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54)
블랙 라벨-53화(54/299)
블랙 라벨 53화
54. 준비 기간
보름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재승은 다시 한번,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본래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면 아무리 눈치를 주고, 재촉을 하더라도, 정확히 약속된 거리만큼만 움직이는 것이 시간이지 않던가?
반면 지난 보름은 정말 눈 한 번 깜짝할 새에, ‘휙-’ 하고 자신을 지나쳐 갔다.
그사이 달력이 한 장 더 넘어갔다. 어느덧 3월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만물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을 지났고, 길가를 거니는 모든 이들의 외투가 얇아졌다.
봄이다.
이제 진짜 봄이 온 것이다.
봄.
어쩌면 한 어절로 된 단어들 중, 가장 따뜻한 느낌의 단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싹이 트고, 풀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계절. 뭔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만연하는, 희망으로 가득찬 시기.
“후우-.”
한차례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제 집무용 탁상 한편으로 밀어두었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AM 12 : 43
자정을 한참 넘긴 야심한 시간이다. 차도가 휑해지고, 도심 곳곳에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팀 직원들은 하나같이 자리를 지키고 앉은 채 도식을 그려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슥슥슥-.
직원들이 손에 쥔 연필의 심 부분과 책상이 맞닿을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이번 2011 F/W시즌에 합류하고야 말겠다는, 디자인 팀 직원들의 염원과 열정이 담겨 있는 소리였다.
‘다들 정말 열심히네.’
직원들 모두.
지난 S/S시즌 준비를 시작한 이후로, 정시 퇴근을 한 날이 단 하루도 없을 지경이었다.
제품 발매를 준비할 때는 발매를 준비하느라, 제품을 출시한 뒤에는 감당치 못할 판매 물량에 휘둘리느라….
치솟았던 매출 그래프가 서서히 꺾이기 시작할 무렵, 재승이 다시금 ‘일’ 모양의 폭탄을 투척했다.
F/W시즌 디자인 공모. 그것도 심지어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생소한 주제로.
직원들의 노고를 면밀히 알고 있는 재승이었다. 그들에게 짧은 휴식 기간이나마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늦어지더라도, 7월 안에는 F/W시즌 상품을 정식 발매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타이트하게 진행해야 해….’
8월 중에는 ‘토플’(TOELF) 시험을 응시해야 하고, 대입검정고시 시험에도 응시해야 한다.
그다음, 9월부터는 본격적인 대학 입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포트폴리오 제작에 착수하고, 관련 서류들을 작성하고, 면접에 대한 준비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끄으으-.”
한차례 기지개를 펴 보인 재승이, 내려놓았던 연필을 다시금 손에 쥐었다.
흰 도화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절로 먹먹해진다.
나는 이 위에 무엇을 그려야 하는 것일까?
대중들은 어떤 옷에 열광할까?
내가 그리고 싶은 디자인은 무엇일까?
여러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부유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해질 뿐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지니어스(Genius)’라고 부른다.
지니어스는 원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른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며, 간절히 원하거나, 하염없이 기다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저 제멋대로 불쑥 찾아올 뿐.
샤워를 하는 중에, 볼일을 보는 중에,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이따금씩 제멋대로 찾아와, 곤란하게끔 만든다.
장애를 극복한 화가이자 포토그래퍼, ‘척 클로스’(Chuck Close)가 남긴 명언이 있다.
‘아마추어가 영감을 기다릴 때, 프로는 작업을 한다.’
한차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다시금 손에 쥔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슥슥슥-.
‘점’이 ‘선’으로 변해간다. 어쩌면 작은 점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얇고 굵은, 투박하고 섬세한,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
사무실 곳곳에서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음이 절로 평온해지게끔 만들어주는, 조화롭기 그지없는 협주다.
그 소리는 이중적이다.
아름답다. 하지만, 불안정하다.
도전이라는 게 늘 그렇듯.
* * *
다시 한 주라는 시간이 더 흘렀고,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좋네요.”
안경을 이마에 걸쳐 쓴 채, 마네킹에 피팅(Fitting)되어 있는 옷을 한참 동안 살펴보던 재승이 꺼낸 말이었다. 그 말 덕에, 이강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마네킹에 피팅 되어 있는 옷은, 이강준이 이번 F/W시즌을 대비해 고안해 낸 디자인 샘플들이었다.
여성용 검정색 블레이저 재킷과, 세로 주름이 잡혀 있는 흰색 스커트.
미니멀리즘의 정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절제된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일단 블레이저 재킷은 상당히 심플한 느낌으로, 안에 어떤 옷을 받쳐 입느냐에 따라 상당히 변화무쌍한 코디가 가능할 듯 보였다.
‘확실히 괜찮아….’
미니멀리즘의 원칙에 중점을 맞춰 둔 덕에, 다소 밋밋할 뻔했던 스커트 역시 마찬가지.
세로로 들어간 주름들이, 디테일(Detail)에 숨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듯 보였다.
이강준의 감각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옷이었다.
“합격. 일단 이 두 벌은 출시 확정입니다.”
“와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강준이 한차례 기쁨의 포효를 내질러 보이자, 다른 직원들이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이강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뗐다.
“축하해요, 형.”
“강준 씨, 축하드려요.”
