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51)
블랙 라벨-50화(51/299)
블랙 라벨 50화
51. 디자이너들의 밤
“우선 한 번 볼까요?”
재승이 나직이 말해보이기 무섭게, 직원들이 노트북 앞으로 모여서기 시작했다.
쿠바쿠바 스토어 온라인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 정중앙에 자리한, 대배너란. 월 플라워의 이름이 다시금 쿠바쿠바 스토어의, 메인 페이지에 걸렸다.
[ ‘월 플라워’ 2011 S/S시즌 제품 출시 기념, 룩 북 대공개 ]글귀 아래로는, 이번에 촬영한 모델 컷 이미지들의 ‘*썸네일(Thumbnail: 작게 축소된 이미지)’이 나란히 게시되어 있는 상태였다.
‘보자….’
딸깍-.
재승이 첫 번째 썸네일 사진을 클릭하자, 원본 크기의 큼직한 이미지가 화면 위로 나타났다.
“와, 대박-!”
“다시 봐도 느낌 장난 아닌데요?”
“스토어 사이트에서 보니까 또 다른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보정 작업을 거쳤기 때문일까?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유출됐던 ‘직찍’ 사진들과는 가히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월 플라워의 옷을 입은 채, 악동처럼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두 모델들의 사진.
홍대 놀이터에서, 명동 에이랜드 앞 삼거리에서, 연남동의 길거리에서, 또 으슥한 주택가 골목에서.
쉐딩(Shedding) 메이크업을 통해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만든 이소명과, 별도의 메이크업 없이 거친 느낌을 극대화시킨 류승호가 만들어내고 있는 케미는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내 재승이 계속해서 사진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쿠바쿠바를 통해 공개한 룩 북 사진은, 도합 마흔 장. 엄격한 기준으로 선별해 낸 마흔 장의 사진들이 ‘슬라이드 쇼(Slide Show)’의 형태로 재생되는 형식이었다.
이윽고.
이강준이 직접 디자인한 ‘디 올 디(D or D)’ 시리즈 의류들의 모델 컷이 나타나자, 추지훈이 화색을 해 보이며 외쳤다.
“어?! 강준 형이 디자인한 옷이다!”
“…그렇네.”
낮은 목소리로 답해 보인 이강준이, 감격 어린 표정을 한 채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단단한 알 껍데기를 깨고, 막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지어 보일 법한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재승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이내 그가 한차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똑같이 미소로 화답해 보인 재승이, 다시금 사진을 넘겨대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그렇게 마흔 장의 룩 북 사진을 모두 훑어본 뒤, 재승이 직원들을 한 번 스윽 둘러보고는 입을 뗐다.
“아! 제가 정신이 없어서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사실 룩 북에 한 장을 더 추가시켰거든요.”
“네? 그럼 마흔 장이 아니라, 마흔 한 장인 거예요?”
“그런 셈이죠.”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재차 마우스 버튼을 꾹 눌러보이던 찰나. 노트북 화면 위로, 직원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마흔 한 번째 이미지 파일이 나타났다.
마흔 한 번째 사진은 신상품의 모델 컷 이미지가 아닌, 일종의 ‘엔딩 크레딧(Endng Credit)’ 형식으로 수록시킨 페이지랄 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번 2011 S/S시즌 상품 제작에 참여한 인원의 명단이 모두 수록되어 있는 명단인 셈이었다.
직원들 한 명, 한 명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모델들, 촬영 업체 측 스태프들에 이르기까지.
[Thanks To….]S/S시즌 준비 기간 내내 야근에 시달려야 했던,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디자인 팀 직원들, 아니, ‘식구’들께.
부족한 저와 함께 월 플라워를 건축해 나가고 있는 이강준 씨, 남광민 씨, 추지훈 씨, 그리고 듬직한 물류·배송 팀 직원 유승우 씨.
또 룩 북 모델을 자처해 준 소중한 뮤즈 류승호 씨와, 추운 날씨에도 좋은 사진을 위해 고생해 주셨던….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직원들이, 그제야 하나둘씩 입을 떼기 시작했다.
“사장님, 이건 정말 예상도 못 했었어요….”
“와우….”
“우리 사장님, 로맨티스트가 분명해.”
그런 직원들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재승이, 이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자랑할 거리 정도는 되겠죠? 참고로 룩 북 마지막에 수록된 이미지는, 곧 발행될 이번 시즌 ‘페이퍼 카탈로그(Paper Catalog)’에도 그대로 수록될 예정입니다. 미리 알아두시라고요.”
