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62)
블랙 라벨-61화(62/299)
블랙 라벨 61화
62.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세요
오늘 인터뷰를 주관하는 매거진의 이름은, ‘매거진-제트(Magagine-Z)’.
비록 메이저급 잡지사까지는 아니라지만 꽤 매니악한 대중들이나, 업계 종사자들은 꾸준히 챙겨보는 잡지들 중 하나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루는 토픽 자체가 꽤 화끈한 편이다.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 떠도는 흐뭇한 미담 내지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만한 비화를 주로 다룬다고 해야 할까?
타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류의 질문을 수두룩하게 받아왔지만, 굳이 이런저런 내막을 밝히지 않고 아껴두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매거진-제트’의 에디터들은 이런 가십(Gossip)거리를, 자극적으로 포장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뭐가 됐든,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제일이지 않겠는가?
“쇼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당했어요.”
“이유는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계약 취소 사실도, 문자메시지로 통보받았고요.”
“예? 달랑 문자로요? 그게 무슨 경우 없는….”
그 말에 가뜩이나 어둡던 리포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갤러리 티티가 보인 처신은, 누가 보기에도 몰상식한 경우였으니까.
“아, 잠시만요.”
나직이 말해 보인 재승이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가며, “그때 받았던 문자메시지, 아직 안 지워졌을 거예요.” 하고 말했다.
제 스마트폰 액정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려 대기를 잠시.
“저, 리포터 님.”
“네?”
곧 벌어지게 될 ‘차도살인’에 앞서, 양의 탈을 뒤집어쓸 때라고 생각했다.
숨을 한 번 가다듬고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한 채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갤러리 대관 문제 말인데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내용이거든요.”
“네?”
“앞선 인터뷰에서도 몇 번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 꺼냈었어요.”
피해자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 몰입하기가 더없이 쉽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따지고 보자면, 진짜 피해자인 상황이기도 하니까.
“다 끝난 마당에 굳이 공론화시키고, 구설수에 휘말려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요? 지나간 일이고, 잘 해결됐고, 덕분에 좋은 결과까지 얻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안 그래요?”
“흠, 글쎄요?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그런데요?”
“그래서 그냥 입 꾹 다물고 넘어가려고 했었거든요. 그랬더니 속에서 뭐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 있죠? 도저히 억울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오직 유학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꿈을 짓밟는 행위가, ‘관례’니, ‘악습’이니 하는 말들로 이해받고 있는 바닥이다.
패배는 죄가 아닌데, 또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닌데, 다들 수긍하고 넘어가는 눈치다.
하지만 누군가는 공론화해야 하는 일이다. 또 누군가는 싸워줘야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제3의 피해자가 속출할 테니까.
“리포터님은, 저희가 대관 계약을 취소당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음, 글쎄요….”
짐작 가는 이유라면 얼마든 있지만, 함부로 발설하기엔 모호한 내용이었기에 대답을 아끼는 듯 보였다. 이내 재승이 다소 자조적인 투로 말을 이었다.
“이게 사실 되게 뻔한 상황이거든요? 심증뿐이긴 한데… 저희 월 플라워가 대관하기로 한 기간에, 다른 유학파 아티스트가 임대 문의를 했을 거예요.”
재승의 말에 리포터가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대기 시작했다.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그 역시 그렇게 짐작하고 있던 것이다.
“비록 상호간의 협의가 있었는지, 아니면 갤러리 원장이 임의로 그렇게 결정한 건지는 모르죠. 어쨌든, 저희 월 플라워는 오너 디자이너가 유학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뺏긴 거예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유학파가 아니라서 안 된다? 누군 유학 가기 싫어서 안 갔겠어요? 얼마나 억울한 상황이에요? 안 그래요?”
“흠, 그렇죠.”
“억울한 마음에 곳곳에 토로했더니, 다들 이해를 강요하더라고요. 이 바닥에서는 꽤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그냥 이해하래요. 악습이고, 관례니까, 그리고 잘 끝났으니까, 그냥 참고 넘어가래요.”
이내 재승이 독기가 가득 서린 눈을 한 채, 리포터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기성세대가 조금 더 배웠다는 이유로, 조금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국내파 디자이너들의 인생을 내건 도전의 성패(成敗) 여부를 판가름 짓고 있는데, 그걸 그냥 이해해라? 저는 못하겠더라고요.”
