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6)
블랙 라벨-5화(6/299)
블랙 라벨 5화
6. 다시 찾은 동대문
“뭐? 어디 가자고?”
“동대문.”
하굣길. 재승이 건넨 말에, 영국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옷 사게?”
“아니.”
“그럼 왜?”
“중고 거래 때문에. 혼자 가기에는 조금 그래서. 같이 가줄 거야?”
이내 영국이 재승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며, 살짝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같이 가줄게. 그런데 뭐 사려고? 신상 매물 또 올라온 거 있어?”
이 무렵, 재승은 종종 중고 거래를 하곤 했다.
나름 프리미엄 라인에 속하는 의류들을 입고는 싶은데, 돈이 없으니 중고로라도 구입해서 입었던 것이다.
참고로 유명 스트릿 브랜드의 의류들. 또, 명품 라인에 속하는 의류들은 중고 거래가 잘 활성화되어 있는 편이다.
우선 공급도, 수요도 많다.
크게 유행을 탈 만한 디자인의 제품만 아니라면, 매물을 게시하는 족족 팔리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가격대도 대부분 고정되어 있는 터라 관리만 잘 해가며 입는다면, 구매한 가격과 엇비슷하게 ‘리셀(Resell)’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육 개월 전쯤 32만 원을 지불하고 구입한 청바지라고 하더라도, 평소 관리만 잘 해왔다면 30만 원선에 다시 되팔 수 있는 형식인 것이다.
입다가 질리면 다시 되팔고, 그 돈으로 새로운 제품을 구입해서 입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손품을 팔고, 직거래를 위해왔다 갔다 움직이는 것이 몹시 귀찮다. 또, 최악의 경우 사기를 당할 수도 있다.
지갑이 얇다 못해 경량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재승의 입장에서는, 중고 구입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옷 사려는 건 아니야.”
“그럼 뭐 사게?”
“비밀이야.”
“뭐?”
영국이 다소 짜증 서린 투로 되묻자, 재승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일단 옷 갈아입고 다시 만나자.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어? 응.”
“그래. 이따가 봐.”
말을 마친 재승이, 영국의 어깨를 툭 쳐보이고는 제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영국은 잠시 멈춰 선 채, 그런 재승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와,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좋은 것 같은데요?”
재승이 재봉틀을 건네받은 장소는, 동대문 시장 인근에 자리한 자그마한 ‘공방’이었다.
판매자는 공장의 주인인 듯 보이는, 40대 여성.
재승이 해맑은 표정으로 재봉틀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동안, 재승에게 건네받은 지폐의 장수를 확인하던 여성이 이내 입을 뗐다.
“십만 원 딱 맞네요. 그런데 들고 가실 수 있겠어요? 꽤 무거울 텐데….”
“아, 네. 괜찮아요. 둘이서 들고 갈 거거든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턱짓으로 뒤편에 우물쭈물 서 있는 영국을 가리켜보였다.
* * *
중고 거래를 마친 뒤, 두 사람은 동대문 재래시장 인근에 자리한 포장마차로 이동했다.
재승이 동대문에 기거하던 때, 자주 이용했던 단골 포장마차였다
‘사장님은 이때도 계셨구나.’
감회가 꽤나 새로웠다. 매대 앞에 선 채, 주걱으로 떡볶이를 이리저리 휘젓고 계신 사장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오기 직전쯤에는 백발이 무성했던 걸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훨씬 건재해 보이셨다.
“자. 여기.”
이내 재승이 주문한 떡볶이와 튀김. 오뎅 몇 개가 보기 좋게 담겨서 나왔다.
“잘 먹겠습니다.”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곧장 오뎅 꼬치 한 개를 집어 들자, 영국도 따라 들며 입을 뗐다.
“야. 먼 길 함께 와주고, 짐꾼 노릇까지 해주는 친구한테 너무 소홀한 거 아니냐?”
“조용히 드세요. 이것도 아까 그 공방 사장님이 차비 하라고 만 원 빼주셔서 사주는 거니까.”
“뭐야? 그럼 원래는 아무것도 안 사주려고 했다는 거야…?!”
말을 마친 영국이 손에 들고 있던 오뎅 꼬치를, 호호 불어대기 시작했다.
시월. 늦가을이라고 하면 늦가을이고, 초겨울이라면 초겨울인 시점이다. 덕분에 밤공기가 꽤나 쌀쌀한 듯했다.
“야, 재승아. 그런데 재봉틀은 왜 산 거야?”
“그냥. 배워보려고.”
“재봉틀을?”
“응.”
이내 영국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이고는, 이죽거리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야, 이재승 씨. 이제 엄청 바빠지겠네. 안 하던 공부도 해야 하고, 재봉틀도 배워야 하고….”
“아마 그렇겠지?”
“그래도 뭔가 너랑 잘 어울리긴 하네.”
“응? 뭐가?”
“옷 만드는 거 말이야.”
짤막하게 답해 보인 영국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너 원래 옷 좋아했잖아. 멋있게 잘 입기도 했고.”
“고맙다.”
“부럽다, 짜식. 나는 진짜 커서 뭐 먹고 사냐….”
