 지원자가 아니었던 것일까?
한차례 ‘9번…?’ 하고 중얼거려 보인 그가, 이내 이번 오디션에 지원한 모델들의 프로필 차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쨌든, 선택은 재승의 몫이다. 다들 내키지 않는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기야 했지만 그렇다고 만류의 말을 꺼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네. 일단 이번 S/S시즌 룩 북 여성 모델은 이소명 씨가 맡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지금 바로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나눠야 할 이야기가 태산처럼 쌓여 있는 상태였다. 불과 며칠 뒤 진행될 촬영 컨셉부터 시작하여, 진행방식, 원하는 느낌. 또, 모델료와 지급 방식에 이르기까지.
이내 박민영이 한차례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 * *
며칠 뒤, 연남동 외곽에 자리한 차도 앞. 큼지막한 밴 한 대 뒤로, 스타렉스 두 대가 줄지어 서 있는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 차량 안에서, 롱 패딩(Long Padding)차림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려서기 시작했다.
이번 월 플라워의 S/S시즌 룩 북 촬영에 투입될 스태프들이었다.
어느덧, 대망의 룩 북 촬영일이 밝은 것이다.
이내 막 밴에서 내려선 류승호가, 제 점퍼 깃을 꽉 여며 보이며 입을 뗐다.
“어후, 오늘 너무 추운데요?”
한창 촬영 구상 안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던 재승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컨디션은 좀 어때요?”
“끝내줘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입국하자마자….”
“아니에요.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류승호가 한차례 씨익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일단 룩 북 촬영 콘티 좀 보여주시겠어요?”
“아, 네. 여기요.”
제품의 샘플이 예정일보다 훨씬 빨리 나온 덕에, 룩 북 촬영일이 잔뜩 앞당겨진 상태였다. 붕 떠 버린 시간을 그대로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류승호만 고생이었다. 귀국 당일, 쪽잠을 자고 곧장 촬영에 투입되게 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마음에 드네요.”
“그래요?”
“연남동에서 시작해서, 홍대 인근, 그다음에 명동으로 이동하는 거 맞죠?”
“네. 맞아요.”
촬영 계획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사전에 계획해 두었던 대로, 스트릿 스냅 샷 느낌으로 촬영을 진행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일단 이곳 연남동에서 시작하여, 홍대 인근, 마지막으로 명동 에이랜드 앞 삼거리까지.
일말의 상징성을 띄고 있는 장소들을 순회하며, 순차적으로 촬영을 진행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연남동 촬영과 홍대 인근 촬영은 낮 시간대에, 명동 에이랜드 삼거리에서의 촬영은 밤 시간대에 진행할 계획이었다.
이내 류승호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나긋한 투로 입을 뗐다.
“좋은 그림 만들어볼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이강준이 아메리카노 커피가 담겨 있는 종이 캐리어 백을 양손 가득 쥔 채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 님, 류승호 씨. 우선 한 잔씩 하세요.”
“스탭분들 인원수에 맞게 사 오신 거 맞죠?”
“물론이죠.”
이강준이 직접 디자인한 옷들도, 이번 S/S시즌 ‘룩 북’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터라 촬영 현장을 지켜볼 수 있게끔 배려해 준 것이다.
이내 재승이 막 건네받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 보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강준 씨, 그런데 소명 씨는요?”
이소명. 이번 룩 북 촬영의 여자 모델로 발탁된, 더블에스 팀 아카데미 수료생.
손에 쥔 핫 팩을 연신 주물럭대고 있던 이강준이, 저 멀리 정차된 스타렉스 차량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이고는 답했다.
“지금 차량 안에서, 촬영 복장으로 환복 중이세요.”
“오케이. 소명 씨 나오시면, 간단히 브리핑하고 바로 촬영 시작할게요.”
나직이 말해 보인 재승이, 이내 제 눈앞으로 펼쳐져 있는 광경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무게가 나가 보이는 크로스백을 어깨에 들쳐 맨 채, 제 DSLR 카메라의 조리개를 세팅하고 있는 촬영 업체 측 포토그래퍼.
이런저런 소품들을 점검하고 있는 스탭들. 연신 콘티를 살펴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류승호와, 그의 매니저까지.
꽤 그럴싸한 광경이었다. 또, 그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S/S시즌 준비도 거의 끝나가는구나….’
촬영이 아무리 길어져 봐야, 오늘 자정 전으로는 끝날 게 분명했다.
룩 북 촬영 및 보정이 끝나고 나면, 물량 준비를 시작하는 동시에 FTV 매거진을 통해 사진 몇 장을 선공개할 예정이었고 말이다.
물량이 갖춰지고 나면 쿠바쿠바 웹진을 통해 모든 룩 북 사진들을 공개함과 동시에, S/S시즌 의류들의 판매를 정식적으로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다음?
그다음에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옷에 대한 평가와 반응, 그리고 수입을.
재승이 한차례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찰나.
“디자이너 님,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죠?”
막 스타렉스 안에서 내려선 이소명이, 쭈뼛쭈뼛 재승을 향해 다가오며 건넨 말이었다.
앞서 미팅을 할 때도 느꼈던 바 있지만, 런웨이 위에서 보였던 모습과 달리 꽤 소극적인 성격인 듯 보였다.
아니면, 함께 촬영하게 된 류승호 덕분에 주눅이 든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내 재승이 그런 그녀의 행색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나직이 답했다.
“아닙니다. 승합차 안에서 옷 갈아입고, 준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지금 이강준이 디자인한 ‘디프런트 올 다이(Difrent or Die)’ 후드 티를 입은 채, 그 위로 패딩 점퍼를 갖춰 입고 있는 상태였다.
날카로운 바람 탓인지, 가녀린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촬영 콘티를 훑어보고 있던 류승호가, 사뭇 경쾌한 어투로 말을 건네왔다.
“소명 씨 맞죠? 함께 촬영하게 된 류승호입니다.”
“아, 정말 영광입니다….”
그녀의 얼굴 위로 감격이 어렸다. 하기야, 당연한 이야기였다. 커리어로 삼을 만한 촬영은 이번이 처음인데, 상대 모델이 류승호다. 저런 표정이 나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콘티는 살펴보셨죠? 촬영에 앞서, 몇 가지 상의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류승호와 이소명이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이. 재승이 금세 시끌벅적해진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길가를 거닐던 이들이 걸음을 멈춘 채, 이쪽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꽤 구색이 갖춰져 있는 데다가, 류승호까지 서 있으니 행인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던 것이다.
“어? 류승호 아니야?”
“옆에는 누구야?”
“몰라? 모델 같은데?”
평일 오전인지라, 그리 많은 인파가 몰리지는 않았다. 대부분 잠깐 관심 있게 지켜보다가, 금세 가던 길을 가기 일쑤였고 말이다.
“와, 류승호는 커피 마시는 것도 완전 화보네. 페북에 올려야지.”
“어? 나도! 나도!”
잠자코 행인들의 대화를 듣고 서 있던 재승이, 이내 미간을 살짝 좁혀 보이기에 이르렀다.
‘뭐? 페북…?’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판이 커지는 느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