이강준이 고개를 숙여가며, “감사합니다.” 하고 답해 보이던 찰나. 재승이 한차례 손뼉을 쳐 보이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은 외근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갤러리’(Gallery)를 둘러볼 예정이거든요.”
아직 쇼를 올릴 만한 장소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남은 기한은 딱 세 달 남짓.
기한이 꽤 넉넉한 편이랄 수 있었으나,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들은 되도록 미리 처리해 둘 요량이었다.
한창 바쁠 게 분명한 준비 막바지 단계에, 괜히 고초를 겪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이내 재승이 남광민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광민 씨, 운전 할 줄 알죠?”
“운전병 출신입니다.”
“외투 챙기세요. 같이 나가요.”
“네!”
힘차게 답해 보인 남광민이 곧장 외투를 챙겨 들었다.
남광민을 지목한 이유는 간단했다.
별 탈 없이 작업을 진행 중인 이강준과, 추지훈과는 달리 큰 고초를 겪고 있음이 너무도 극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간 거의 모든 외근을, 이강준과 나가기도 했고 말이다.
‘이야기나 좀 나눠봐야지.’
* * *
재승과 남광민은, 렌트한 차량을 타고 ‘청담동’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갤러리 인근에 다다랐을 무렵, 재승이 라디오 볼륨을 줄여보이고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광민 씨. 요즘 잘돼가요?”
“아뇨, 조금 힘드네요.”
“그래요?”
“네. 미니멀리즘이라는 분야가 워낙 생소해서 그런 것인지, 통 감이 잡히질 않는 것 같아요.”
씁쓸한 투로 말해 보인 남광민이, 멋쩍다는 듯 한차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패션디자인 과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바 있는 이강준이나 추지훈과 달리, 남광민은 독학으로 패션을 공부했다.
자연스레 그들보다 훨씬 더 큰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입지가 위태위태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이강준은 정식 디자이너로 진급했음은 물론 F/W시즌에도 합류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자신보다 훨씬 어린 추지훈은 ‘미니멀리즘’이란 생소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꽤 잘 적응해 나가고 있는 듯 보이는 상황이었고 말이다.
“광민 씨.”
“네?”
“저희 둘의 글씨체가 같을까요?”
“아마 다르지 않을까요?”
“네. 다르겠죠. 디자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재승이 사뭇 진중한 투로 꺼내 든 말에, 남광민이 곁눈질로 재승의 얼굴을 한차례 살펴보았다.
이윽고.
“아마 처음 글씨 쓰는 법을 배우던 때엔, 저희 둘의 필체가 엇비슷했을 거예요. 둘 다 삐뚤빼뚤하고, 볼품없었겠죠. 본래 ‘필체’(筆體)라는 게 생기려면, 부지런히 따라 쓰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네. 그렇죠.”
“지금이 광민 씨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고, 부담 없이 디자인해 보세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미니멀리즘에 도전해 보겠어요? 안 그래요?”
재승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남광민이 ‘아이덴티티….’ 하고 작게 소리 내어 중얼거려 보였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재승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재차 입을 뗐다.
“그리고 영감의 수단이 될 만한 물건이라면 얼마든 경비 처리해 드릴 테니까 부담 없이 구입하셔도 좋아요.”
“영감의 수단이 될 만한 물건이요?”
“네. 미니멀리즘을 모토로 두고 있는 타 브랜드의 룩북, 패션 매거진, 아니면 장르를 불문한 전시회 티켓도 좋아요.”
많이 보고, 많이 느끼는 것만큼 ‘스펙트럼’(Spectrum)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 그 정도 복지라면 얼마든 지원해 줄 수 있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내 재승이 가장 해주고 싶던 말을 꺼내 들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부담 없이 편한 마음으로 만드는 게 관건일 것 같아요. 처음이잖아요? 잘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요. ‘수정’이나 ‘보완’이란 단어가 괜히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해보고 싶던 시도도 다 해보시고, 써보고 싶던 원단도 다 사서 써보세요.”
“…….”
“누구도 광민 씨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아요. 하지만 최소한의 결과물은 보여주셔야 해요. 일단 결과물을 보여주셔야, 피드백(Feedback)이라도 해드릴 수 있지 않겠어요?”
“네, 새겨듣겠습니다.”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 보인 재승이, 고개를 돌려서는 차창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화창한 봄날이라는 표현이, 더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지는 그런 날씨다.
당장에라도 호수공원에 달려가, 돗자리를 깔고 앉은 채 봄바람을 만끽하고 싶을 정도로.
“봄이네요.”
나직이 말해 보인 재승이, 한차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광민 역시, 사뭇 밝아진 표정을 한 채 운전대를 붙잡고 있었고.
* * *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티티’(Time Travel)라는 이름의 갤러리였다.
인터넷을 살펴보았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
안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고풍스러운 느낌의 내부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티칸(Vatican)을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것 같은, 앤틱한 느낌이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세미 정장 차림의 40대 여성이 재승과 남광민을 반겨주었다.
“어떻게 오셨죠?”
“갤러리를 한 번 둘러보고 싶어서요.”
“임대 때문에요?”
“네.”
이내 두 사람의 행색을 한차례 위아래로 훑어본 40대 여성이, 다소 까칠한 투로 말했다.
“네. 우선 따라오시죠.”
말을 마친 그녀가 휙 뒤돌아서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착각일까? ‘또각, 또각.’ 하고 울리는 구두 굽 소리마저, 차갑게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