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52)
블랙 라벨-51화(52/299)
블랙 라벨 51화
52. 달라진 명성
그날 밤, 열 시 무렵.
정해진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앉은 채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S/S시즌 제품 출시 전부터 그랬다지만, 출시 후부터는 야근이 상당히 당연시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때, 재승이 제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직이 입을 뗐다.
“다들 잠시 주목해 주시겠어요?”
그 말에 직원들이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재승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이내 재승이 나긋한 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쿠바쿠바 스토어 담당자분이랑, 프로모션(Promotion) 건으로 미팅이 잡혀 있거든요.”
업무 탓에 양해를 구하고, 늦은 시간에 미팅을 잡았다.
스케줄이 잔뜩 잡혀 있는 것은 김민혁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그 역시 곧잘 수락해 주었고.
“이제 슬슬 외근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광민 씨, 잠시만 와주시겠어요?”
“아, 네.”
남광민이 재승에게 다가서자, 재승이 제 코트 안주머니에서 흰색 봉투 몇 개를 꺼내서는 건네주었다.
“이번 달 보너스 급여예요. 이름 적어뒀으니까, 광민 씨가 알맞게 나눠주시면 돼요. 저는 지금 바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훈 씨랑, 승우 씨는 창고에서 분류 작업 중이에요. 그리고 카드 협탁 위에 놨으니까, 야식 시켜서 드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재승이 사무실을 나서려던 찰나. 남광민이 재승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사장님.”
“네?”
“정말 감사하긴 합니다만, 이번 달 급여 보니까 상당히 많이 챙겨주셨던데….”
많이 챙겨줬다고? 글쎄? 뭐, 그런 걸 수도 있겠다.
특근 수당, 심야 수당, 주휴 수당까지. 챙겨줘야 할 것들은 모두 챙겨줬고, 덕분에 직원들은 하나같이 약속된 급여보다 두 배는 더 되는 급여를 수령했으니까.
하지만 말 그대로 당연히 챙겨줘야 하는 것들을, 챙겨준 것뿐이었다.
“월급은 여러분께서 일하신 만큼 넣어 드린 것뿐이에요. 정확히 계산해서, 그대로.”
“네. 그렇기는 한데 보통은….”
남광민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광민 씨.”
“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직이 말해 보인 재승이, 손에 쥐고 있던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한참 어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조금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차례 말끝을 흐려보였던 재승이, 이내 사뭇 진중한 투로 뒷말을 덧붙였다.
“제가 느끼기엔, 세상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네?”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당연한 걸 지키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 되어버리곤 하잖아요. 안 그래요?”
“아….”
“받아 마땅한 합당한 대우니까, 부담 없이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재승이 씽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미팅 때문에, 먼저 들어가 볼게요. 죄송해요” 하고 덧붙여 말해 보인 뒤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이내 남광민이 사뭇 결연한 표정을 한 채, 재승이 열고 나선 문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아….”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봉투의 두께로 미루어 보건대, 적지 않은 금액임이 분명했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 어린 오너 디자이너는, 자신이 지닌 말의 힘에 대해 알고 있을까?
결속력을 상승시키고, 충성심을 절로 자아내는 자신의 말들이 지닌 힘에 대해서.
우두커니 선 채, 문만 바라보고 있던 남광민이 이강준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건네주며 나직이 입을 뗐다.
“강준 씨, 저는 여기서 평생 일하려고요.”
이내 이강준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그럼 우리, 평생 보고 지내겠네요.”
* * *
재승이 쿠바쿠바 스토어의 담당자 김민혁을 만난 곳은, 정발산역 인근에 자리한 카페 하우스텐.
사무실 근처에서 미팅할 때면, 항상 약속 장소로 삼는 곳이었다.
“이야, 신수가 훤해지셨네요.”
장난스럽게 말해 보인 김민혁이, 미리 주문해 둔 커피를 건네며 재차 말을 이었다.
“일단 이번 S/S시즌 대박 축하드려요. 매출이 하늘을 찌를 기세던데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프로모션(Promotion)’ 이야기부터 할까요?”
“그러시죠.”
이내 김민혁이 쿠바쿠바 스토어 측에서 마련한, 이벤트에 대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스토어 이용 고객들에게, 즉시 사용할 수 있는 할인 쿠폰을 지급해 드릴 예정이에요. 월 플라워의 상품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할인 쿠폰을요.”
“아아, 네.”
“아까 통화로 말씀드렸던 것처럼, 할인 금액에 대해서는 저희 스토어 측에서 지급해 드릴 예정이고요.”
재승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는 형식의 프로모션이었다.
