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61)
블랙 라벨-60화(61/299)
블랙 라벨 60화
61. 폭풍이 지나간 뒤
터벅. 터벅.
층간을 나선 뒤, 재승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런웨이 무대나 마찬가지인, 에스컬레이터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10m 남짓.
꿈꾸던 순간을 목전에 두게 되니, 지난 삶을 회고(回顧)해 볼 여유라도 생긴 것일까?
느닷없게도, 지난날의 기억들이 연쇄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방.
그래. 지난 삶은, ‘검은 방’과 닮아 있다. 그곳은 어둡고, 습하며, 협소하고, 불쾌하다.
나는 그곳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문고리를 찾기 위해, 맹인처럼 연신 손을 더듬거렸다.
동대문 의류 타운의 소점포에 취직했다.
박봉에 허덕이며, 휴일이면 헌책방을 전전했다.
대학생들의 전공서적을 구입하기 위함이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했고, 수마를 쫓아가며 재봉틀 페달을 밟았었다.
비록 흙바닥을 기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지만, 언젠가 비상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나는 한 마리 유충(幼蟲)이고, 언젠가는 등에 날개가 돋아나리라 믿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일념 하나로 참아낼 수 있었다.
적어도,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단 사실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그랬더랬다.
시력의 상실은, 내 삶에 찾아온 희망의 부재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검은 방과 같은 내 삶 속에 문고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다.
그 무렵의 나는, 더 이상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죽어가는 이에 불과했으니까.
딱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양분을 섭취했고, 딱 필요한 만큼의 잠을 잤으며, 딱 필요한 만큼의 일을 했다.
무인도에 표류된 사람이, 탈출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식량? 식수? 아니면, 튼튼한 뗏목 한 대? 모두 정답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다른 섬의 존재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천장부에서 석면 가루가 떨어지는 동대문의 허름한 지하 작업실에서, 희망을 잃고 서서히 죽어가던 지난 생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수고 많았어. 정말 수고했어….”
온통 쓰라린 기억으로 얼룩져 있는 시간들이다.
하지만 반대로 좋은 ‘자양분(滋養分)’과 같은 시간들이기도 하다.
만약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검은 방의 탈출구 앞에 서게 된 나도 없었을 테니까.
이윽고.
멈춰 있는 에스컬레이터 위로 한 걸음을 내딛던 순간.
짝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재승은 넋을 놓은 채,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보이는 좌중들의 모습을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좀처럼 이룰 수 없던 꿈의 단면과 조우하게 된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태연하게 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을 몇 번 흔들어 보이고, 다시금 유유히 퇴장하고 싶었다.
한데, 어디 세상일이 다 마음처럼 되던가?
이를 악문 채, 바득바득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내가 그렇게나 동경했던 이들이 바라보던 세상은, 이런 모양이었구나!’ 싶은 생각 탓에, ‘그들의 세상은 이토록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고, 아름다웠구나’ 싶은 생각 탓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울컥하고 치솟는다.
애써 미소를 머금은 채, 귀빈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묵례를 해 보이기를 잠시.
이내 재승이 곧장 등을 돌려서는, 천천히 걸어온 길을 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시금 층간 문 앞에 다다랐을 무렵. 다시 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돌아왔을 무렵.
“끄으윽… 흐윽….”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어두컴컴한 복도 벽면을 짚고 선 채로, 한참을 흐느껴야 했다.
이건, 안도감이다.
내가 꾸던 ‘꿈’이 이렇게 멋진 것이었구나. 그래도 한 발이나마 내딛는 데 성공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 * *
짤막한 피날레 무대가 끝나기 무섭게, 장내의 분위기가 사뭇 부산스러워진 듯 보였다.
오늘 쇼에 초대받은 이들 중, 재승과 직원들의 지인·가족을 제외한 모두가 업계 종사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피날레 무대가 끝나기 무섭게, 곳곳에서 자연스레 취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목을 끌고 있는 것은, 단연 파리 포그 측의 귀빈들이었다.
“리(Lee)의 미니멀리즘이, 제게 무한한 영감을 주더군요. 큰 이변이 없는 한, 다음 파리 포그 발행호에 리의 행보와 관련된 내용이 수록될 겁니다.”
곳곳에서 호평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재승과 가장 돈독한 셀럽(Celebrity) ‘류승호’부터, 나름 인지도가 있는 신진 디자이너들에 이르기까지….
그때, 재승이 다시금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앞 머리칼을 말끔하게 위로 넘겨 올린 ‘포마드 헤어’에, 흰색 와이셔츠와, 검정 슬랙스. 마지막으로 단정하기 그지없는 로퍼를 신은 채로.
재승이 등장하기 무섭게, 기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곳곳에서 플래시 불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재승이 꽤나 진중한 투로 말을 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인터뷰는 잠시 뒤에 일괄적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긋한 투로 말해 보인 재승이, 천천히 전시 공간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쇼를 찾아준 귀빈들에게, 감사 인사부터 올리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라 판단한 것이다.
우선은 가족들.
“오빠, 대박! 완전 멋있었어-!”
칭찬에 인색한 동생, 승희가 제 양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며 건넨 말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마워.” 하고 답해 보이자, 아버지께서 곧장 말을 이었다.
“잘 봤다.”
짤막한 말 속에서,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이마저도 부끄러우셨던 것인지, 아버지께서는 연신 딴청을 피워대셨다.
그다음에는, 어머니.
“고생 많았어. 우리 아들, 정말 멋있더라.”