팔짱을 끼고 앉은 채 재승의 말을 경청하던 리포터가,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재승 디자이너 말씀은 같이 좀 꼬집어 달라는 거 맞죠?”
“네. 맞아요.”
“잘 생각했어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그가, 이내 악동처럼 짓궂은 표정을 한 채 재차 덧붙여 말했다.
“꼬집고, 까발리고, 싸우고, 이렇게 말하니까 너무 살벌한가…? 어쨌든 그런 건 우리가 전문이거든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눈앞에 앉은 리포터가 사뭇 듬직해 보일 지경이었다.
“원래 이 바닥이 더러운 곳이에요. 디자이너가 되면 끝일 것 같은데, 이재승 디자이너도 아시다시피 사실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알력 다툼은 끊이질 않고, 학벌 따져, 학연 따져, 지연 따져, 인맥 따져, 배경 따져….”
한차례 키득거려 보인 리포터가, 이내 제 명함을 건네주며 재차 말을 이었다.
“가만 보면, 정말 가십거리가 끊이질 않는다니까요? 매 주마다 칼럼 소재가 될 만한 골 때리는 사건들이 쏟아져 나와요. 뭐, 소재가 고갈될 일은 없으니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아쉽다니까요?”
재승이 명함을 받아 들던 찰나, 그가 재차 덧붙여 말했다.
“진흙 속에서도 꽃은 핀다지만, 꼭 진흙 속에서만 피는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이내 명함에 쓰여 있는 이름 석 자를 확인한 재승이, 한차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매거진-제트 소속 리포터: 최유훈 ]훗날 ‘FTV매거진’이 규모를 키우게 될 무렵, FTV매거진의 칼럼리스트 겸 에디터로 영입되어 패션계의 온갖 부조리를 꼬집는 독설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이였다.
그 이름만 알고, 얼굴을 모르고 있던 터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던 것이고 말이다.
“그럼 일단 갤러리 측으로 받았다는, 문자메시지부터 좀 보여주시겠어요?”
“네. 여기요.”
재승에게 건네받은 휴대폰 메시지의 내용을 살피던 리포터, ‘최유훈’이 눈썹을 한 번 튕겨 보이고는 스산하기 그지없는 투로 재차 말을 이었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확실하게 조져보자고요.”
재승이 한차례 피식 웃음을 흘려보이자, 그가 “너무 상스럽게 말했나요?” 하고 되물었다.
쇼가 끝났고, 많은 게 변했다.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브랜드 월 플라워의 입지였다.
이제 내 말에는, 전과 다른 ‘힘’이 실려 있다. 부조리를 꼬집겠다 결심한 이유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고.
“아뇨, 좋네요.”
짤막하게 말해 보이고는, 재차 뒷말을 덧붙였다.
“확실하게 조져보죠.”
부디 이번 대립을 통해, 잘못된 모든 것들이 조금이나마 제자리를 되찾기를.
* * *
‘갤러리 티티(Galley TT)’의 원장, 주인혜가 애써 미소를 머금은 채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갑작스레 대관을 취소하겠다니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잡혀 있는 대관 계약을 ‘캔슬(Cancle)’하는 전화 몇 통이 연달아 걸려오기 전까지는.
또,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중년 디자이너가 갤러리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이유까지 말씀드려야 합니까? 위약금 입금했습니다. 더 이상 할 말 없으니, 이만 끊도록 하겠습니다.
뚝.
“여보세요? 여보세요…?”
통화가 끝났음을 확인한 그녀가, 제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한차례 깊은 숨을 뱉어냈다.
“하아….”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번 달 대관 일정표로 향했다. 불과 몇 시간 사이, 잡혀 있던 모든 대관이 취소되었다.
단 한 개도 남김없이 모두 말이다.
이내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중년 디자이너가 미간을 바짝 좁힌 채 되물었다.
“이제야 사태 파악이 좀 되시나 보네요?”
“아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다짜고짜 찾아오셔서, 무례하게….”
불과 며칠 전, 자신 소유의 갤러리에서 쇼를 올렸던 디자이너였다.
성공적으로 진행된 쇼였고, 반응 역시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데,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주인혜의 입장에서는, 당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요? 무례하게…?”