“이재승 디자이너. 이번에 ‘슈펄미(Superme)’에서도 신상품 낸 거 알고 계시죠?”
“네. 밑에서 엄청 치고 올라오는 중이던데요? 아무래도 내일 오전쯤이면 1위 자리 빼앗길 것 같던데….”
스트릿 의류 중에서는 단연 원 톱이랄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한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브랜드이다.
그런 ‘슈펄미’가 딱 그저께 S/S시즌 신상품들을 출시했고, 덕분에 월 플라워는 스토어 실시간 매출 1위 자리를 슈펄미에게 내주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던 것이다.
“그게 정말 대단한 거예요.”
“네?”
“저희도 내일쯤이면, 슈펄미가 1위를 빼앗을 거라고 관망하고 있어요. 슈펄미는 항상 없어서 못 파는 브랜드니까요.”
“그런데요?”
“슈펄미를 상대로 이틀이나 1위를 지킨 브랜드는, 월 플라워가 최초예요.”
이내 김민혁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번 프로모션도 챙겨 드릴 수 있던 거고요.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한 가지 더 있어요.”
“좋은 소식이요?”
“네. 이번에 쿠바쿠바 스토어에서, 홍대 인근에 오프라인 편집샵 런칭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아, 네.”
“아마 늦어도 이번 하반기 안에는 오픈될 거예요. 입점 브랜드들을 심사하고 있는데, 월 플라워가 후보에 올라갔어요.”
그 말에, 재승이 한차례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 말인 즉, 곧 오픈하게 될 쿠바쿠바 스토어 오프라인 매장에 월 플라워가 입점하게 될 수도 있단 뜻이었다.
당장 자력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임대료가 하늘을 찌르는, 홍대 인근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만약 쿠바쿠바 스토어의 오프라인 매장에 입점하게 된다면 그런 고민을 덜어낼 수 있게 된다. 브랜드의 입지가 달라지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아직 확정된 이야기는 아니라지만, 절대 확률이 낮지는 않은 것 같아요. 직원들이 다들 밀어주고 있기도 하고, 임원진도 대부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거든요.”
“매출 덕분인가요?”
“아뇨. 옷이나 매출은 둘째로 치더라도, ‘스토리’가 워낙 좋으니까요.”
김민혁의 말에 재승이 의아하다는 듯, “스토리요…?” 하고 되물어 보였다.
“네. 스토리. 쿠바쿠바 스트릿 스냅 샷이 발굴해 낸, 무명 브랜드의 성공기. 이 정도면 대중들의 구미를 맞추기 부족함 없는, 자극적인 소재 아니겠어요?”
“아….”
“그때, 명동에서 재승 씨 친구분 스냅 샷 촬영했던 리포터 친구 기억하시죠?”
“아, 네.”
“그 친구 지금 월급이 50만 원이 올랐어요. 스토어 매출에 이바지한 기여도를 고려해 보면, 사실 그렇게 파격적인 대우는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이내 김민혁이 제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켜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아마 오프라인 편집샵 입점이 확정되면, 관련 기사들이 몇 개 보도될 수도 있어요. 특집 칼럼도 몇 개 낼 예정이고요. 일단 스토어 측에서도 이 건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논의 중이거든요.”
“그렇군요.”
“네. 그래도 아마 월 플라워에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거예요. 오히려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거두실 수 있을 겁니다. 확신할 수 있어요. 서로 윈 & 윈(Win & Win)하는 거죠.”
“신경 써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재승이 진심을 담아 말해 보이자, 김민혁이 한차례 웃음을 흘려 보이고는 답했다.
“아닙니다. 일단 오프라인 편집샵 입점 건은, 확정되는 대로 말씀을 드릴게요. 심사 기간이 길어서, 결과는 아마 F/W시즌 준비 시작하실 무렵에 나올 거예요.”
“아,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디자이너의 밤’ 행사 말인데요.”
“네.”
“혹시 ‘바라뱅(BaraBang)’이라는 바 알고 계세요?”
‘바라뱅(BaraBang)’.
회귀하기 이전의 전생에서부터, 몇 번이고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의 바였다.
간판조차 없는 바이지만, 패션 관계자들에게는 상당히 유명한 핫 플레이스랄 수 있는 곳.
유명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드(Kal Lagafeld)가, 한국에서 쇼를 올린 뒤 에프터 파티를 해서 더 유명세를 탔던 곳이기도 하고. 서울에 온 해외의 *셀럽(Celebrity)들이 한 번씩은, 꼭 찾는다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아뇨? 처음 들어봅니다.”
“국내·외 디자이너 분들이 자주 찾는 장소예요. 인테리어도 독창적이고, 선곡도 좋고,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죠.”