엷게 떨리는 투로 말해 보인 어머니께서, 이내 고개를 푹 떨구신 채 어깨를 들썩이시기 시작했다.
눈치도 없이 연신 “엄마, 울어?” 하고 물어대는 승희에게 한차례 눈짓을 해 보인 뒤, 아무런 말없이 어머니를 꼭 끌어안아 드렸다.
“아이고, 나 진짜 주책이다. 이 좋은 날에, 갑자기 눈물이 왜 나오나 몰라….”
감정이란 게 으레 그렇듯, 쉽게 전파되게 마련이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어머니의 눈을 보고 있자니, 한바탕 쏟아냈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꾹 눌러 참은 채, 씩씩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쉽게도 가족들과의 대화는 짧게 일단락되었다.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들이, 한참이나 남아 있던 탓이었다.
재승은 꽤 오랫동안 계속해서 전시공간을 순회해야 했고,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가 그런 재승의 뒤를 졸졸 따랐다.
셔터 소리가 잠잠하졌다 싶다가도, 재승이 영향력이 있는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다시금 득달같이 울려대곤 했다.
이윽고, 재승이 파리 포그 측 인물들과 대면하던 순간.
찰칵- 찰칵-
곳곳에서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때때로 ‘허세’나, ‘허례’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재승은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제랄딘, 반가워요.”
나직이 말해 보인 재승이, 곧장 제랄딘 사글리오의 뺨에 제 뺨을 가져다댔다.
이른바 ‘비쥬(La Bise)’라 불리는, 프랑스식 인사법. 그다음엔 곧장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멜라니의 뺨에, 제 뺨을 가져다댔다.
“반갑습니다.”
이내 재승이 다시금 제랄딘을 바라보며, 한껏 밝은 표정을 한 채 말을 꺼냈다.
“제랄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통역사가 재승의 말을 전달해 주기 무섭게, 제랄딘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아뇨, 정말 훌륭한 쇼였어요. 감각적인 디스플레이부터 시작해서, 재승만의 미니멀리즘까지, 모든 게 새롭고 재미있었어요. 진심으로요.”
이내 제랄딘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차 덧붙여 말을 이었다.
“혹시 오늘 저녁식사라도 함께할 수 있을까요? 간단히 대화라도 나눌 겸 해서요.”
“그럼요. 물론이죠.”
두 사람이 통역사를 사이에 두고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기자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데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셔터 음이 끊일 줄 모르고 울려 퍼졌고, 플래시 역시 멈출 줄을 모르고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 * *
– 파리 포그(Paris Pouge)를 움직인 19살 천재 디자이너.
– 특집 기사, 인물 탐구: 그래서 ‘이재승’이 누군데?
– 월 플라워 2011 F/W쇼, 패션계 거물들의 향연.
쇼가 끝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언론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생선 가시 같은 업적 위로 공룡의 살을 붙인 기사들이 잔뜩 보도되었다.
비록 ‘대서특필(大書特筆)’까지는 아니라지만, 인터넷 뉴스나, 여러 패션 커뮤니티에 이번 쇼와 관련된 기사·칼럼들이 여름철 소낙비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우습게도 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말이다.
우선 ‘천재’라는 수식어가, 그렇게 거북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또 모든 게 패션을 독학한 지 3년 만에 이룩해 낸 결과라는 내용 역시, 빠지지 않고 수록되어 있었다.
나는 절대 천재가 아닐 뿐더러, 3년? 아니다.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걸린 결과물이다.
굳이 항변할 이유도, 방법도 없었기에 잠자코 지켜보는 게 전부였지만.
어쨌든, 이번 쇼를 통해 배운 게 한 가지 있었다.
선택 한 번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면밀히 깨달았다.
쇼를 마친 이후로 들어온 인터뷰 제의만, 무려 12개에 달했다.
매출은 하늘을 뚫고 올라갈 추세였고, 직원들은 다시금 과로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이다.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랄 수 있었다.
꽤 영향력 있는 국내 패션 매거진과의 인터뷰가 시작되기에 앞서, 스마트폰으로 관련 기사들을 훑어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디자이너 님, 오래 기다리셨죠? 준비 끝났는데,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젊은 남자 리포터가 건넨 물음에, 재승이 한차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네. 그럼요.” 하고 답해 보였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한 가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일방적으로 임대계약을 취소해 버린, 갤러리 티티에 대한 사소한 복수라고 하면 좋을까?
본래 ‘인지도’라는 게, 요령 있게 잘 다루기만 하면 좋은 무기가 되게 마련이지 않던가?
몇 번이고 말했듯, 가진 무기들은 최대한 활용하자는 주의이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포터의 입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여타 패션쇼와 다르게 갤러리가 아닌, 상가 건물에서 쇼를 진행하셨죠? 영감을 얻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아뇨. 영감을 얻게 된 계기까지는 아니고… 사실 웃지 못할 해프닝이 하나 있었거든요.”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네요, 어떤 해프닝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돈 몇 백만 원이면 쉽게 달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사소한 복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문화 자체를 근절하고자 하는 의지도, 적잖이 반영되어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청담동 외곽 쪽에 있는 4층짜리 모 갤러리였는데, 앤틱한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임대 계약을 채결했었거든요.”
“벌써 어딘지 알 것 같은데요? 제가 알기로는 그쪽에 앤틱한 분위기의 갤러리면, 딱 한 군데밖에 없거든요. 그래서요?”
자, 그럼 썰 좀 풀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