어이없다는 듯 되물어 보인 중년 디자이너가, 접객실 테이블 위로 잡지 책 한 권을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당신 덕분에 업계 내에서의 제 평판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후배 디자이너의 쇼를 빼앗은, 파렴치한 선배가 되어버렸다고요!”
“예…?”
“제가 문의한 기간에, 이미 대관 예약이 있다고 왜 말 안 하셨습니까? 덕분에 저희 브랜드 홈페이지 메인에, 신상 홍보 배너가 아닌 사과 공고문을 걸게 됐다고요!”
상투적인 투로 되물어 보인 그녀가, 이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잡지책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매거진-제트(Magazine-Z)’라는 잡지의, 이번 달 발행호였다.
이내 제 옷맵시를 한 번 다듬어 보인 중년 디자이너가, 엷게 떨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시간 많으실 텐데, 한 번 읽어보시죠. 앞으로 이쪽 업계에서는, 티티와 함께 일할 디자이너를 찾기 힘들 겁니다. 아니, 아예 없을 겁니다. 설령 아직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없도록 만들 거고요.”
“그, 그게 아니라….”
말끝을 흐려 보인 그녀가, 이내 잡지책 표지로 시선을 돌렸다. 큼지막한 글귀로 쓰여 있는, 이번 발행호의 헤드라인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그때.
“아무튼 이 부분과 관련해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할 겁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말을 마친 중년 디자이너가, 곧장 접객실을 나섰다.
“디자이너 님! 디자이너 님!”
애타게 그를 불러대던 주인혜가, 이내 입술을 파르르 떨어대며 잡지책을 집어 들었다.
사락- 사락-.
책장을 얼마 넘기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이 실려 있는 페이지가 펼쳐졌다.
얼마 전 갤러리에 방문해 대관 계약을 채결했던, 모 브랜드의 젊은 오너 디자이너였다.
단연 그뿐 아니라, 그를 포함한 신진 디자이너 다섯 명이 모여 담화(談話)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 인터뷰인 듯 보였다.
“하아….”
그에게 했던 망발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기 무섭게,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가 인터뷰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리포터: 그나저나 월 플라워는 갤러리가 아닌 상가 건물에서 쇼를 진행해서, 더욱 화제가 됐었죠? 영감을 얻게 된 계기라도 있으신가요?
이재승 디자이너: 원래 청담동에 자리한 앤틱한 느낌의 갤러리에서 쇼를 진행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쇼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당했고요. 부랴부랴 다른 갤러리를 알아보다가, 저희 쪽 ‘VMD’가 상가 건물에서 쇼를 진행해 보자는 안건을 꺼냈고, 그대로 채택된 거죠.
고용태 디자이너: 청담동에 자리한 앤틱한 느낌의 갤러리라… 제가 알기로는 딱 한 군데밖에 없거든요? 어딘지 알 것 같네요. 저도 거기서 똑같은 일을 당했었거든요. 그나저나 갑자기 대관을 취소한 이유는요?
이재승 디자이너: 갤러리 원장님이 저희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눈치였어요. “오프라인 매장도 없으면 사실상 인터넷 쇼핑몰 아니냐?”, 내지는 “유학도 안 다녀왔냐?” 등의 무례한 질문을 연달아 받았었거든요.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 유학파가 아니어서 취소당한 게 아닐까요? (웃음)
이하늘 디자이너: 어쨌든 쇼는 성공적이었잖아요? ‘파리 포그’ 측도, ‘류승호’ 씨도, 그날 쇼를 찾았던 신진 디자이너들도 호평 일색이었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이재승 디자이너: 네. 제 입으로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나쁘지 않은 결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해요.
리포터: 이 자리를 빌려, 유학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대관 계약을 취소해 버린 갤러리 주인에게 한 말씀하시자면?
이재승 디자이너: 좀 솔직히 말해도 돼요? 수위 조절해야 하나?
리포터: 그냥 시원하게 부탁드릴게요.
이재승 디자이너: 음, 갤러리 번창하셨으면 좋겠고요…. 본인이 S.A.T 출신이라는 점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계신 듯한데, 찾아오시면 ‘S.A.T 출신’이라는 글귀가 프린팅되어 있는 티셔츠 한 벌 제작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세요. (웃음)