“네. 그런데요?”
“매년마다 ‘디자이너들의 밤’ 행사를 진행하는 곳이거든요. 재승 씨가 미성년자인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그날 하루는 저희가 완전히 임대하는 형식이기도 하고, 제가 보호자 신분으로 함께 참석하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요.”
김민혁이 조심스레 건네 보인 말에, 재승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사뭇 명쾌한 투로 답했다.
“네. 참석할 수만 있으면, 저도 꼭 참석해 보고 싶어요. 다른 디자이너 분들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애초에 매출을 기준으로 파티에 참석할 오너 디자이너들을 선별한다고 했다.
비록 쿠바쿠바 스토어 입점 브랜드 한정이라지만, 국내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오너 디자이너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참하게 끝났던 전생에서, 명성을 얻긴 했었으나 어디까지나 음지(陰地)에서의 명성이었을 뿐이다.
이런 교류의 자리에는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기에, 사실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려 보이고는 물었다.
“이번 주말이라고 했죠?”
“네.”
“혹시 저희 정식 디자이너 한 명이랑 동행해도 될까요?”
* * *
그 주 주말, 재승은 ‘디자이너들의 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조금 이른 시간에 사무실을 나섰다. 물론, 이강준도 함께 말이다.
렌트한 차량을 타고, 이태원으로 향하는 길. 이강준은 연신, 부담스러운 감정을 토로했다.
“하, 사장님. 가는 길에 편의점 좀 들러도 될까요?”
“네?”
“청심환이라도 한 개 먹어야 할 것 같아서요. 편의점에서 청심환 팔죠?”
“글쎄요, 모르겠네요. 사 먹을 일이 있었어야 알죠.”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계속해서 이강준을 다독여 주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 봐야 다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야 마냥 무던하게 해 보였다지만, 떨림을 느끼고 있는 것은 재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강준에게 “저도 너무 떨려요. 어쩌죠?” 하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무던한 척 말하고 있는 것이었을 뿐.
“참석 디자이너 명단 보니까, 거물급 디자이너분들도 많이 오시더라고요….”
“어차피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될걸요? 보통 그런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서 놀다 가잖아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모임 장소인 ‘바라뱅’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에 선 가드들에게 ‘월 플라워에서 왔습니다’ 하고 말해 보이기 무섭게, 곧장 입장을 도와주었다.
음침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길 잠시.
쿵! 쿵! 쿵! 쿵!
큼직하다 못해, 웅장하기까지 한 일렉트로닉 음악이 고막을 때려 대기 시작했다. 내부 전경을 살펴보니, 바(Bar)라기보다는 클럽에 가까운 곳이었다.
딱 보기에도 디자이너처럼 보이는 이들이, 자리에 앉은 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은 흥을 주체하지 못한 채, 스테이지에 올라 춤을 추고 있기도 했고.
‘이런 분위기일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다행이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산만한 분위기다. 어쨌든, 자신과 이강준에게 이목이 쏠릴 일은 없는 듯 보였다.
다들 두 사람이 발을 들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김민혁에게 듣기로는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는 디자이너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으레 해준 말인 듯싶었다.
재승과 이강준이 시골에서 막 상경한 소년들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찰나.
“어? 오셨어요?”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민혁이, 재승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단 자리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김민혁의 뒤를 따라 걷자, ‘월 플라워(Wall Flower)’라는 명패가 올려져 있는 테이블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승과 이강준이 안내받은 테이블 자리를 꿰차고 앉기 무섭게, 김민혁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얼핏 살펴보니 이강준은 남의 잔치에 몰래 온 사람처럼, 제 손톱을 질겅질겅 물어뜯어 가며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강준 씨, 지금 되게 수상한 사람 같아 보여요.”
“아, 그랬나요….”
“긴장 좀 풀어요. 다들 놀기 바빠 보이는데요, 뭘.”
교류는커녕, 말 한마디 나눌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은 듯 보이긴 했으나, 재승에게는 모두 생면부지(生面不知) 남남일 뿐이었으니까.
‘그래. 잠깐 쉰다고 생각하고, 강준 씨랑 얘기나 하다가 가면 되겠네.’
재승이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 덕에, 안도하고 있던 그때.
삐이이이익-.
흘러나오던 일렉트로닉 음악이 갑자기 중단되며, 듣기 싫은 마이크 하울링(Howling)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 아,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막 무대 위에 올라선 김민혁이 손에 쥔 핸드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댄 채,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많은 분들께서 기다리시던, 월 플라워의 이재승 디자이너가 지금 막 도착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