고리타분한 감사 인사 대신, 영원히 잊지 못할 선물을 주고 싶었다. 쉽게 말하자면,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는 상징적인 무언가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지금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고, 현재 그들이 갇혀 있는 단단한 ‘알 껍데기’에 작은 숨구멍을 뚫어주고 싶었다.
그 숨구멍을 통해, 바깥 세계는, 그들이 그렇게나 갈망하고 있는 진짜 디자이너들의 세계는 어떤지에 대한 느낌을 조금이나마 알려주고 싶었다.
룩 북의 마지막에 수록된 크레딧 페이지와, 비밀리에 준비한 페이퍼 카탈로그는 그런 의도로 준비한 선물이었다.
짜악-!
이내 재승이 한차례 손뼉을 세차게 마주쳐 보이는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모티브를 얻은 선물이긴 한데, 엄연히 따지고 본다면 ‘오프닝 크레딧이란 표현이 훨씬 더 적합하겠네요.”
“네?”
“물론 S/S시즌 준비가 힘들기는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매년마다 행하는 작업이잖아요. 월 플라워는 이제야 막 출발 선상에 섰을 뿐이기도 하고요.”
말을 마친 재승이, 한차례 세차게 손뼉을 마주쳐 보이고는 나긋하기 그지없는 투로 재차 말했다.
“우선 실시간 매출 현황 창부터 띄워놓고, 치킨부터 먹는 게 어떨까요? 다 식은 것 같은데.”
“예?! 매출 현황 보면서요?”
추지훈이 화들짝 놀라 보이며 건넨 말에, 남광민이 고개를 한 차례 주억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하기야, 매도 미리 맞는 게 나으니까.”
어라? 그게 그렇게 되나?
어쨌든, 노트북 화면 위로 쿠바쿠바 스토어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 오너 전용 실시간 매출 현황 창을 띄웠다.
이윽고.
“와, 끝장나네요.”
“허….”
“맙소사.”
실시간 매출 현황 창을 확인한 직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고 말았다.
자정을 넘긴 야심한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이번 S/S시즌 의류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던 탓이었다.
직원들을 강제로 ‘워커홀릭(Workaholic)’으로 만들어줄, 일 모양의 폭풍이 몰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 * *
며칠 뒤, 이른 아침. 월 플라워의 사무실이 자리한 상가 건물 앞에 도착한 이강준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지금처럼 상가 건물 앞에서 피우는 담배가, 보통 그날 오전의 마지막 담배가 되곤 한다.
적어도 점심시간 전까지는, 정신없이 일하게 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요즘 같은 시기라면 더더욱.
“후우, 추워라….”
슬슬 봄이 올 때도 될 것 같은데, 좀처럼 날이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이내 이강준이 제 코트 깃을 꽉 여민 채,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택배는 언제쯤 도착하려나…?’
며칠 전, 간만에 부모님께 택배를 보냈다.
조금 이른 설 선물과 함께, 자신의 인터뷰가 짤막하게나마 수록되어 있는 이번 달 FTV 매거진 발행호를 동봉했다.
아무래도 처음인 듯했다.
부모님께 “저는 잘하고 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꽤 그럴싸한 결과물을 보여 드리는 것은.
“후우-.”
필터 부분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곧장 사무실이 자리한 상가 건물 안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며 옷맵시를 가다듬고,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 6층에 첫 발을 내딛던 순간.
화장실에서 막 나온 듯 보이는 추지훈이, 손에 남아 있는 물기를 가볍게 털어내 보이며 말했다.
“형, 오셨어요?”
“응. 좋은 아침. 지훈아, 오늘은 물량 좀 어때?”
“평소랑 같아요. 오늘도 죽음이에요, 죽음.”
“그래?”
나직이 되물어 보인 이강준이 손에 쥐고 있던 사무실 문고리를 돌려보이던 찰나, 추지훈이 나긋한 투로 낮게 말했다.
“축하드려요.”
“응?”
이윽고 이강준이 사무실 안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재승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좋은 아침.”
“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강준 씨, 일단 이것 좀 받아요.”
나직이 말해보인 재승이, 제 탁상 위에 놓여 있던 파일철을 집어 들어서는 건네주었다. 이내 이강준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되물었다.
“이게 뭐예요?”
