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60)
블랙 라벨-59화(60/299)
블랙 라벨 59화
60. 오랜 꿈과의 조우
이채가 서린 눈으로 전시 공간을 둘러보던 제랄딘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직이 되뇌었다.
“비밀의 정원….”
전시공간을 딱 한마디로 묘사할 수 있는 말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벽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연분홍색 꽃송이들.
“와,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와 함께 내한한, 파리 포그의 주니어에디터. ‘멜라니’가 몽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대뜸 꺼낸 말이었다.
아름답다.
그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수차례 주억거려 보인 제랄딘이, 기다란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쭉 뻗은 일자형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꽃송이들이 만개해 있다.
몽환적이었다. 여긴 ‘이상한 나라’고, 자신은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제랄딘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의식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럴 때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짙은, 꽃향기가 느껴지곤 했던 탓이었다.
또각, 또각….
연신 낭랑한 굽 소리를 내보이며 걷던 제랄딘이,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랐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며, 전시 공간 안쪽으로 들어서던 순간.
“멜라니.”
“네?”
“아무래도 한국에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모퉁이를 돌아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벽면을 뒤덮고 있는 꽃송이의 색이 아예 달라졌다.
이번에는 순백색.
새하얀 ‘백합’(Lily) 꽃송이가 벽면을 빼곡하게 수놓고 있는 상태였다.
어림짐작컨대 최소 수천 송이는 될 법 해 보이는, 어마어마한 양.
쇼를 찾은 방문객들은, 다들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비록 ‘포토존’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잘 꾸며진 전시 공간 전체가, 포토존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흠, 구역별로 벽면에 DP 해놓은 꽃의 색상을 다 다르게 해뒀나 보네.’
제랄딘이 한창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그때.
“제랄딘.”
“네?”
“저기가 쇼룸인가 봐요.”
짤막하게 말해 보인 멜라니가, 저 멀리를 턱짓으로 한 번 가리켜 보였다.
‘쇼 윈도우(Show Window)’.
건물 내부 벽면 중, 유일하게 꽃송이로 뒤덮여 있지 않은 공간이었다.
깨끗하게 닦여 있는 얇은 유리창과, 그 너머의 협소한 공간. 그 안에 마네킹 몇 개가 세워져 있었다.
저 멀리 자리한 쇼 윈도우를 바라보고 섰던 제랄딘이, 이내 나직이 중얼댔다.
“일단 디자인부터 한 번 확인해 볼까요? 가장 중요한 건 옷의 디자인이니까요.”
비록 소리 내어 말해 보였다지만,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 건넨 말이나 다름없었다.
쇼장의 휘황찬란한 디스플레이에 현혹되어,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옷의 디자인’이다.
“후우-.”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제랄딘이, 손에 쥐고 있던 선글라스를 이마에 걸쳐 보이고는 쇼 윈도우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쇼윈도 너머에 서 있는 마네킹에 닿던 순간.
아니, 마네킹에 DP 되어 있는 ‘미니멀리즘’ 컨셉 의류에 닿던 순간.
“와우….”
그녀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펑퍼짐한 핏 감의 검정 슬랙스, 버튼 라인(Button Line)을 따라 자수가 들어가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흰색 와이셔츠 등….
쇼 윈도우 너머의 마네킹들은 하나같이 ‘미니멀리즘’의 정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옷들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런 마네킹들의 곁으로는, 형형색색의 꽃송이들이 잔뜩 흩뿌려져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지극히 감각적이고 화려한 DP 방식에 비해, 옷의 디자인은 조금도 화려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수수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단조로움을 간신히 벗어난 수준이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성향 자체가 그렇다. ‘평범함’과 ‘단조로움’ 속에 숨겨져 있는 은은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
그럼 극도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DP 방식이, 옷의 디자인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냐고?
‘아니, 전혀….’
오히려 화려한 디스플레이가, 미니멀리즘 룩의 강점을 부각시켜 주고 있었다.