이내 재승이 사뭇 애잔한 눈으로, 영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많고 많은 친구들 중, 유독 영국에게만 마음이 쓰이는 이유가 있었다.
– 재승아. 내가 그렇게 방황했을 시간에, 차라리 음악에 집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과거로 돌아오기 전으로부터 얼마 전쯤.
전생의 영국이 자신을 찾아와 건넸던 말이었다.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영국은 자신의 진로를 너무 늦게 찾았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에야, 제대로 힙합 음악을 해보겠다며 뛰어들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음악적 감각이 특출한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결과가 마냥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에서는 꽤나 유명세를 얻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다만, 낮에는 패스트푸트점에서 일해야 했다. 음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거의 불가능했던 탓이었다.
단연 그 이유 때문에 영국이 자꾸만 눈에 밟혔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이 힙합 음악에 빠져들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 자체가, 재승 본인이었던 탓이었다.
‘조금 빨리 시작한다면, 조금 더 좋은 결과를 거둘 수도 있을지 모를 노릇이지.’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꿈이라는 게 누군가가 강요해서 생기는 것도 아닌 데다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제 코가 석 자인지라 친구를 붙들어 매고 설득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딱 한 번. 시도만 해보고, 잘되지 않는다면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흠….’
이내 재승이 주머니 안에 찔러 넣어 두었던 제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돌연 입을 뗐다.
“야. 영국아. 잠깐 이것 좀 봐봐.”
“뭔데?”
재승의 핸드폰 화면 위로 떠올라 있는 것은, 유명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Utube’였다.
이윽고, 재승이 검색 창에 ‘칸예 이스트(Kanye Yeast)’를 입력했다.
“칸예 이스트?”
“응. 미국의 유명 래퍼야.”
“래퍼?”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노래도 노래라지만, 공연 당시 착용한 옷 때문에 더욱 회자되었던 공연 영상이었다.
영상 속 칸예 이스트가 위아래로 입고 있는 옷들은, 칸예 이스트 본인과 유명 프리미엄 브랜드 ‘루이비톤즈’가 (Collaboration: 공동작업)으로 만들어낸 옷들이었던 것이다.
“지금 칸예가 입고 있는 이 옷들이, 칸예 이스트랑 루이비톤즈가 콜라보해서 만들어낸 옷들이래.”
“콜라보?”
“응. 원래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가끔씩 유명 *‘셀럽(*Celebrity의 약자, 유명인사)’들하고 콜라보 작업을 하곤 하거든. 일종의 마케팅이지.”
재승이 말을 이어나가는 내내, 영국은 영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 영상이 바로, 전생에서의 영국이 힙합에 입문하게끔 만들어주었던 영상이었다.
전생에서 영국이 막 제대했던 무렵. 두 사람은 간만에 회포를 풀기 위해 술자리를 가졌었다.
그날, 재승은 별생각 없이 이 동영상을 보여주었던 바 있었다.
그저 “이 래퍼가 입고 있는 옷들 예쁘지 않아?” 하고 물었던 게 전부였다.
그날 이후, 영국은 칸예 이스트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심지어 며칠 뒤에는 이제 힙합음악에 뛰어들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 영상 때문에,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졌거든. 나도 저렇게 멋있는 옷을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재승이 건넨 선의의 거짓말에, 영국이 나직이 되물었다.
“그래?”
“응.”
영국의 시선이 다시금 스마트폰 액정 위로 돌아갔다.
이 영상을 보여줬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면, 더 이상 영국을 설득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려 결심한 터였다.
‘역시 이걸론 안 되겠지?’
그 순간.
영국이 이채가 가득 서린 눈을 한 채,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졸라 멋있다.”
“응?”
“이 흑인, 진짜 졸라 멋있다고.”
“멋있긴 하지.”
“응. 이 흑인, 이름이 뭐라고 했지?”
“칸예 이스트.”
이내 홀로 ‘칸예 이스트’하고 몇 번이고 되뇌어 본 영국이, 재차 말을 이었다.
“좋은 영상 알려줘서 고맙다, 재승아. 네가 드디어 형님이 매일같이 보내 준, 주옥같은 야동들에 대한 보답을 하는구나.”
“하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지, 아닌지는 모르나 어쨌든 영국이 관심을 보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재승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찰나. 영국이 호들갑을 떨어대며, 재차 말을 이었다.
“어쨌든, 뭐 더 살 건 없어? 박스 하나 들어주는 걸로는 내 감사함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 같은데.”
“더 살 거? 흠….”
이내 재승이 잠시 상념에 젖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원단시장에 들러, 연습 삼아 쓸 ‘광목 원단’이라도 몇 마 사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지, 오늘은 안 되겠다.’
이 꼴로 원단 상가 내에 발을 들였다간, 시장 상인들의 텃세와 무시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할 게 분명했다.
차라리 단단히 준비를 한 뒤, 다시 동대문에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기왕이면, 내일 다시 말이다.
“오늘은 충분해.”
“그래?”
“응. 정 고마우면, 내일 한 번 더 같이 와 주라.”
“내일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