“계약서예요. 한 번 꼼꼼히 훑어보시고, 점심시간 전까지 작성해서 제출해 주세요.”
“네? 계약서요?”
“이번 S/S시즌 의류 제작에 기여하셨으니, 정식 디자이너로 진급시켜 드려야죠.”
“아….”
이강준이 마냥 멍한 표정을 한 채, 재승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던 찰나. 재승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계약은 1년 단위로, 연봉은 삼천오백으로 인상, 직접 디자인하신 ‘디 올 디(D or D)’ 시리즈 총 판매대금에 대한 로열티 1% 지급.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직접 한 번 훑어보세요.”
“네….”
“다른 직원들한테는 미리 말씀드렸으니까, 개의치 않으셔도 되고요.”
말을 마친 재승이, 이강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고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광민 씨랑, 강준 씨는 계속 주문 내역 확인해 주세요. 지훈 씨만 저랑 같이 창고로 갑시다.”
“넵!”
“제품 재고 주기적으로 확인해 주시고, 발주내역 15개 단위로 끊어서 창고로 좀 가져다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오늘 하루도 다들 파이팅 합시다.”
이강준은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채, 재승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기업 산하의 스파(SPA) 브랜드였다면, 아니, 여타 브랜드였더라도 가히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다.
그때, 남광민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강준 씨. 정식 디자이너 되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아, 감사합니다!”
“저랑 지훈이도, 이번 F/W시즌에는 꼭 정식 디자이너로 진급할 거예요.”
“네, 응원할게요.”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 보인 남광민이, 유려한 손놀림으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답했다.
“그래요, 고맙네. 일단은 밀린 일부터 먼저 합시다. 이놈의 주문은 빼도, 빼도 끝이 없네요.”
“그러니까요. 자고 일어나면 쌓여 있고, 자고 일어나면 쌓여 있고, 꼭 군대 있을 때 눈 같다니까요?”
“크크큭. 그러게. 그나저나 사장님은 오늘도 사무실에서 주무신 것 같던데요?”
“예? 오늘도요?”
“그나마 새벽에 사장님이 조금씩 물량 빼 놓으시니까 이 정도인 거지, 아니었으면 진짜 끔찍했을걸.”
* * *
한편, 그 시각.
재승은 잔뜩 쌓여 있는 박스더미 앞에 선 채, 한창 통화를 이어나가는 데 여념이 없었다.
쿠바쿠바 스토어 측의 총담당자, 김민혁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탓이었다.
– 지금 마침 상승세를 탔으니까, ‘쿠폰’을 조금 만들어서 뿌려볼까 해요.
“쿠폰이요?”
월 플라워 2011 S/S시즌 의류는 출시 하루 만에, 쿠바쿠바 스토어 최근 인기 상품 ‘베스트 10’ 안에 무려 5종의 옷을 입성시키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심지어 그중 한 벌은, 이강준이 디자인한 디 올 디(D or D) 후드티였고.
덕분에 쿠바쿠바 스토어 측에서 계속해서 이런저런 전략을 짜줄 뿐 아니라,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 자세한 사항은 제가 사무실 방문해서 말씀드릴게요.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방문드려도 될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 아아! 그리고 중요한 사안이 한 가지 더 있어서요.
“중요한 사안이요?”
– 네. 이번에 쿠바쿠바 스토어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의 ‘오너 디자이너’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거든요.
“예? 모이는 자리요?”
– ‘디자이너들의 밤’이라고 해서, 조금 늦은 신년회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디자이너분들은 연말·연시에 더 바쁘시니까요.
수화기 너머의 김민혁이, 잠시 틈을 두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사실 장소가 바(Bar)여서, 이재승 디자이너한테는 말씀을 못 드렸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참석하시는 디자이너분들 중, 이재승 디자이너를 보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요. 혹시 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참석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제가 그날 과연 시간이 될지를 잘 모르겠네요.”
– 아마 ‘인맥(人脈)’을 다져두기에 아주 좋은 장소가 될 거예요. 그 부분 하나만큼은, 제가 장담해 드릴 수 있어요.
이내 재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쿠바쿠바 스토어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들 중에서도, 꽤 명망 높은 브랜드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 중 몇 사람과 간단히 친분을 다져놓는다면, 후에 꽤 도움이 될 지도 모르고.
잠시 고민하던 재승이, 이내 나긋한 투로 답했다.
“그래요, 그럼 참석할게요.”
‘디자이너들의 밤’이라.
꽤 재미있는 행사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