한참 동안 제 턱을 쓸어내려 가며 마네킹에 DP 된 옷을 바라보던 제랄딘이, 이내 다소 격양된 투로 말문을 열었다.
“멜라니, 혹시 그거 알아요? 브랜드 월 플라워는 원래 ‘스트릿 브랜드’예요.”
“…네?”
“브랜드 설립 이후 올해 S/S시즌까지는, 스트릿 의류만 주야장천 발매했었죠.”
제랄딘의 말에, 멜라니가 휘둥그레 뜬 두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사실이에요?” 하고 되묻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내 제랄딘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아직 월 플라워의 오너 디자이너 ‘리(Lee)’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라요. 인터넷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이기도 했고, 따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으니까요.”
“음, 그런데요?”
“짐작컨대, 월 플라워의 오너 디자이너 ‘리’는 두 가지 부류 중 하나에 속한 사람인 것 같네요.”
“궁금한데요?”
“첫 번째,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성장한 노련한 디자이너일 거예요. 나이는 최소 서른 이상일 테고요.”
“다음, 두 번째는요?”
“간단해요. 젊은 천재 디자이너겠죠.”
이내 멜라니 역시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 대기 시작했다.
비록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살펴봐야 했으나, 두 사람 모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창 너머에 전시된 옷들은, 하나같이 오너 디자이너의 기량을 확실히 알 수 있게끔 해주는 옷들이었다.
채택한 원단의 질감과 조화로움, 깔끔하고 단정하기 그지없는 ‘*실루엣(*Silhoutte: 의복의 전체적인 윤곽)’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최소한의 멋과 아름다움.
모두 ‘노련함’, 혹은 ‘천재성’을 필요로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멜라니, 저 옷들이 지니고 있는 ‘마감 곡선’을 눈여겨서 살펴보시겠어요?”
“아, 네. 안 그래도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시선을 사로잡는, 정말 아름다운 곡선이네요.”
“저건 반복된 학습에 의해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나. ‘요령’ 따위가 아니에요. 설령 반복된 학습으로 체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제랄딘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멜라니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대신 정답을 말했다.
“최소 10년 이상 ‘프리미엄 브랜드(Premium Brand)’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카피하지 않는다면, 절대 습득할 수 없겠죠. 저건 일종의 감각이고, 학습으로 감각을 만드는 데는 최소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제랄딘과 멜라니가 재승을 젊은 천재 디자이너, 혹은 노련한 삼십 대 이상의 디자이너로 짐작하고 있는 이유였다.
타고나야 하는 감각이다.
만약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다면, 적어도 십 년 이상은 웅크린 채로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해야지만 만들 수 있는 감각이다.
이내 제랄딘이 이채가 가득 서린 눈을 한 채, 격양된 투로 재차 첨언했다.
“어서 모델 워킹을 보고 싶네요. 아니지, 차라리 어서 쇼가 끝나 버렸으면 좋겠어요.”
“네? 왜요?”
“쇼가 끝나야, 월 플라워의 오너 디자이너. ‘리’를 만나볼 수 있을 테니까요.”
궁금했다.
자신이 파리 포그의 에디터가 된 이래로,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동양인 디자이너다.
아니.
동양인 디자이너 중에서는 최초로, 자신이 쓴 칼럼의 주인공이 될 디자이너다.
‘리(Lee)’.
그는 과연 어떤 남자일까? 땅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범재일까? 아니면, 유명 디자이너들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감각을 타고난 천재일까?
저 유리창 너머 마네킹에 DP 되어 있는, ‘미니멀리즘 룩’에 담긴 성질은 과연 무엇일까?
노력일까? 아니면, 천재성일까?
“어쨌든, 더 둘러보도록 하죠. 쇼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요.”
“그래요.”
비록 모델 워킹까지 두 시간이나 남아 있는 상태였으나, 볼거리라면 잔뜩 남아 있었다.
이곳 파워 센터의 3층, 4층 전체가 전시공간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두 사람이, 다른 쇼룸을 살펴보기 위해 재차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변의 이목이 자신들에게 쏠려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런데 런웨이 무대가 안 보이네요?”
“4층에 설치해 두지 않았을까요?”
“그렇겠죠?”
* * *
월 플라워의 2011 F/W시즌 쇼가 한창 진행 중인 이곳, 파워센터 건물 안.
재승의 가족들 역시, 전시공간을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와, 엄마. 대박, 대박.”
“왜?”
“저기 저 사람, 엄청 유명한 연예인이야-!”
재승의 동생, 승희가 손가락으로 저 멀리에 서 있는 젊은 남성을 가리켜 보였다.
류승호.
말끔한 슈트 차림의 그가, 쇼룸 쇼 윈도우 너머에 전시된 옷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내 어머니, 김은형이 자못 감격스러운 표정을 한 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들이 만든 옷을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단 사실만 하더라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한데 기자에, 심지어 연예인까지 찾아올 줄이야.
“아빠, 오빠가 성공하긴 했나 봐요!”
이승희가 너스레를 떨어 보이자, 아버지 이강수가 미간을 팍 좁히며 사뭇 단호한 투로 답했다.
“겨우 이거 가지고 성공은 무슨.”
“하여튼, 이이는….”
“그나저나 이건 언제 끝나는 거야? 배고파 죽겠네.”
다소 이죽거리는 투로 말해 보인 이강수가, 뒷짐을 진 채로 괜히 몇 걸음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내 이승희와, 어머니 김은형이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교환하고는 동시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했다지만, 그 속내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세 사람이 그렇게 전시 공간 곳곳을 둘러보고 있던 찰나.
상가 건물 내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이제 곧, 2011 월 플라워 F/W쇼의 모델 워킹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방문해 주신 귀빈 여러분께서는, 에스컬레이터 주변에 마련된 좌석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이제 곧….
* * *
현재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파워 센터의 옥상 층은, 사실상 ‘백스테이지’(Back Stage)나 다름없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모델들의 분장·대기·환복 등, 모든 준비를 이곳에서 진행하게 된 것이다.
기다랗게 늘어선 행거 앞으로, 가벼운 쉐딩 분장을 마친 여성 모델들이 속옷 차림에 담요 하나만 두른 채 일렬로 서 있었다.
이강준은 그런 그녀들 덕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연신 쩔쩔매는 중이었고.
그때.
재승이 그런 이강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나긋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이었다.
“강준 씨, 민망해하는 게 오히려 실례일 수도 있어요. 저분들에겐 이게 일이잖아요.”
“네. 주의하겠습니다.”
“뭐, 주의할 거까지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재승은 직원들 앞에서 되도록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만이라도, 단단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델들이 지정된 복장으로의 환복을 모두 끝마쳤다.
재승은 간단한 검토를 마친 뒤, 모델 워킹이 시작되는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가만히 앉아 시계를 째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전에도 몇 번이고 느꼈지만, 시간이란 정말 상대적이다.
1초, 1초가 이렇게 길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나?
재승이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든 채, 괜히 문가 쪽을 왔다 갔다 배회하던 찰나.
옥상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진행 스태프가, 단 한 치의 굴곡조차 없는 투로 나직이 말했다.
“이제 1분 남았습니다. 전시 공간 전체 암전하겠습니다.”
“네.”
* * *
순식간에 전시 공간의 모든 등이 암전되었다. 건물 3·4층 전체에 난데없이 어둠이 내려앉은 셈이었으나,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타악-!
형광등이 꺼지기 무섭게, 곳곳에 설치된 LED 램프에 불이 들어온 덕이었다.
건물 내부 벽면 전체를 뒤엎고 있던 꽃송이들 사이로 배선된 LED 램프들.
또 층과 층을 연결해 주는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설치된 백열전구들.
스위치가 켜지고, 설치된 모든 전구들이 불빛을 발하기 시작하던 순간.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귀빈들이 하나같이 낮은 탄성을 흘려 보였다.
“오….”
다들 ‘에스컬레이터’를 ‘런웨이’대신 사용하리란 사실을, 으레 짐작하고 있었다.
런웨이 무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에스컬레이터를 기점으로 좌석을 배치해 둔 상태였으니 말이다.
비록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에 압도되고 만 것이다.
얇은 꽃잎을 투과하여 새어 나오고 있는 형형색색의, 오색찬란한 불빛들.
또 런웨이 무대가 되어줄 에스컬레이터만을 밝혀주고 있는, 백열전구의 불빛들까지.
객석 곳곳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오기를 잠시.
이윽고.
쿵. 쿵. 쿵. 쿵.
오늘의 쇼를 위해 특별히 임대한 ‘야마하’사의 최고급 스피커에서, 재승이 공을 들여 선곡한 일렉트로닉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장내에 모여 있는 모두가 기대감이 잔뜩 서린 눈을 한 채, 에스컬레이터 끝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스으으윽-.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모델 워킹의 초미를 장식할 첫 번째 모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모델 워킹이 시작된 지금, 백스테이지는 여전히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일렬로 선 채 자신의 워킹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델들과, 연신 무전을 주고받고 있는 스태프들.
다른 직원들은 이미 3층으로 이동해 쇼를 관람 중이었고, 재승만 옥상에 남은 채 제 옷맵시를 다듬는 중이었다.
“후우….”
오늘 런웨이에 서는 모델들의 수는 총 서른두 명이다. 그들의 워킹이 모두 끝나게 되면, 자신의 차례다.
지금.
디자이너로서 런웨이에 올라, 자신의 쇼를 찾아준 귀빈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순간을.
전생부터 한결같이 꿈꿔오던 그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발은 분명 땅에 착 달라붙어 있는데, 정신이 하늘 위로 ‘붕-.’ 하고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1초, 1초, 1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긴장이 고조된다.
재승이 괜히 한쪽 다리를 떨어대던 찰나.
“디자이너님!”
진행 스태프 한 명이 대뜸 외쳐 보인 말에, 재승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랄까? 긴장감이 한계점을 넘어서고 나니, 오히려 차분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네.”
“이제 대기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내 재승이, 비치된 거울을 마지막으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깔끔하게 넘겨 올린 머리칼, 이번 F/W시즌의 주력 상품인 와이셔츠와, 검정 슬랙스까지.
우선 복장은 완벽하다.
최종점검을 마친 재승이 옥상 출문 앞에 서던 찰나, 마지막 모델이 옥상 출문을 열고 나섰다.
이제 다음은 자신의 차례다. 가슴팍이 살살 죄어온다.
그로부터 채 30초는 흘렀을까?
진행요원이 직접 문을 열어주며, 덤덤한 투로 말했다.
“지금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윽고, 재승이 옥상 계단을 따라 ‘터벅, 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를 잠시.
층간 끝에 자리한 반쯤 열린 문에서, 환한 불빛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후우….”
폐부에 남아 있는 숨을 긁어내듯 토했다. 한숨 소리가 공허히 울리기를 잠시.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써가며, 층간의 문고리를 손에 꽉 쥐었다.
이건 도전이다.
그리고 반은 성공했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성공했으니, 반은 성공인 셈이었다.
이윽고.
재승이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마저 열기 시작하자, 뻑뻑한 문이 기괴한 쇳소리를 내보였다.
끼이익-!
모든 것들이 저 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도전의 결과가.
진저리가 날 정도로, 반복해서 상상해 왔던 순간이.
그렇게나 보고 싶어 했던 광경이.
묵혀두기만 했던 오랜 꿈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어느 날, 계속해서 뒤로 미뤄지길 바라며 모른 척하던 숙제와도 같은 모든 것들이.
도망치고, 피하다가, 결국엔 포기했지만.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바래왔던 모든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